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세계 문학의 현장 (미국편)

원평재 2015. 9. 30. 08:16

 

 

 

 

 


 


 

세계문학의 현장 (미국 편)

                                                                                                                                                              

 

오년 전, 맨하튼의 펜 스테이션 역이 있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 옆을 지나가는데 외벽에 거대하게

붙어있던 '보더스'라는 서점 간판이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우연히 현장을 보며 받은 이 충격은

바로 문학의 장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으로 피부를 오싹케 하는 것이었다.

보더스는 '반스 앤 노블' 다음으로 미국에서, 아니 그때까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서점 체인이

아니던가. '대마불사'라는 말도 먹혀들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 날의 모습은 바로 저술과 출판과 그 유통행위, 다시말해서 바로 문학계에 조종이 울리는

광경에 다름 아니었다. 이어 필자가 체류하던 뉴저지 주 포트리의 보더스 분점도 그 아늑했던

아래 위층 책방의 분위기가 썰렁하게 빈 공간으로 변모하는 데에 달랑 하루면 족하다는 꼴을

보여주었다.


한편 허드슨 강변 뉴저지 쪽 대형 쇼핑몰의 한 부분을 넓게 차지하여 유아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독서인들을 흡인하던 '반스 앤드 노블' 서점의 뉴저지 분점도 결국

여성용 피부미용과 헬스클럽으로 바뀌는 모습을 주민들은 불난 집 구경하듯 속수무책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불을 낸 혐의자들은 구경꾼 모두이니 장사가 되지 않는 대형 서점의 다운사이징 정책을 성토할

수도 없다. 허드슨 강변의 아늑한 그곳은 수많은 서가의 장서가 마치 나의 것인양 신간이나

고전 한권을 쓱 뽑아서 서점 안 찻집의 베이글 빵 하나에 진한 커피 한잔으로 한 나절을 보낼 수

있었던 삶의 피항지가 아니었던가.

거기 수많은 문학 서적들이 '새로운 분류방식'으로 꽂혀있는 사실을 카메라에 담아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서울의 문예지와 내 블로그에 올리던 일도 추억이 되고 말았다.

 

맨하튼의 헌책방이라면 16번가에서 9번가에 이르는 '북 로(Book Row)' 책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로 치면 예전 청계천 중고책 밀집거리라고나 할까.

그 북 로에도 이제는 스트랜드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

거리에 매대를 내놓고 책을 세워서 길게 나열하곤 그 실재의 길이를 자랑스레 발표하던 좋았던

시절은 가고 이제는 그 꼬리가 아주 짧아졌다.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백팩을 반드시 입구에 맡겨두어야만 하던 강고한 방침도 사라졌다.

 

사실 미래학자 맥루언이 문학의 장래에 대하여 그닥 나쁘지 않은 예측을 해 주던 지난 세기

중반의 비슷한 시기에도 작가 존 바쓰는 평론 에세이 「고갈의 문학」을 통하여 문학행태의

종언을 예언하는 듯한 주장을 펴서 논란과 공감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이제 문학은 고갈(exhausion)되고야 말았다고 우리시대의 현인, 혜안에 가득한 저 소설가조차

백기를 들었단 말인가. 물론 바쓰는 자신의 글 내용이 소멸의 선언이 아니라 이제껏 작가들이

관습적인 문학 재현 기법을 다 써버려서 마침내 문학 기법의 가능성이 소진되었다는 뜻이라고

적극 해명하고 나서기도 했다.

아울러 이후에 나온 「소생의 문학」으로 새로운 희망의 모색을 강조했으나 어쨌든 다양한

담론들이 그 이후 '소설의 종말' 논쟁으로 진지하게 발화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 글쓰기를

대체하는 방식에 바쓰가 너무나 진력하였달까,

그 자신의 소설 내용 속에서도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가를 심오하게 고민하는 메타 텍스트,

하이퍼 픽션의 요소를 너무나 많이 넣어서 넌더리가 난 독자들이 오히려 더 떨어져나가는

아이러니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소설의 죽음' 혹은 '종언'이라는 직설적 용어는 사실 지난세기 중후반 미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소설이 죽음에 이르게 된 상황 조건으로서 그는 '작가를 지탱해주던 예술적 신념의 상실과 더불어

독자들이 다른 이야기 매체로 전이한 현상'을 들고 있다.

