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왕궁터와 산또 도밍고 성당
꾸스코 광장에 진출한 스타벅스 커피점이 의미의 상징물인가 싶다.
우선 건물의 아래쪽 석축이 세월의 흐름과 심한 지진에도 한치 어긋남 없이
꿋꿋한 형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잉카의 혼을 담은듯하다.
이에 비하여 오른쪽 건물은 대성당의 한 부분인데
삐사로의 병사들이 기존 석축을 파괴하고 새로 벽을 쌓았으나
그후에 내습한 지진등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도 스타벅스로 대변되는 서양문화는 이런 사연에 아랑곳 하지않고 안착하였다.
석축술이 너무나 정교하고 견고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환생설을 믿은 잉카인들은 왕이 죽으면 선왕의 궁궐은 그대로 두고
왕궁을 새로 지었다.
삐사로의 병사들은 이 수많은 왕궁을 파괴하고 성당을 그 위에 건립하였다.
최근 이곳 일대가 유네스코의 인류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면서
폐 왕궁 중 그나마 잔유물이 가장 많은
이 한 곳이 집중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잉카의 수도였던 꾸스꼬는 잉카 언어인 께추아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태양신을 섬기던 잉카인들은 자신들이 태양신과 탯줄로 연결된 자손이며 꾸스꼬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잉카인들이 언제부터 쿠스코에 살기 시작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문자가 없었고 구전에 바탕을 한 식민지 시대의 기록은 부정확, 왜곡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날 쿠스코의 도시 형태를 갖춘 사람이 9대 빠차꾸떽황제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물론 그 이전부터 여기에 잉카인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빠차꾸떽이 왕자시절
잉카족을 침략한 찬까족을 막아낸 후 수로를 내고 도시의 형태를 정비하였다.
지금의 산토 도밍고 성당 자리에는
태양의 신전인 "꼬리깐차"도 대규모로 지었다.
하지만 지금 꾸스코에 온전히 남아있는 잉카식 건축물은 단 하나도 없다.
1533년 11월 15일 꾸스코에 무혈입성한 정복자 삐사로는
내전의 후유증을 앓던 잉카인들중 꾸스코계 잉카인들을 도와
당시 집권세력인 끼또계 잉카군을 섬멸하고
다음해 1534년 3월 꾸스코를 스페인령 꾸스코 자치구로 선포한다.
이때부터 꾸스코는 완전히 스페인식 도시로 바뀌게 된다.
식민지 개척 당시 정복자들은 거의 정규 왕실 군대가 아닌 사조직의 병졸
집단이었다.
결국 일확천금을 노리고 몰려온 낭인 조직에 다름아니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로 아즈텍문명을 정복한"코르테즈",
태평양을 발견하고 파나마에 식민정부를 세운 "발보아",
잉카를 정복한 "삐사로"등이 모두 그런 부류였다.
심지어 삐사로는 문맹이어서 왕실에 제출한 정복허가서에 서명도 대리인을
시켜서 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왕실에 약탈물의 1/3을 바치고, 돈을 댄 주교에게 1/3, 그리고 자신과 부하들을
위하여 나머지 1/3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재물을 나누면서 시비꺼리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황금 예술품들을 모두 녹여
금괴를 만들어 반출하였다.
만고의 예술품들이 그렇게하여 모두 파괴되었다.
물론 그들은 땅끝까지 기독교를 전파하고 잉카의 원시 종교는 박멸한다는
"미션"을 전면에 내세웠다.
종교적 미션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집행자들이 너무 무지하고 탐욕스러웠다.
종이 한장 들어갈 틈도 없이 정교한 석축술,
그 아래에서 뜨게질을 하는 잉카의 여인들,
그들의 솜씨에 서글픈 맥락이 이어진다.
석축술에는 그나름의 예술적, 혹은 주술적 의미도 내포하였다.
지금 모양은 표범이 분명하다.
저 유명한 12각 석축도 만져보았다.
나같은 사람 때문에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유리막 속에 넣어야할지 모르겠다.
무슨 설명을 더 붙이랴~~~
무너져 개축된 담벼락에는 무너진 잉카의 혼이 심금을 울린다.
부자간? 형제간?
하여간 오른쪽 사람은 세르파 복장인데 오늘은 일을 놓쳤나---
세르파는 그 고생 속에서 하루 8-9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그들이 앉은 뒤쪽 분수대의 청동 조각에는 정복자 삐사로의 야망이 들어있다.
빠차꾸떽처럼 황제를 꿈꾼 그를 스페인 왕실은 음모를 만들어 암살하고만다.
그래도 그가 만든 야망의 구조물을 부수지는 않았다.
이제 발길을 인근에 있는 산또 도밍고 성당으로 옯긴다.
물론 왕궁이 있던 곳이다.
아직도 튼튼한 석축과 왕궁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산또 도밍고 성당(lglesia de Santo Domingo)
코리칸차(Qorikancha) - 태양의 신전
잉카 제국시대에는 코리칸차라고 불리던 태양 신전이었으나,
앞서 말한대로 정복자들은 황금으로 가득했던 신전에서 모든 것을 약탈한 후
상부를 부수고 남은 토대위에 츄리게레스 양식의 성당을 세웠다.
1950년 5월 21일, 진도8.4도의 대지진으로 성당은 무참히 붕괴되고
꾸스코 시내는 초토화 되었지만, 신전의 토대인 석조만은 하나도 뒤틀리지 않아
잉카 석조의 정교함을 웅변한다.
잉카인들의 천문지식과 우주론은 지금 수준으로 보아도 매우 과학적이었다.
실재는 파괴되었지만 전해 오는 말을 토대로 하여 왕궁 속의 황금 장식을 재현해 놓았다.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 농경에 관한
잉카의 우주관, 천체관측술을 엿볼 수 있다.
물론 혹세무민의 통치술이라는 비판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남십자성이 뜨는 남반구라서 6월 24일쯤 동지가 오면
왕궁에서는 새로 태양을 모셔오는 태양제를 지내며 피지배자들을
현혹하였다.
꼬리깐차는 ‘황금의 돌’ 또는
‘황금 궁전’이란 뜻으로 잉카 최고의 신인 ‘인티(태양신)’를
모신 신전답게, 그들의 비범한 지혜와 기술을 총동원한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느 곳보다도 정교하게 축조된 신전이었다
신전 안에는 황금으로 만든
동물상들이 가득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석축을 쌓다가 잘못된 부분을 떼웠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지금은 어떤 의미를 담은
석축의 일부였다는 쪽으로 해석이 기운다.
이 성스러운 황금 제단에 뗌방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였다.
어쨌든 정교의 극치일 따름이다.
성당, 혹은 왕궁에서 내려다본 꾸스코 시가지
.
관광객을 모으는 신판 태양제 준비에 여념이 없는듯하다.
잉카 시대에 만든 수로가 지금도 사용된다
기초 토대는 잉카의 작품이고 그 위에 산또 도밍고 성당이 서있다.
관타나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