어린이날 휴일에 모처럼 강북의 명동 성당 뒤켠에 있는 S호텔에서
외빈을 만날 약속이 생겼다.
오랬만에 들린 그 동네는 이제 텐트치고 농성하는 과격한 사람들이나
스피커의 소음도 없었고
길거리에 펄럭이는 만국기와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파가
지금이 바로 명동 축제 주간임을 알리고 있었다.
S호텔은 한 때 이 나라 호텔계에서 선두주자로 드날렸으나
이제는 내 뇌리에서도 차츰 사라지는 추억의 장소였는데
막상 찾아와 보니 썩어도 준치인가,
과거의 명성에 못지않게 여전히 손님들이 들끓었다.
원래는 일본 사람들 천지였는데 이제는 중국 사람들이
호텔을 가득 메운듯했다.
이 곳의 원래 소유주는 자식으로 딸만 둘이었는데
첫째인가 둘째인가의 사위가 경영의 귀재로 솜씨를 발휘해서
옛 명성에 도전하며 다시 흥륭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어설픈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라 사위네 집이 원래 부자라서 이 호텔을
인수하여 잘 운영한다던가---.
그런 범주의 스토리였었지---
하여간 이 호텔의 소유자 일족과는 나도 무슨 인연이 있다던가---,
오래 전에 풍문으로 들었던 쓸데없는 기억의 편린까지 문득
떠올랐다.
나와 내 고객은 1충 로비 라운지에서 만나서 브런치를 먹으며
상담을 진행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나는 모처럼 나가는 장소라서 약속보다 일찍 서둘렀고
막상 도착하여 보니 시간이 꽤 남았다.
잔잔하고 달콤한 음악이 실내를 넘실대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옛날에 익숙했던 "장밋빛 인생"이었다.
에디뜨 삐아프의 목소리는 아니고 요즘 사람 같았지만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속삭이듯 부르는 품새가
우리같은 중년에게 과거를 회상케 하고
조금 진도가 나가면 망각한 옛 애인의 전화 번호 끝자리
한두개쯤은 상기케하는 분위기였다.
장미빛 인생이라---.
"나의 사랑 너 체리, 왜 우느냐 체리
내사랑아
장미꽃 인생은 허무한 인생
나의 사랑 너 체리---"
나보다 네댓살 더 먹은 미미 누나와 준미 누나는
방학 때마다 내가 기류하고있는 친척집에 며칠씩 내려와서
숙제도 않고 놀다가 갔는데
그럴 때마다 자매는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불러대었다.
숙제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인생은 정말 장밋빛이었다.
이 두 누나의 미모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해야 한다는게
당시의 유행어 어법에 꼭 맞는 용례라고 할만했다.
아니 그 두 자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게는 척간으로보면 숙모 뻘인 아주머니는 더 예뻤다.
주위에서는 평양 기생같다고 조용히 수런거렸는데
지금의 기억으로 표현해 본다면,
글쎄 섹시하다는 표현이 맞을는지---
그러면서 기품 또한 대단한 분이기도 하였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나는 D시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최고 수준의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밥먹고 학교 다닐 거처가
마땅치 않았다.
마침내 선대의 복잡한 가족사의 한 끄나풀을 붙잡고
몸을 부칠 곳을 찾았으나 마음은 항상 불편하였고
비용은 일단 미래의 성공불,
내가 서울 법대를 가서 고시공부에 성공하고 난 다음에
지불하고야 만다는 묵시적 약정이
그 "마당 깊은 집 어귀에 막연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D시의 그 무더위 속에서도 여름 방학을 그냥 그 친척집에서
축내고 있었다.
밥을 축내고 내 자존심을 축내고---.
나는 열심히 공부한답시고 무식하게도 영어단어장을 씹아가며
주절주절 외워대고,
"있네있네 두이세, 한두삼치 제오제, 둘둘세었네"하면서
제곱 근(루트)의 값을 외우기도 하였고,
아마 원주율도 외웠으리라.
그러나, 그러나 내 대부분의 시간은 뒷곁 어두운 광속에서
헤르만 헷세의 "차륜 밑에서"나,
슈니쓸러, 혹은 뚜르게네프를 읽으며 지냈다.
아마도 틀림없이,
청춘 남녀의 싱싱한 연애 이야기를 읽을 때나
어른이 주인공인 복잡한 연애사건이 관능적으로 진행될 때에는,
그 어느 순간에도 수음은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묘하게 때맞추어
"장미빛 인생"을 두 자매가 불러대기라도 할 즈음에는
내 손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으리라.
"얘, 경식아 뭐하니?"
어느날 두 자매가 나를 불렀다.
나는 놀라서 황급히 손 놀림을 멈추었다.
"책 보지 뭐---."
"우리 등목 좀 해다오, 더워서 죽겠어, 까르르---"
둘은 뒷곁의 수도 가에서 윗통을 벗어던지고
받아놓은 수돗물을 등으로 끼얹어 달라고 나에게 주문했다.