그는 소설의 양식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18세기에는 이 장르가 현재의 TV나 만화와

동일한 수준으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였으나. 이후 대중 문화와 비판적

거리를 확대한 결과 미학적 엘리트주의의 소설이 성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니 자동기술이니 메타픽션 요소들이 그런 범주에 앞 다툼 하는 사이 대중들은

TV 나 영화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다. 

마침내 독자들의 이반 현상이 지속된 지난 세기의 말 경, 앨빈 커넌은 『문학의 죽음』

(The Death of Literature)을 발표한다. 그는 문학 위기의 원인을 영상문화의 발전, 정보화

시대의 도래 등 외부에서 찾지 않고 문학계 내부에서 찾고자 한다.

그는 문학이 고급독자만을 겨냥한 채 형이상학과 권위라는 낡은 가치에 집착한 것이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가족, 국가, 사회 등 모든 전통적 권위가 해체되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삶의 본질을 진실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현실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구체적 언어

보다는 상상과 난해성으로 권위를 지켜온 결과 일반 독자들을 다 놓쳤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한 단면에서는 향후 문학이 대중문학을 포용해야한다는 느낌도 갖게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 그러면 이제 '반슨 노블' 서점으로 발길을 옮겨 보기로 한다. 미국 문학의 현장을 살피기

위하여 직접 책들의 집으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다.

아,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먼저 삼성전자에서 내놓은 전자책 리더기 '누크(N00k)'가 149.99달러

라는 가격표를 달고 환영인사를 한다. 아마존에서 '킨들 뷰어'를 내놓고 있는데 따른 역공인

셈인가.

종이책과 전자책의 상징적 전투장에 들어서는 느낌이 묘하다. 과연 현장은 독서인들이 발로

선택하는 현상을 그대로 재현해준다. 가장 후발 장르인 소설은 원래 태생이 대중문학이고 설화나

야담처럼 대중의 눈높이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의 현장증거가 그대로 보인다.

즉 문학 부문 서가의 맨 앞 쪽으로는 '로맨스', '뉴 로맨스'라는 코너가 폭 넓게 자리하고 갈수록

그 영역이 확장되는 느낌이다. '뉴'라고 붙은 것은 그저 출간된 순서라고 한다. 아무튼 서가의

숲으로 계속 전진을 하면 '팬터지' 책들이 앞을 가로막다가 이어서 '사이언스 픽션' 출판물들이

나타난다. 모두 합쳐서 '장르 문학'이라고 통칭되는 호러와 미스터리와 환상과 섹스 등을 주제로

한 책들의 숲으로 들어온 셈이다. 스타 트랙이니 쉽 스타, 기타 낯 뜨거운 표지들이 선정적이다.

 

이렇게 통과의례를 거친 다음에야 드디어 픽션, 뉴픽션 등의 전통적 분류의 서가들이 나온다.

퓰리처 상, 전미 도서상, 미국 도서 비평가 상, 펜/포크너 상, 헤밍웨이 재단/펜 문학상, 맨부커 상

(영국), 타임지 선정 베스트 셀러, 아마존 닷 컴 베스트 셀러 등의 족보를 모두 표지에 요란하게

달고 있다. 이러한 라벨의 반열에 들어간 책들을 예의분석해보면 오늘날 미국 문학의 현주소를

다소나마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난 10년간의 퓰리처상을 일별해 보는 것만도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으리라. 특히 2011년에는

한국계 미국작가 이창래의 소설『생존자』가 마지막 후보작까지 오르면서(퓰리처 상 픽션 부분

에서는 1970년부터 후보작도 함께 발표) 그는 노벨 문학상에 매우 가까워졌다는 주목도 받는다.

한편 북한 주민의 삶과 김정은을 다룬 애덤 존슨은 『'고아원 원장의 아들』로 2014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지난 10여 년 간 그러니까 새천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미국 문학의 흐름은 20세기의

중반부터 불어온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을 바탕으로 삼는다.

정전의 해체와 주변부에 대한 관심, 생명주의 등이 계속 거세게 몰아친 것이다.

정전(正典) 대신 팬터지, 미스터리, 로맨스의 재조명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부의 강조에는 미국

마이너리티 작가(토착 미국인, 아프리카계, 중남미 히스패닉 계, 아시아계, 여성 등)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는데 그 범주에서 한국계 미국 작가들의 이름이 상당수 오르내리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지면 관계상 그들의 이름과 대표작만 나열해보자면, 김은국(『순교자』 작고), 노라 옥자 캘러

(『종군 위안부』), 수전 최(『외국인 학생』, 『미국여자』:퓰리처 최종심), 수키 킴

(『통역사』), 이민진(『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이창래(『이방인』, 『생존자』) 등을

들 수있다.

