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한국 명수필 릴레이

원평재 2016. 1. 4. 08:20

 

 

 

 

 

 

 


쑤우를 그리워하며

                                                               

디트로이트 시가 파산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오던 다음 날, 피츠버그에서 그리로 달려갔다.

아우가 삼십오년 남짓 의사 생활을 하며 살아온 곳이 그 근처였다.

승용차로 딱 네 시간 반.

도시의 파산 소식 때문에 달려간 것은 아니었고 해마다 한번씩 내왕하는 계획이 공교롭게도

그러하였다.

출발지 피츠버그는 우리나라의 태백 시 같달까, 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서울에서 은퇴 후

딸네 집을 피서지로 삼아 여름 한 철을 보내는 곳이라, 그 기간 중 한 번 쯤은 아우의 집을

찾았다.

잘 알려진대로 위에서 말한 두 도시는 미국의 중공업이 쇠퇴하며 운명을 같이한 도시의

전형으로 자주 언급이 된다.

그런가 하면 피츠버그는 같이 쇠퇴하였어도 금방 후기 산업화의 모델인 생명과학, 의학, 교육,

문화, 영화, 국제회의 등의 방면으로 활로를 찾아서 두 곳은 다시 생존경쟁과 흥망성쇠의

사례로 비교되기도 한다. 

아우는 디트로이트 시에 산다기 보다는 인근의 전원마을에서 생활하고 세금과 그 반대급부인

연금도 모두 그 도시 하고는 직접 연관이 없어서 얼굴을 보니 천연덕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미국의 경기 하락으로 병원 환자 수는 10 퍼센트 가량 줄었고 살고 있는 주택 값도 많이

떨어졌으나 그것은 미국 전체 경기와 관련된 지수일 뿐, 디트로이트 시의 파산 상태하고는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란?"

"시청과 관련이 있는 공무원들의 연금과 시의 재정에 투자를 한 펀드의 채권자들, 등등이 직접적

피해자가 되겠지요. 하지만 오히려 이번 파산 선고로 시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운 사이징되고

나면 오히려 도시의 재생이 쉽고 빨리 오지 않을까요?"

그 인근에 사는 아우의 정보와 진단이 또 다른 진실을 알려 주었다. 현직 시장이 구속 당했을

정도로 시정은 눈치 보기와 선심, 무능과 부패의 복마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는 전원도시의 훌륭한 연주홀에서 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DSO)의 공연을

감상하였다. 중심도시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인 노년층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최근 격렬한 파업을 겪고 새로 탄생하다시피 했다는 악단의 연주는 흥겨웠다.

최근 초빙되었다는 한국계 퍼스트 바이얼리니스트는 아쉽게도 이날 등장하지 않았다.

모르긴해도 디트로이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저 무대 위 사람들의 연봉과 연금은 이번

일로 타격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

위로 현과 관과 북은 태연히 잔물결만 이룰 따름이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멀리 도심의 가난한 동네를 곁눈질하며 아우가 사는 숲속의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우의 집은 아예 깊은 숲속에다 실개천을 끼고서 지은 집으로 이제 은퇴를 앞두고

어차피 정리를 해야한다는 계획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냥 여기서 살지?"

하지만 남매를 모두 키워 멀리 떠나보내고 두 사람의 나이든 은퇴자가 지키기에는 관리와

기회 비용, 그리고 교육세를 포함한 세금이 너무 큰 낭비와 희생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오래 보아온 저 평화로운 숲의 모습이 너무나 아쉬워."

내가 진심으로 탄식하였다. 그러자 의사와 과학자인 아우 내외의 의견은 좀 달랐다.

숲을 놓고 평화를 논하는 것은 가장과 위선이고 허구라고 하였다. 숲속만큼 생존경쟁의

모습이 적나라한 곳도 없다는 것이었다.

인류가 발견, 발명한 의약품의 90퍼센트 이상이 나무 등, 식물에서 채취한 생약, 혹은 그

성질을 화학적으로 합성한 것일 정도로 숲은 공격과 방어, 승리와 패배의 패러다임이 극화

되어있어서 그 드라마는 금방 눈에 뜨일 정도로 빠르고 확연하다는 것이다.

 

치열한 나무 사이의 경쟁은 아래로는 토양의 쟁취를 위한 뿌리의 확장으로 전개되어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이 사실은 향일성, 즉 햇볕을 차지하려는 경쟁이라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키가 자라는 나무들의 생장 능력은 대략 10미터 정도까지 도달하여서

삼투압의 한계로 더 이상 올라가기가 힘들면 이번에는 옆으로 레슬링을 하여 이웃 나무를

덮어 눌러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옆의 나무도 이에 질세라 얽히고 섥혀 두꺼운 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캐노피라고 하여서,

과학자들은 이 위에 연구실을 만들어 놓고 생활을 하며 밤낮으로 약에 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무의 밑 둥이나 몸통 그리고 가지의 수피에서 의약품을 발견, 채취하고 제조하는 것은

거의 연구가 바닥이 나서 마침내 나무의 꼭대기, 캐노피 부분에서 결전을 벌인다는 것이다.

