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아이티 방문기 1
하이티 난민촌에서 연을 날리는 소년
모든 곳이 난민촌 같기도 하다.
8박 9일간의 도미니카-하이티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또 길을 떠나기에 몇줄 급히 서술 형식으로 올리고 저 아래에는 난민촌의 사진도
잡히는 대로 순서없이 올립니다.
이번 도미니카와 하이티 방문은 "도미니카 문학동호회"의 초청과
World Grace Mission Center 및 ESD(하이티 발전소 운영 기업)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여정이었다.
도미니카 문학 동호회는 3년전부터 "한인 유소년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면서 그 심사 및
평가를 내게 부탁하여서 맺어진 인연이 그간 벌써 오래되었다.
후원을 한 두 기관은 차후 기회가 닿는대로 꼭 길게 소개를 하고 싶은 감동적 롱스토리의
대상이다.
이 모든 주선의 원동력은 문학회의 경명애 회장의 몫이다.
대상을 받은 이장미 학생의 소감이 아름답습니다.
한편 World Grace Mission Center는 열대 수림 속에 크게 자리하여 그간 세계방방 곡곡의 기독교 선교사들이나
청소년 및 나아가서 불신자들까지 두루 모아서 신앙 생활로 영혼이 다시 반짝이게하는 비영리의 명소였다.
그리고 그 주체는 놀랍게도 오래전 한국을 떠난 기업가 삼미 철강 그룹의 전 회장, 김현철 선교사와 부인 이은혜
권사였다.
병마와 가족사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온 김 선교사와 부인은
그후 해외에서 사업에 다시 성공한 후 이제는 세상에 기독교 신앙의 빛을 전하는 사람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은혜 권사의 역할이 커서 Grace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 같다.
성악 전공이지만 성대 결절을 겪어서 찬양대의 자리만 차지한다고 겸손한 표정을 짓는다.
이곳에는 젊은 형제의 감동적 석세스 스토리도 엄존하고 있었다.
최상민, 최상균 형제 기업가는 원래 도미니카가 봉제 등 경공업을 일으켜서 한창 경제 입국을 할 때
중등학생으로 사업을 하는 부모를 따라 이곳에 들어왔다.
하지만 경제 여건이 바뀌면서 수많은 고생을 감수하게 되었는데 형인 최상민 회장은
집안이 괜찮을 때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가서 먼저 세상 견문을 넓힌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변변한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 이곳인지라 수 많은 고생을 하다가
때마침 들어온 KOTRA에 무보수 인턴으로 입사를 한다.
처음 모든 허드레 잡일까지 도맡은 위치에서 한-중-서반아어에 능한 그의 재능은 마침내 통역의
역할로 그의 위치를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평소 성실한 그의 사람됨됨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이어서 하이티의 발전소가 베네주엘라의 자본으로 지어지고 여기에 주요 건설 과정에
한국의 기업들이 참여하면서 그의 역할은 통역의 차원을 넘어서 현지인들의 교육담당까지
맡게되고 이에 발맞추어 그는 기계, 전기 부문의 세밀한 엔지니어링 부분까지를 마스타 하게 된다.
발전소가 건설된 후 관리 운영을 맡게 된 쿠바 기업체의 횡포가 현지에서 배척을 받으면서
최 회장은 욕심부리지 않는 기업정신으로 처음 불가능하게 보였든 발전소 운영사업을 따내게 된다.
어려운 시절부터 여유가 없을 때에도 한시도 놓치지 않은 신앙생활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회를 헌당한 일은 그의 신앙 세계의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
도미니카 한인교회
최회장의 자당과 손자(얼굴이 숨었다^^)
하이티 지진이 일어났을때는 모두 해외로 도망을 갔으나 곧장 6인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그 다음날로 현장 복귀한 그의 용단과 성실은 이제 이곳에서는 전설이 되고 있다.
하이티 발전소를 맡은지 딱 일년만의 시련이자 기회였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발주되는 새로운 국제적 프로젝트의 수주만으로도 눈코 뜰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0억불짜리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그 한 예이다.
최상민 회장의 계씨되는 최상균 차장, 어쩌면 형제분이 똑같이 겸손하여서
내 비행기 수속을 손수하여 주는등, 감동이 많았다.
미국의 유수한 재단과 기업들과의 상담만으로도 촌음을 아껴야할 그가 이곳 문학 동호회
경명애 회장이 베푼 나의 환송 오찬에 참석하여 큰 두가지 문화 기획을 털어 놓았다.
그 중의 하나는 도미니카와 하이티에 "문학 대상"을 만들어서 문화 창달에 기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또 하나는 대학을 설립하여 이곳 원주민 청소년들에게 꿈이 있는 미래를 열어주자는
이상이었다.
이 두가지 일에 가까운 데 있는 분들의 고견을 모으고 자문을 구한다는 내용을 매우 조심스레
내비치었다.
