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담론

펜은 칼보다 강한 것인가

원평재 2012. 11. 22. 05:56

 

(논단) 펜은 칼보다 강한 것인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제는 세상사의 오랜 잠언중 하나로 연면히 자리해 오고 있다.

굳이 누가 이 말을 맨 처음 했는지(혹은 정리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뜻을 흐릴는지도

모르겠으나 기록을 찾아볼 수는 있다.

에드워드 조지 얼 리튼 벌워 리튼(Edward George Earle Lytton Bulwer Lytton ; 1803년 ~

1873년)이라는 꽤 긴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최초라는 영예가 돌아간다.

그는 크게 이름이 나지 않은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였다. 대표작 ‘폼페이 최후의 날’로

우리에게는 간접적 안면이 있다고나 할까, 하여간 혜안이 번득이는 선언문 같아서 일단

공감이 가면서도 글을 쓰는 사람의 자기변호 언사로도 들려서 너무 강한 인용에는

주저가 따른다.

 

다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애용한 명구의 리스트에도 들어간다는 사실이 이 잠언에

무게를 더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폴레옹의 독서편력은 광대무변하였으며 그가 책상과 침대 머리에

세워둔 병풍모양의 경세 명문에는 촌철살인의 내용들이 많았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가 그 백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세월은 급히 흘러서 이제는 “펜”이니 “칼”이니 하는 보통 명사 보다는 다층의 함의를 담은

추상명사를 써서 의미의 외연을 넓혀야 할 때가 되었는가 싶다.

“문은 무보다 강하다”라는 어휘의 환치도 그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난무하는 펜과 칼의 카오스 현상에 직면하고 보면 이런 추상적 환치로

결론을 맺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보다 더 명쾌한 잠언이나 무슨 쿨한 해법이 이 난장마당에 꼭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비장의 무기가 아직 나의 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바로 나폴레옹의 어록중 하나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의 그 펜은 그간 참으로 많이 변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로제타스톤 속의 문자가 돌에 음각된 펜의

또 다른 모양이었다면, 오랫동안 인류는 새의 깃털을 펜으로 활용하여 왔다.

그 잉크시대의 종언이 볼펜과 함께 오는가 싶더니 벼락 치듯 한 컴퓨터의 등장으로

진보, 진화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혁신, 혁명, 돌연변이의 드라마가 인류사에 출현하였다.

펜 대신에 자판이 등장하였고, 자판도 가벼운 터치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이제는 또 모바일 폰이 단숨에 장족의 발전을 하여서 스마트 폰이 되면서 이동식 노트북

역할, 아니 이동 사무실 역할까지 맡아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와중에 전자 펜을 보조 수단으로 쓰는 방식의 기종도 나오고 있으니

펜은 영원한가---.

 

하여간 이러한 일련의 구동방식을 펜이라는 범주에서 제외할 것인가?

물론 대답은 단연코 “노”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원래 펜이란 인간간의 의사 소통방식을 위한 보조수단이자 그 단어가 갖는 일체의 함의를

모두 내포,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 소셜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소통방식은 이전까지 펜이 하던 역할의

확장된 타입일 따름이다.

 

 

자, 이제 이러한 펜의 극적 변화 속에서 칼은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

고지식하게 형태의 변화만 따져보아도 그 형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칼을 장검이나 표창으로 만드는 식의 변화는 일종의 진화 과정에 불과했다면 칼이 총이

되고 대포가 되고 급기야 핵폭탄을 탑재한 순항 미사일이 되는 과정은 단계마다 돌연변이에

버금가는 충격적 변모였다고 할 것이다.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이런 격변보다 더 중요하고 무서운 것은 이런 파괴적 힘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권력 구조의 생성이라고 하겠다.

이 권력구조는 오늘날 몇 가지 형태로 변태가 되어 나타나지만 여기에서 일일이 제시할 수는

없고 대표적으로 “경제(권)력”이라는 것으로 포장되고 둔갑이 되어 나타난다.

 

 

우선 가까운 일본의 경우를 들어보자.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 현재는 이렇게 저렇게 위장되어 크게 눈에

뜨이지 않는 군사력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혁신무력으로 변신하는 구조의 국력을

가진 나라이다. 마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트랜스포머와 같은 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일본의 국수주의적 보수 우경의 잠재적 현상과 경향성에 대해 일부 지각 있는

일본의 언론들이 펜을 들어 경종을 울리고 있으나 그 힘은 미미하다.

