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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수필 ' 12월을 데워주는 뜨거운 사랑'

원평재 2021. 12. 10. 18:43

12월을 데워주는 뜨거운 사랑 (퇴고 본)

김 유 조

 

한해가 저문다.

12월은 겨울의 첫 번째 달이자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지를 품고 있는 달이기도 하다. 입동과 소설이 11월에 있었지만 대설과 동장군의 위용은 이달에 펼쳐진다. 산타클로스의 즐거운 딸랑 방울 소리도 이 달에 있지만 제야의 둔탁한 타종도 이달의 끝에 있다. 물론 한 해를 반추하는 무거운 종소리도 끝내 새해의 기쁨과 연결되지만 지난해에 대한 엄숙하고 엄격한 반성의 종소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와는 별도로 문화인류학자들이 밝히는 의미는 세속적이다. 원래는 유럽이 기독교화 하기 이전의 이교도들이 겨울을 겁내고 이에 대항하는 축제를 지켜오다가 마침내 기독교 문화 속에서 합일하고 승화 되었다는 것이다.

동지의 달인 12월은 그렇게 춥고 겁나고 후회가 많은 달이다. 이런 자연현상에 바탕 한 인간의 감성을 이용하여 고대국가의 지배자들은 이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예컨대 페루의 마추픽추에 오르면 범상치 않은 여러 축조물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동지 날에 해가 뜨는 방위와 정확히 맞추어놓은 돌구멍과 제단을 볼 수 있다.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서 이러다가는 어둠이 세상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생길 즈음, 통치자는 스스로 제사장으로 나서서 해를 동지의 방위각에 맞추어 구멍 속으로 붙잡아 넣어두고(?) 다시 낮의 길이가 늘어나도록 하늘에다 청원하는 시늉을 한다. 과연 낮의 길이는 동지를 반환점으로 다시 노루꼬리만큼길어지기 시작하고 왕은 하늘로부터의 신탁자임을 확인 받는다는 것이다.

어둠과 추위는 무섭다. 어느 나라나 유형지는 그런 살벌한 조건의 땅에다 두고 있음을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의 시베리아 유형지이다. 그 중에서도 또 대표적인 땅이 바이칼 호 부근의 이르크추크이다. 우리나라에 겨울이 되면 불어재치는 모진 삭풍의 발원지로 익히 들어온 그 바이칼 호 한냉 기단의 생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후퇴전술을 사용하여 60만 명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군대를 내륙 깊숙이 유인해 들어와서는, 혹한 속에 수도 모스크바까지 불태우며 역습을 하여 최후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승전국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 파리까지 진격하여 수년간 점령군으로 주둔하게 된다. 이 젊은 장교들은 그 곳에서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체감하며 조국 러시아 제국의 구체제적 현상에 극히 혐오감을 느끼고 개혁의 정신을 싹틔우게 된다. 이들은 러시아로 돌아온 후 여전한 전 근대적 농노제도와 봉건주의 부정부패를 보면서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조국의 혁신을 꿈꾸게 되었다.

이들의 순수한 고민은 알렉산더 1세의 사망에 뒤이은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날(18251214) 입헌군주제와 농노의 해방 등을 주창하면서 반란을 꾀하게 한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과 달리 일반 민중과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의사실도 사전 발각이 되어 거사는 실패하고 이에 참여한 모든 장교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만다. 이들은 12월 혁명당원이라고 하여서 러시아어로 12월을 뜻하는 쩨까브리스트(Decabrist)”라고 불린다.

혁명 실패 후 약 600 명의 장교로 이루어진 쩨까브리스트들은 황제에 의해 직접 신문을 받고 혁명 주동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지며 나머지는 노예의 신분이 되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영하 40도의 강추위에 폭풍한설이 몰아치는 길을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채 1년을 걸어서 시베리아 바이칼호변의 이르크추크로 오는 길에 죽은 자는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대서사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서정의 장면들이 또렷하게 인각된다. 바로 트루베초코이와 발콘스키라는 뛰어난 존재와 그들의 귀족 출신 부인들의 뜨거운 사랑 방정식이다. 당시 러시아의 장교들 중에서도 빼어난 사람들은 오랜 전투지 근무와 개인적 성취의지 가운데에서 나이가 꽤 들 때까지도 미혼의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장교들의 출중한 경륜과 됨됨이는 귀족 출신 처녀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 “예카쩨리나 트루베츠카야마리아 발콘스키라는 이름의 두 부인은 위에서 말한 반역자가 된 남편들과 연령의 차이에도 문제없이 열애의 경지를 죽는 날 까지 이끌고 나아간다.

이들 반역 장교의 부인들은 선택의 기회도 부여받는다. 먼저 남편을 버리고 개가를 하여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든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부인들은 시베리아로 먼저 떠난 남편을 좇아서 유형의 길에 나서는데 예카쩨리나와 마리아가 그 선봉에 선다. 고난참담의 생활상은 여기에서 이루다 그릴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은 동토에서 남편들이 당하고 있는 강제노역의 참혹함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의 씨앗을 이 시베리아의 오지, 이르크추크에 뿌렸다는 사실이다. 얼마든지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뜨겁고도 숭고한 사랑으로 이 엄혹한 추위와 질곡을 녹여낸 대서사시는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발콘스키는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바로 그 사람이며 톨스토이는 발콘스키의 먼 조카벌이 되기도 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춘원 이광수가 시베리아를 여행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춘원은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1933<유정>을 발표한다. 당시 그는 기혼자의 입장에서 젊은 제자와의 사랑으로 세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는 힘겨운 상태였다. 시대적 한계상황 속에서 그는 순전히 정으로만 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외침과 더불어 <유정>을 발표했다. 나이 차이를 극복한 최석과 남정임의 사랑 이야기는 고국을 떠나 시베리아 한냉기단에서나마 지고한 사랑 방정식이 되어,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로망으로 성숙되고야 만다.

 

12월 혁명을 미완의 장으로 마치고 만 쩨까브리스트(Decabrist)의 어원은 영어의 December와 맞물린다. Deca는 원래 라틴어로 10을 뜻하지만 12월이 되었다. 로마력은 처음 십진법에 따라 10개월이었으나 후일 12개월로 되면서 뒤로 밀린 결과이다. 이름이야 어떻게 되었건 12월은 춥고 고단한 달이다. 기상날씨도 그러하지만 각자 일 년을 되돌아보며 후회와 반성으로 가득한 마지막 달이라고 할진 데는 우리 마음의 날씨도 처량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좌절한 쩨까브리스트들을 찾아온 부인들과 죽음 앞의 최석을 찾아온 남정임의 뜨거운 사랑이 모두 동토에서 승화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12월의 엄동설한이 못 견딜 시기만은 아닐 듯 싶다. , 뜨끈뜨끈한 군불의 추억과 따끈따끈한 동지 팥죽도 이 달에는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