캐노피는 워낙 두터워서 보급품을 나르는 헬리콥터가 그 위에 착륙을 할 정도라고 한다.

살아남은 나무들의 키 높이가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도 생각해보면 소름 돋을 일이 아닌가

싶다고 과학자 내외는 말을 하였다.

모든 나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여건을 총동원하여서 생존경쟁에 돌입한 결과가 비슷한

키의 모습이라면, 죽기 살기의 투쟁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한편 어떤 나무의 몸통에 기생한 기생 식물이 그 나무의 수피에서 영양과 수분을 빨아먹으면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그 나무는 독성을 개발하여 퇴치 작업에 나서는데 그렇지 못하면 패배하여

자신의 목숨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기생식물 뿐만 아니라 나무 이끼, 곰팡이 등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이 독성, 즉 톡신에 대항하여

안티 톡신을 창출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쉬지 않고 벌여야 하는데, 여기에 무슨 낭만주의적인

평화와 정일, 공존과 나눔이 깃들어있다 할 것인가.

 

여기 곁들여 사는 동물의 세계도 피터지게 싸움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영어로는 "새가 노래한다"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는 것이 솔직한 숲속의 현상, 정글의 법칙이다.

"저 피나는 노력에도 결국 승자와 패자는 있을 것 아닌가? 승패의 가름에 어떤 결정적 조건,

예측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 있던가?"

인문학을 공부한 내가 기가 막혀서 더듬거리며 물었더니 만고의 진리가 답으로 나왔다.

"맞장을 뜨는 경우, 늙은 나무가 지더군요. 젊은 나무에게."

내가 흠칠하였다. 맞다. 세대교체, 때가 차면 이제는 지상에서 사라져야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진실이기는 하였지만 너무나 처절한 이야기들만 나와서 내가 추억어린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지만 방향을 조금 바꾸어 보았다.

"혹시 어릴 적 우리가 함께 놀러 다녔던 곳, 쑤우라는 델 기억하는가?"

아우는 처음 머리를 갸웃둥했으나 마침내 그 말을 기억해 내었다.

 

"쑤우"는 낙동강변에 있는 작은 숲 동산이었다. "숲"이라는 말이 어떤 음운 변화를 거쳐서

그렇게 변한 모양 같다.

하여간 일년에 한번 꼭 강이 범람하여 큰물이 지면 논과 밭과 소와 돼지와 집들이 다 떠내려가도

쑤우의 소나무와 꿀밤 나무는 자신의 머리 꼭지를 물위로 내놓고 마치 숨을 쉬는것 처럼 보였다.

산으로 올라가서 쑤우가 보여주는 장엄한 사투를 보면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굴러도 위안이

되었다.

물이 빠지면 어른들은 쑤에 걸린 가재 도구도 건지고 하였지만 아이들은 장수하늘소를 쉽게

잡아서 포켓에 넣고 다녔다.

고향에 큰 공단이 들어서기 벌써 반세기, 쑤우가 아직도 현장에 있는지는 불명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리고 내 아우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존재하였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가 그나마 헐벗은 산들에 녹화사업이 되어서 이제는 산림욕이니 숲 힐링이니

하는 여유나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무에서는 피톤치트라던가 무슨 좋은 수향만 나오는 줄 알고 단순한 생각을 가졌더니 톡신이니

안티 톡신이니 하는 끔찍한 내용을 듣게 되다니. 하지만 인문학을 한 내 생각으로는 인간의

생체란 워낙 오묘하여서 이런 복합물을 선택과 집중을 거쳐 도움이 되는 물질만 선별하는 게

아닐까.

사람의 병이 몸에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에도 있거늘, "쑤우"가 가슴에 있는 한 적어도 마음의

황폐함은 면할 수 있지않을까.

저 디트로이트 도심에 보이는 불타버린 집들의 잔해, 반세기도 더 전에 일어난 흑인 폭동의

시커멓게 탄 가슴의 멍울에도 도시 교외의 이 쑤우들이 힐링의 자산이 되면 어떨까.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온 내 생애의 사유와 직관으로는 "늙은 나무가 지더라"는

내 아우의 결론도 단순한 생존경쟁과 패배의 기록으로 보기 보다는 일종의 순환 법칙,

선 순환의 과정으로만 보고싶다.







          VARIOUS - 아름다운 커피 향기로운 피아노 [DISC 1] 01. Bridge Over Troubled The Water (Simon & Garfunkle) 02. Evergreen (Susan Jacks) 03. Don'T Forget To Remember (Bee Gees) 04. When I Dream (Carol Kidd) 05. Scarborough Fair (Simon &Gartunkle) 06. I. O. U (Carry & Ron) 07. Imagine (John Lennon) 08. Without You (Harry Nilsson) 09. Yesterday once More (The Carpenters) 10. Sailing (Rod Stewart) 11. Hello (Lionel Richie) 12. Lady (Kenny Rogers) 13. You Light Up My Life (Debbie Boone) 14. Ben (Michael Jackson) 15. Love (John Lennon) 16. The Rose (Bette Midler) 17. When I Need You (Leo Sayer) 18. Casabianca (Marisa Sannia)

 


====================================================================================================================


또다른 계간문예지 국제 문예의 송년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