하긴 그 펜을 쥔 손에 얼마만큼의 힘과 진정성이 들어있는지도 의문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태도이다.

이 문제는 한동안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 편찬을 두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한, 중국 등

아시아 주변 국가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또한 학자와 시민들이 위원회를 조직 하는 등

또 다른 과오와 비극의 재발을 우려하는 국제적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를 두고 일본의 소위 식자들은 자신들의 역사 교과서 편찬을 왜 다른 국가에서 간섭하느냐

라고 반기를 들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비롯, 새 역사교과서에 일본 근세사의 외국

침탈을 정당화하는 국민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일부 일본의 양심이랄까 펜의 힘은 여지없이 나약함을 보일 따름이다.

물론 진정성에 가득한 여러분들의 목소리와 펜을 통하여 나오는 뜻 깊은 사려분별에는

깊은 존경의 마음을 보내드리는 바이다.

 

 

중국에서의 펜의 힘도 굴기어린 정치가들의 통치 철학에 하등의 경종을 울려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오히려 대중적인 애국심에 편승하는 경향이다.

지난 베이징 올림픽 직전,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진행되는 성화 봉송 행렬 때에 보여준

일부 중국인들의 치졸한 국가주의라던가 이를 정당화하고 환호작약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인해전술은 여과 없이 거대 중국을 뒤흔들어 놓지 않았던가. 그 경로는 바로 새로운 펜,

인터넷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니 과연 펜은 그 무엇보다도 더 위대한지도 모르겠다.

최근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하여 일부 지식인들이 천안문 사태를 상기시키며 중국의 양심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가오싱젠(高行建)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프랑스 국적으로 가능했지만 이번에 받은

소설가 모옌(莫言)은 중국작가의 신분이었다.

물론 모옌은 다소 현실 순응적 작가라는 비판도 있지만 중국의 전제적 정치체제에 양심의

소리를 쏟아내는 측면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 독재체제를 “칼”로 비유한다면 이제는 이 정도의 체제 비판적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현상의 진행을 “펜”으로 인식하는 데에 너무 인색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의 신세대가 향유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 그 속에서 익명의 펜들이 유영하는

인해전술 같은 노도가 있음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청교도 정신을 건국이념으로 삼고 민주주의의 본산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이라고 해서

“칼”을 품지 않은 나라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니 영국의 식민지라는 위치에서 질곡을 겪으며 전쟁을 치르고 생성된 나라이지만 인디언과

소수 민족을 억압, 살륙하면서 세워나간 국가 형성과정은 되새기기에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 나라의 지성은 아마도 인류사 최고, 최대로 자신들의 어두운 부분과 허점을 적나라

하게 적시하고 양심의 울림을 소리 높여 외쳤고 또 지금도 외치고 있다할 것이다.

이런 양심의 외침은 반향도 요란하고 구체적으로 개선되고도 있으나 사실은 얼마만큼 이

펜들의 힘이 칼의 전횡을 제어해 나가고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일 뿐이다.

어쩌면 대중조작과 허구, 허상에 모두들 가볍게 중독이 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눈을 안으로 돌려보자.

사실 오랜 잠으로부터 늦게 눈을 뜨고 개화를 한 우리 대한민국이 근대국가로 발 돋음 하면서

겪은 질곡의 역사와 체험은 다시 되씹어보기도 진저리나고 또한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바깥에 나가보면 우리가 겪은 체험을 소중하게 평가해 주면서 자신들의 발전 역사에

모델로 여겨주는 반응도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가볍게 자부심에 빠질 처지가 아님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

아무튼 이 부분은 이 정도로 정리해 두고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주제는 명실 공히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최근의 국가적 상황을 펜과 칼의 대위법으로 한번 음미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일군 세계적인 IT 산업의 부흥은 사실 불철주야 노력한 우리의 젊은

기술 공학도들의 우수성과 이를 유효적절하게 운용한 경영인들, 그리고 국산에 대한 애착을

애국심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우리 국민 모두의 몫이다.