원래 겸손하여 국내의 여러 언론으로부터 방문과 인터뷰도 받았으나 많이 물리치는
그의 성품을 주위에서 들었고 또한 직접 느끼기도 했기에 내가 여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발설하는 것도 조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중지를 모으는 일이라면 너무 가리고 막을 일도 아니리라 생각이 된다.
법학을 전공했으나 유난히 문학을 사랑하는 박동실 대사의 초청으로 대사관저에서 두시간 가량
"근-현대 문학의 생성과 발전" 문학강연.
아래에는 8박 9일의 여정에서 대표적인 장면들을 급히 모아서 일단 올려봅니다.
내일 새벽에 워싱턴 디시로 가서 일박이일의 벚꽃 100주년 행사를 구경하러
가기에 부랴부랴 몇 컷을 올려봅니다.
워싱틴 디시에 벚꽃은 봄이 일찍와서 다 지고 없다고 합니다만~~~.
사진의 순서나 의미가 뒤죽박죽이어도 이해를 구합니다.
하이티에서는 풀장이 있는 호텔에 들어가는 것이 현지 사정을 보고난 후라 너무 송구할 지경---.
약병같은 것은 하이티 원산의 맥주, 프레스티지
도미니카의 산또 도밍고 시내의 앰배서더 호텔은
이곳 백인계통의 사람들이 주로 출입하는 곳입니다.
문학회의 경회장 부부와 친구의 생일 잔치에 함께 초대받아서 한컷 합니다.
앵글로 아메리칸 소사어티라고 할 성격이었지요.
복층 펜트 하우스---.
지진으로 무너진 대통령 궁
이곳은 난민촌으로는 양호한 편입니다.
한국의 NGO "기아대책"의 한성 선교사가 대학 캠퍼스를 짓고 있습니다.
하이티의 공단에서 1300명의 생산직 직원을 거느리는 한인 봉제 공장
부인이 사장이고 부군인 탁현구 목사님
공장을 소개할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공단 이름은 SONAPI
폭동 직전까지 갔다는 또다른 난민촌 옆의 초등학교
내 친구와 닮은 인물의 선교사가 후원자입니다.
오른쪽 여성은 교장 선생님 마담 마리.
환영 노래를 불러줍니다.
비가 샌다고 난리를 친다
UN군의 일원인 한국군 단비 부대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Suites for Cello Solo No.1 in G major , BWV1007 바흐 / 무반주 첼로조곡 1번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Mstislav Rostropovich, Cello |
1. 프렐류드(Prelude) - 4/4 박자, G장조, 모데라토 그 멜로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속된 16음표들로 시작되며,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전체 조곡의 성격을 제시한다. 2. 알르망드(Allemande) - 2/4 박자, G장조, 모데라토 독일풍의 춤곡으로 보통빠르기의 속도를 가졌다. 비교적 힘차고 빠르다. 3. 쿠랑트(Courante) - 2/4 박자, G장조,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장엄하게) 프랑스의 옛 춤곡 형식이다. 힘차고 생동감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전후반이 같은 리듬 패턴을 취하고 있다. 4. 사라반드(Sarabande) - 3/4 박자, G장조, 라르고 옛 스페인의 춤곡으로 매우 느리고 장중하며 품위가 있는 곡이다. 5. 미뉴에트(Menuet) I - 3/4 박자, G장조, 미뉴에트(Menuet) II - 3/4 박자, G단조 지방에서 시작된 춤곡이나 궁중의 춤곡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우아하고 매끄럽다. 장조에서 단조를 거쳐 다시 장조로 돌아오는 3부 형식이다. 6. 지그(Gigue) - 6/8 박자, G장조, 알레그로 영국에서 시작된 춤곡 형식이다. 빠르고 경쾌한 곡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조곡
그런데 이 명곡은 바흐가 죽은 뒤 무려 200년 가량이나 묻혀 있어서 전혀 연주되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이상으로 어려운 기교를 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 6번처럼 현재의 첼로로서 연주하기는 매우 곤란한 고음역(高音域)으로 씌어진 곡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이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현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덕택이다. 카잘스는 12세 때부터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 천재였었다. 그러나 카잘스가 특히 좋아했던 악기는 첼로였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마드리드의 호세 가르시아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카잘스는 곧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정식으로 익히는 한편, 실내악에 대한 연구도 체계적으로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13세때의 일이다. 카잘스는 13세가 되면서부터 첼로주법의 결함을 깨닫고 새로운 기법을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버려져 있는 악보뭉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무한한 감동을 가지고 듣고 있는 [무반주 첼로조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카잘스의 나이 겨우 13세 때 발견된 이 악보뭉치야말로 근대 음악 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때부터 카잘스는 이 악보를 꾸준히 연구하여 12년간에 걸친 고심끝에 전6곡을 완전한 형태로 연주하는데 성공했다. 실로 200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보석의 찬란한 빛이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카잘스와 이 모음곡은 하나의 동류항이 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이 모음곡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주한 것은 1909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처음으로 녹음을 단행한 것은 나이 60이 되어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곡은 모든 첼리스트들이 도전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한계점이요 궁극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음곡을 가리켜 [첼로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