"미쳤네, 총각한테---".
"더워 죽겠어, 빨리 끼얹어, 그리고 네가 총각이니?"
"어린 총각이지!"
그녀들의 등어리는 하얀 우윳빛이었다.
아니 어깨죽지 쪽은 장밋빛이었다.
나는 바가지에 하나 가득 냉수를 퍼다가 두 사람의 어깨에
좍 끼얹었다.
"아이, 차가와!"
그녀들이 몸을 꼬는 바람에 쫀득한 젖가슴이 묻어났다.
젖 꼭지만 장밋빛이었겠지만 지금도 내 생각에는 젖무덤
전체가 장밋빛이었던걸로 기억이 난다.
"얘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냐"
두사람의 어머니인 숙모뻘 아주머니가 언제인지 뛰어나와서
자매에게 타월을 던져주며 야단을 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내 숙모뻘, 이 아주머니는 6-25동란
때에는 D시로 피란을 와서 미군 상대로 카페를 했다고한다.
돈은 무척 벌었으나 어떤 미군 장교와 눈이 맞아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건 공인된 비밀이었다.
마침내 이들 부부는 갈라서고 오래 소식도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숙모뻘, 그녀에게는 돈과 미모가 있었다.
뿐만아니라 언변과 사교술이 또한 엄존해 있었다.
미미와 준미는 어머니를 빼박았다.
당연히 연애도 잘해서 돈많은 사람들에게 시집을 갔다.
언니는 성북동 재벌 집으로 갔고 아우인 준미는 그보다는
못했으나,
역시 대단한 부자 청년에게로 시집을 갔다.
서울역에서 남대문 사이에 지금부터 한 세대전에
이미 5-6충 빌딩을 소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신혼 살림은 빌딩의 소유를 밝히는양 그 맨 윗쪽에 차렸다.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어."
놀러간 나에게 속이 비치는 홈웨어를 입고 그녀는 죽는 시늉을
했다.
그때부터 내 성공의 척도나 목표는 서울 역 앞에 빌딩을 짓고
그 꼭대기에 가정집을 꾸리고서 찾아오는 친구에게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산단다."
그런 내숭을 떠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내숭을 떨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았다---.
부부란 무엇인가.
나는 일찍부터 이런 거창한 주제에 상면하였다.
갈라섰던 미미, 준미의 부모는 자매가 결혼식을 올릴즈음해서
굳게 다시 뭉쳐서,
두 딸 모두 웨딩 마치에서는 아버지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
신부입장 할 수 있었고,
이윽고 닥아 온 두 분의 회갑연에서는 백년해로한 부부의
성공사례로 주부 잡지의 여기자들이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여기자들의 취재 수첩을 오르락거린 이야기는
그달의 토픽으로 여성 잡지의 지면들을 덮었다.
애국한 이야기는 물론 빠져있었다.
두 자매의 아버지, 기구한 팔자의 그 행복한 어른은
여러해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달콤한 음악과 함께 흘러간 시절을 반추하다가
얼핏 정신이 들자 음악은 어느새 끝나있었고,
어떤 곱게 늙은 할머니가 건너편 테이블에서 연신 내쪽을
쳐다보고 계신게 아닌가.
아니 세상에!
그 고운 할머니는 미미와 준미의 어머니가 아니신가.
"이게 몇년만입니까. 세상에 숙모님이 여긴 왠일이십니까?"
"아이구, 조카님은 왠일이시고? 여긴 내 집이라오."
"아, 서울 역 앞으로 시집간 준미 누나의 호텔---?"
"그렇다우, 여긴 사위가 잘 경영하고 있지요---, 준미는
미미와 함께 LA에 살아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내 선대의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내가 그쪽 집안과는 내왕을
잘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한 세대가 지난 어린이 날에 기이한 해후를 하는구나---.
"손주들이 크죠?"
"그렇다우, 지들 외할아버지 기일이라고 녀석들이 미국에서 잠시
나왔어요."
이윽고 씩씩한 청년 두사람이 영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닥아왔다.
"그랜마!"
그들이 할머니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들에게 아저씨, 그러니까 "엉클"로 소개 되며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관심은 몇분상간으로 이미 끝나있었다.
가족의 재회,
할머니가 외손주들에게 브런치를 호텔에서, 그러니까 자기들의
집에서 대접해주는 모양이었다.
학기말이라 바쁠텐데---, 돈이면 귀신도 부를 수 있나,
아니 그 집안이 효심이 깊고 현실에 충실한 기질이 있지---.
우리네와는 달라, 공부만 잘 하면 뭘하나---.
5월은 푸르구나 어린이들은 여러모로 자란다.
조금 있으니 나의 상담 파트너가 나타났고
그와는 별도로 어떤 실버 연령의 신사도 혼자 라운지에
등장하였다.
"제 손님이 와서요---."
내가 인사하며 자리를 뜨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내 숙모뻘
고운 할머니는 내 인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문깐의 실버 신사에게 소리쳤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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