여기에 더하여 민감한 감성이라는 DNA까지 타고났으니 조상님들의 은덕 또한 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하여간 이러한 여러 요소가 아우러진 결과는 아슬아슬하다고 할 만큼 지금껏 잘 유지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빛나는 우리의 감성 요소는 자칫하면 쉽게 상처도 받을 속성이 있다고 하겠다.

장점이 약점이 되는 아이러니는 여기에도 있나보다.

우선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익명의 “펜”들을 예로 들어본다.

소위 댓글이니 덧글이니 하는 자신의 얼굴을 감춘 악의에 찬 악플, 혹은 천사의 얼굴을 한

정신 사나운 선플의 남용과 범람의 문제이다.

남들의 행운을 무조건 깎아내리는 것도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거기에 사용되는 유치

하고도 기가 막힌 비속어, 비문법, 비논리적인 비문非文의 난무는 우리나라의 말글살이

자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타진요” 사건으로 요약되는 광풍 같은 악플의 기간은 다시 떠올리기도 지겹다.

악플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계의 스타들이나 어린 학생들의 사라진

목숨을 생각하면 타진요 사건은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우리는 갈기갈기 찢어진 국론의 분열 속에서 다시 한 번 국가적 위기를 만났다.

한미 FTA와 광우병과 촛불 시위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

물론 이 주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국가라고 하는 기본 틀 속에서 사법부라고 하는 최고 권위를 부여받은 기관에서

충분히 수긍할 만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내린 결론을 아직도 부정하고 정의의 펜을 휘두르는

것으로 여론을 오도하는 행위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역설적 해학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고

해학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해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물론 촛불 시위의 초동단계에서는 국민 건강은 물론이려니와 미래 세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의 아픈 충정이 바탕이 된 순정한 항변이었고 여기에 대처하는 무능 신생 정부의 우왕

좌왕하는 모습이 아직도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하는 바 있지만 이윽고 허위 과대 과장의 TV

프로가 사실을 왜곡하고 국론을 극단적으로 갈가리 찢은 부분은 우리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악몽으로 치부될 것이다.

악의적으로 오도된 펜의 힘이 무능한 칼을 이긴 결과라고나 할까.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에 이 나라는 다음 5년간을 항해해 나아갈 선장을 뽑는

중차대한 시기에 당도해 있다.

벌써부터 착한 펜을 자처하는 논조가 트위터나 페이스 북을 비롯한 각종 SNS 망을 통하여

이곳저곳에서 난무하고 있다.

어떻게 세우고 또한 발전시켜온 나라인데 이런 저의가 의심스러운 펜대들이 허약하고 무능

하기 그지없는 정부의 공권력을 날선 칼이라고 비아냥대며 온갖 협잡에 나서고 있다.

지금은 펜이 칼 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따질 때는 한참 지나갔고 날이 시퍼렇게 흉기로 변한

펜과 무디어 빠져서 칼도 칼 같지 않은 도구에 내일의 명운을 맡겨야하는 불쌍한 민초들의

모습만 보인다.

 

 

글과 펜의 편에서 평생을 지내온 사람이 정 반대의 입장에서 이렇게 개탄만 하는 것이 여간

자괴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역설의 논리를 펴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잠언 속에 들어있는 인문적 가치와 존엄성에도 갈채를

보내며 살아온 입장이다.

'펜으로 싸우는 자 칼로 죽는다'는 말은 알제리의 회교원리주의 지도자 아부압둘 라만 아민이

남긴 말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회통제와 국가 통치에 따르지 않고 '펜이 칼보다 강하다'며

저항하다가는 처형될 줄 알라는 경고였다.

이런 날 선 칼에 단호하게 반대해 온 입장이다. 인간성이 말살되는 그 어떤 칼의 춤에도 철저

하게 반대하는 입장이다.

특정 종교의 이야기가 나와서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북녘 하늘아래에서는 제대로 된 성경이

없어서 애를 태우던 바, 최근 북한의 문화어(평양어)로 번역된 성경이 알게 모르게 보급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만 존재하는 유일 주체사상에 세뇌를 당하며 곤핍하게 살아가던 동포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체감되는 글의 보급, 이런 현상이야말로 펜은 칼보다 진정 강하다는 징표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부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모습도 진정한 펜의 의미이리라.

칼은 나쁘고 펜은 항상 옳다는 이분법과 도그마에서 각성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가 한다.

칼자루와 펜대를 바로잡아야할 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