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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계절 (미래시학 권두언)

원평재 2015. 12. 3. 02:26

 

 

 

 

 

 

 

 

 

야누스의 계절  (미래시학 2015 겨울호 권두언)

                                                                                                                                                                                         

한해를 장렬하게 보내면서 또 한해를 장엄하게 맞는 계절이 겨울이다. 따라서 일 년에 네 번

계절 따라 책을 내는 계간지의 겨울 호에도 똑 같은 감회가 서린다.

지나간 해에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쟁기와 보습으로 글밭을 가꾸었는지를 반추하며 새해

에는 어떤 울림과 바람을 선포해야 하느냐가 계간지 겨울 호의 특징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로마 신화에 야누스라는 신이 있다. 야누스(Ianus, Janus)는 문(gates)과 대문(doors),

문간(doorways)의 뜻을 포괄하며 나아가서 처음과 끝이자 시작과 변화를 상징하는 신이다.

로마력에 근본을 한 서양의 달력에서 1월을 의미하는 어휘는 바로 이 야누스에 근원이 있고

영어의 January도 그 하나이다. 야누리우스(Ianuarius)라고 부른 로마력의 1월은 한 해가

끝나고 다른 한 해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그런 정황에서 야누스는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는 앞뒤 두 얼굴로 묘사된다.

이렇게 야누스가 양면의 얼굴을 가진 신이라고 하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의 은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통찰력과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전향적 비전을

갖춘 존재로 특히 이맘때가 되면 더욱 많이 인용된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서 광복을 쟁취한 우리나라는 2015년에 그 70주년을 맞았으며, 이제는

71년째가 되는 해를 바라보는 순간에 서있다. 하지만 그 70년 전에 분단된 조국은 고희를 넘기는

해에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편 문단에서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노벨 문학상을 대망하는 일도 분단조국이

통일되는 순간을 바라는 일만큼이나 어렵다는 좌절감 속의 한해였다.

어느 쪽이고 간에 대망과 바람은 있으나 결실이 없으니 모두 자괴로운 일일 뿐이다.


다시 야누스의 얼굴이 되어 지난 쪽을 보면 나라의 인문학에 대한 지원과 격려는 대략 말 뿐이고

현실은 답답할 뿐이다. 대중들의 활자 책 독서율도 뒷걸음을 칠 따름이다. 다만 평균수명의

신장과 더불어 나이든 분들의 글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높아지고 있음은 나라의 분위기와 국격을

위하여서 참으로 희망적 현상이 아닌가한다.


우리의 “미래시학”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야누스의 시선으로 지난 한 해를 반추하며 다가오는

새해맞이에 만전을 기하자고 다짐을 해본다.

“미래시학”은 앞뒤의 두 얼굴 중에서도 문자 그대로 미래 지향 쪽에 시선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런 가운데에도 지난해를 돌이켜볼 때 여러 어려움 속에서 나름의 자긍심을 감히 내세우고 싶다.

우선 새로 재능 있는 분들을 많이 발굴하여 손색없이 문단에 배출하였다고 자부한다.

또한 문예지 편집의 틀을 혁신하고 여러 중진 문인들과 사회적 명사들의 옥고를 싣게 된 것도

자랑하고 싶다.

또한 문학명품들을 재 발굴하여 재독할 기회를 제공한 것도 의미심장하였다고 자평하고 싶다.

 

그럼 이제 야누스의 앞 얼굴은 무엇을 내다보아야할까.

“미래시학”이라는 한글표제는 다양한 함의를 갖고 있다. 흔히 한글은 한자와 병기하지 않으면

의미의 혼돈, 혼동을 갖고 오기 쉽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자학이다.

 서양의 여러 언어들도 원래 라틴어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아서 때로 그 원전을 상고하지 않으면

의미의 혼란을 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원전의 복잡 계를 하나하나 풀고 정리함으로써 어떤 어휘나 관념이 어떻게

진화되었는가를 가름해 내고 있다.


우리 “미래시학”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분석 작업에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 미래시학은 미래詩學일진데 “시 전문지”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래時學 이 되면 우리 문학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時調 장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당위성을 갖게 된다.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의 근현대시는 시조와 시가에 연원하고 있다는 주장에도 관심을 가질

때가 오리라고 본다.

미래時學은 또한 문학의 트렌드에도 외면치 않는다. 이 말은 시류(時流)에 영합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시와 산문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지고 모호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을 통찰하자.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에는 활자 미디어가 총력을 다 하여 타

미디어와 경쟁을 해야 한다.

에세이의 영역도 끝 간 데 모르게 외연 확장되어야한다.

새로운 시각의 기행문도 탐색되어야겠다.

스마트 소설, 경 장편, 경 단편 등도 모색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한다.

문학 장르에서 가장 후발주자인 소설이 가장 먼저 무너지는 현실을 직시해 보아야한다.


미래視學이 되면 오늘날 영상매체가 인문학의 영역을 휘젓고 다니는 현상을 분석하고 이에

필적하는 접근로를 또한 모색해야할 것이다.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미래시학”은 이름부터가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않았던가.

헌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는 감회와 각오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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