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간디 탄생 138주년-국제 비 폭력의 날

원평재 2007. 10. 3. 11:54

 

                                 

                          간디 기념관 안의 서점은 초라하였다.

 

 

오늘, 10월 3일 개천절은 '마하트마 간디'의 탄생 138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는 '국제 비폭력의 날'이며 인도에서는 당연히 공휴일이다.

 

인도는 지금 연휴 나들이가 한창이다.

"힌두스탄 타임즈"에 난 인도인들의 연휴 해외 여행 러시 기사를 며칠 전 뉴델리에서

읽으며 웃었던 사실이 좀 미안하다.

나라 전체가 거지꼴인데 무슨 연휴 해외 여행이냐고 딱하여 혀를 찬 것인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나라 12억 혹은 13억 인구 중에서 우리나라 중산층 소득에

맞먹는 인구가 4-5000만이나 된다.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세계 400대 기업에 우리나라 최고 갑부가 2-300등으로 네명인가

다섯명인가 올라가 있는데, 인도 갑부는 세계 20위 안에 네명인가 다섯명인가가 올라가

있다.

까딱하다가는 우리가 불우 이웃이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나라 사람들의 해외 여행은 아직 인접한 네팔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델리의 '간디 공항'이 인파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네팔 말은 힌두어와 비슷하다.

 

                              간디를 화장한 터에 기념관이 세워졌고 참배객들이 끊임없었다.

 

이제 '델리(Delhi)' 이야기를 잠시 해야겠다

인도의 수도라면 "뉴델리"로 배운 것이 초등학교 이래의 정통 학습이었다.

'올드 델리'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또 두 도시가 인접, 혼재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지 사람들은 뉴델리, 올드 델리를 분리해서 쓰는 데에 탐탁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저 '델리(Delhi)'라는 도시가 그들의 수도로 있을 따름이었다.

 

통칭 '올드 델리'시는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 무굴 제국의 통치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고 영국이 들어오면서 1911년에 그 옆 동네에 세운 뉴델리가

새로운 통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은 처음 인도 수도를 '캘커타-지금 이름은 꼴까따(Kokata)'에 세웠다가

이리로 옮겼다.

뉴델리라고 해서 뉴욕 비슷한 구석은 없었다.

올드 델리에서의 그 좁은 미로가 조금 덜하였고 새로 올라가는 고층 건물들이

최근에야 모습을 들어내고 있을 뿐,

교통혼잡과 매연과 들어누운 소떼들의 풍경은 두 지역이 모두 난형난제였다---.

 

'간디 공항'에 내릴 때만 해도 그 이름이 '마하트마 간디'에서 온 줄

알았더니 정확한 이름은 '인디라 간디 공항'이었다.

인디라 간디가 마하트마 간디의 며느리이긴 하지만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평가는 현지에서 여러갈래였다.

특히 남인도 지역에서는 아주 혹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앞잽이, 동료 독립 투사들을 배신하였다는 루머(혹은 진실성에 근접한,

그 진정하고 깊은 뜻은 헤아릴 길이 없는 이야기들), 

그런 복잡한 사연들 때문에 비폭력, 무저항, 평화 주의자인 이 인도의 국부께서는

지금도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인디라 간디' 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 밤중, 자정 무렵이었다.

 

서둘러 1급이라는 호텔에 들어가서 눈을 좀 붙이고 아침부터 델리 시를 구경하였다.

모양은 크고 거창하였으나 내부는 허름한 편이었다.

 

  

  

  

  

 

 전통 재래 시장에서 카피트를 다루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많았다.

우리도 델리 시내, 무슬림 지역인 찬드니 촉 지역에 있는 이슬람 사원, 자마마스지드를 찾았다.

이 회교 사원에서는 2만명이 동시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볼 수 있는 큰 규모에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 400년 역사 속에 형성된 회교 시가지이며 사원이었다.

  

 

 

 

 

 

 

 

 

 경내에 들어서면 모두 신발을 벗거나 덧신을 신어야 하였다.

 

 

 

  

  

 

 우리가 보기에는 오수, 탁수였으나 무슬림에게는 성수였고 낯을 씻고 이를 닦고

경건한 몸을 한 다음에 종교 의식에 참배하였다.

인두 대도시 안에 수백년간 이런 이슬람 사원이 존치하는 데에 인도의 다양성이

있었다.

  

 

 

                              모스크 성채의 안과 밖---.

 

 

 

 

 

 

 

 

 

 라즈가트 정문 풍경과 그 입구이다.

라즈가트는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으로 성지가 되어있어서 참배객이

끊임 없었다.

 

 

 

 

 

  

  

 

 

 

  

   

 

 

 

 경내에서는 우연히 내 친한 친구이자 D 산업 회장 부부를 만났다.

투자 환경을 보러 왔다가 잠시 관광에 나선 이들과 만난 곳은 정확히 화장실

입구에서였다.

  

  

  

 

 

 

 

 

 인도문(India Gate) 주변을 다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산화한

9만명의 인도 청년들을 기리는 기념물이었다.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임무 교대를 기다리는 경비병들---.

 

 

 시크교 사원으로 일행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인도도 이제야 풍부한 역사적 유적들을 유네스코에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받고자

발굴과 복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보는 이 우울한 장면들은 인도의 숨겨진 소수 치부를 찾아낸 것이 아니다.

이런 장면들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고 어쩌면 국가적 모습을 대변하여서 아직

인도는 신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희망과 기대의 나라라는 예측은 분명하지만---.

 

 

 

 

 델리 교외에 있는 명상의 집, 연꽃 사원을 찾았다.

어떤 종파에 국한하지 않고 인도 특유의 명상과 무소유의 철학을 닦는 곳이었다.

  

 

 

  

 

 순례가 끝이 나서 신발을 찾는 곳이다. 내 신발도 온존하였다.

 

 

 마음의 평화를 찾은 이 일가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