한글로 쓰는 재미작가 문단도 작지 않은 규모이나 가장 최근 한국 펜클럽의 2015년도 작가상을

동부의 임혜기 소설가와 서부의 이정아 수필가가 수상한 사실만 일단 명기한다.

한편 코메리칸 작가와 비슷한 입장의 수많은 마이너리티 작가들이 이 시간 미국 문단의 불을

밝히고 있는데 도미니카 출신으로 뉴저지에서 성장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언급하고 싶다. 독재자 트루히요의 압제 밑에서 3대에 걸쳐 불운을 겪는 도미니카

너드의 가족사는 해체의 시대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퓰리처 상을 2010년에 받은 후

스테디셀러로 매대를 장식한다.

 

그 외에도 반슨 노블이 선정한 '인기 소설(Top Picks in Fiction)'에는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코맥 매카시의 『로드』, 핏제랄드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바바라

킹 솔비의 『나르는 행태』, 에리카 종의 『나르는 것이 두렵다』, 데보라 하크네스의

『생명의 서』(영혼 3부작의 제3부), 엘리어노어 캐튼의 『숭배자』, 앤 패치트의 『경이의

상태』, 마크 퍼거슨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심포니』, PW 싱어와 어거스트 코울의 『유령

선단』, 제인 스마일리의 『조기경보』, 그리고 스티븐 킹과 톰 클랜시의 작품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작품의 흐름에는 『세계대전』이 좀비들의 전쟁인 과학 공상소설, 에리카 종의 작품처럼

성애적인 것, 또 하크네스의 작품에서 보이는 불가지 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제 여름은 가고 있지만 서점에서 권하는 해변의 독서물도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상당한 책들이 방금 소개한 인기소설 범주와 중복되지만 도나 타트의 『황금 방울새』,

 BJ 노박의 『하나 더』, 엘린 힐더브랜드의 『루머』,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테레즈 파울러의 『젤다 핏제랄드』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책 들이 빛을 발한다.

특히 스콧 핏제랄드의 부인 젤다 이야기는 부부가 프리섹스를 부르짖었던 사이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젤다』나 『그레이의 그림자』는 여러 부문에서 그 이름을 보인다. 순수문학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스타인벡의 『찰리와의 여행』은 오래된 책이지만 의미가 있어보인다. 빌 오라일리의

예수, 패튼 장군, 케네디 등 세권에 달하는 '살해 시리즈'도 여행지의 책 범주에 들어간다.

 

서점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별난 전환의 순간을 다 맞본다.

만화책들이 기승을 부린다고 하였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끄트머리 벽 쪽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다시 방문을 해보니 벽면에 몰려있던 만화책들이 완전히 서점 문학부의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원래 가벼운 만화책은 코믹 북 정도로 부르는데 일본 만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바람에 '망가'라는 용어가 생겨서, 달리 문학적 콘텐츠를 띈 만화 소설은 '그래픽 노블'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는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있다. 그런데 전자 방패와 무기로 무장한 캡틴이

엑스맨, 헐크 등은 물론 망가까지 동원하여 서점의 중심을 장악하고야 말았다. 그들은 작년인가

영화를 찍는다고 강남역에도 출몰하였다가 지금은 영화 상영관을 점령하였고 장난감집,

옷집에도 나타났다. 다급한 서점도 이들을 지원군으로 안방까지 불러들인 꼴이다.

'미디어는 모두 문학 텍스트'로 본 맥루언이 싱긋이 웃을 일이다.

 

사실 서점의 몰락현상은 독서인구의 이반현상에 따른 것이다. 미국 국립예술기금위원회(NEA)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1년간 최소 한 편의 소설이나 희곡, 시 등의 문학서를 읽은 미국 성인은

1982년 56.4%, 2008년의 50%에서 2012년에는 47%로 하락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대형

쇼핑몰의 양판점에도 책 코너가 있어서 식품이나 옷을 사러왔다가도 표지가 아름다운 신간을

주부들이 사들고 나가기도 한다. 서점으로서는 이래저래 낭패에 속한다.

또한 현실이 픽션 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요지경 세상의 도래와 SNS를 타고 전파되는 세상

소문의 속도에 더하여 결정적 원인으로는 온라인게임이나 유 튜브 음악, 넷플릭스 등 오락매체의

범람으로 책을 읽을 시간이 줄었다. 서점의 몰락이 인터넷 서점과 전자책 등의 확장에만 책임을

전가하기도 힘든 객관적 통계 현상이다.

한편 반슨 노블 서점 점두의 '삼성 갤럭시 탭4 누크'의 선전문에는 엘린 힐더브랜드의 소설,

『루머』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크게 나와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통구조라도 대형 서점이

장악하는 한 소형 서점이 문을 닫는 비극 속에서도 문학의 종언은 아직 속단일런가.

 

끝으로 새천년이 시작한지도 벌써 4반세기를 향하여 달리는 이즈음, 소설 문학을 중심으로

(사실 시와 드라마는 반슨 노블에서도 겨우 서가 하나를 각각 붙들고 있을 따름이다) 거시적

조망을 해 보자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하다. 열거해보자면 우선

길이가 짧아지고 장편과 단편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아울러 시와 소설의 경계도 불명료하다.

또한 내용의 다양성, 대중성을 들 수 있다.

뜬금없이 서부개척시대의 구전된 영웅이 신화적 인물로 등장한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선악의 구분이 애매한 탐정, 추리 이야기도 나오는데 결말은 독자의 상상력 몫이다.

공상과학 소설같은 범주도 광범하지만 결과는 과학적이지 않고 미궁 속이 되기 쉽다.

희극이나 소극, 패러디도 유행하지만 출구 없는 블랙 유머일 따름이다.


인간은 변화를 끊잉없이 모색하는 유기체이다. 하지만 너무나 급격한 변화에는 움찔하는

존재이다. 이런 특징을 간파했는지 반슨 노블 서점의 벽에는 위대한 고전과 그 작가가 아직은

위엄있게 붙어있다. 예컨대 『앵무새 죽이기』의 하퍼 리,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

『소음과 분노』의 포크너, 『율리시즈』의 조이스, 『바람과함께 사라지다』의 밋철,

『멋진 신세계』의 헉슬리, 『V』의 토마스 핀천 , 『캐취 22』의 조지프 헬러 등등---,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캡틴 아메리카』가 방패를 들고 벽에 붙지는 않겠지.(끝)

 

 




            

 

 

                                                

 
 
 
 
 
 George Gershwin / Rhapsody in blue
 
 
 
 
 
 
 
 
George Gershwin
Rhapsody in Blue, for piano & orchestra
(orchestrated by F. Grofe) 


 

  1.Molto moderato  Bb major

  2.Andante moderato  E major

 

3.Allerro agitato misterioso

 

 

 

 

Rhapsody in Blue
Sergei Nakariakov, Trumpet
Vladimir Ashkenazy, Cond / London Philharmonia Orchestra

 
  

 

   Rhapsody In Blue · George Gershwin
 (1898-1937)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 1898~1937)은 뉴욕 태생의 미국 작곡가.

불과 16살 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피아니스트로 작곡을 시작하였다.

 

 주로 대중적인 곡을 발표해서 인기를 얻었으며

그의 재능을 높게 산 폴 화이트먼이 재즈 기법을

응용한 피아노 협주곡을 부탁하면서

비로소 '랩소디 인 블루'가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 곡 이외에도 '파리의 미국인(An American in Paris)'과

'피아노협주곡 F 장조', 오페라 <포기와 베스> 등이 유명.

주로 희가극과 대중음악, 영화음악 작업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39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거슈인의 음악이 주목받는 이유는 20세기 전반에

가장 미국적인 성격의 작품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만의 독특한 재즈적 감각과

뉴욕과 같은 도시적 회한을 음악에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랩소디 인 블루에도 그런 미국적 대도시의 빛과 그림자가 절묘하게 교차한다.  

 

이곡은 1924년에 작곡한 명작이다.

째즈의 기법을   사용한 한 고도의 기교가 필요한 곡이며

풍부한 멜로디의  주제가 장대하고  고전적이다.

 아메리카의  통속적인 리듬을 탄  멜로디가 

  깊은 매력에 빠지게한다.

 

 여기서 Blue란?

동굴과 같은 어두움과 도회지의 우울한 표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