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어떤 게이의 날

원평재 2009. 3. 13. 11:09

 이태원 입구에 있는 해밀튼 호텔 예식장에서 친구의 딸이 시집을 가던 날,

나는 지각 도착이 되어 테이블이 꽉 찬 식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서

잠시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이! 강호 맞지? 미국 간 이강호 말이야.”

늦은 건 나만이 아니어서 동기생 몇 명이 내 주위를 에워쌌다.

알만한 친구 몇 명은 며칠 전 이미 동기회 사무실에서 만난 처지였고, 알 듯 모를 듯한

녀석들이 또 두엇 있었다.

그들은 예식장을 기웃거리는 나를 납치라도 하듯 2층에 별도로 마련된 피로연회장으로

데려가더니 우선 모니터로 예식의 진행을 구경토록 하였다.

내가 오랜 만에 만난 동기들보다는 모니터에 시선을 더 주고 있는데 누군가 또 소리를

질렀다.

 

"어이, 미국 촌사람. 뭘 그리 열심히 보나. 술이나 들게. 여긴 다 이렇게 사는 거야."

내가 조금 놀라서 돌아다보니 친구들은 결혼식 같은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맥주에 소주를 타서 찔끔찔끔 마시며 농담과 잡담을 나누는데, 이제는 그들 속으로 나도

들어와서 반평생의 자서전이나 고백성사 같은 것을 풀어내도록 고대하고 있었다.

 

30여 년 전, 미국 이민을 떠나기 조금 앞서 서울의 어떤 예식장에서 국적 불명의 우리 식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친구들의 혼인 예식에도 꽤나 드나든 나였지만 이번에 와서 보니

다시 모든 게 생소하였다.

어쨌거나 내 아이들은 아직 결혼을 할 나이나 처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모처럼 친구의

자녀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하고도 궁금하여 벽걸이 모니터에 거의 넋을 놓고

있었던 게 내 모양 같았다.

더구나 오늘 딸을 시집보내는 친구는 동기 동창생일 뿐만 아니라 오래 한동네에 살았던

죽마고우였다.

피로연회장은 술 마시는 사람들로 벌써 시끄러워졌으나 워낙 화질과 음향이 좋은 벽면의

모니터는 어쩌면 아래층 예식장 보다 더 잘 현장을 전달해주고

있는 듯 싶었다. 신랑은 씩씩하였고 신부는 아름다웠으며 주례는 엄숙하였다.

혼주 석에 앉아 있는 내 친구는 그 동안 머리칼이 많이 빠져서 중간 대머리쯤 되었으나

내 기억 속의 인물과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부인은 그 사이에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보여서 처음에는 생소한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자꾸 시선을 멈추어 보고 있자니 아주 낯이 설지는 않았다.

 

관록이 묻어나는 주례는 매우 빠르고 익숙하게 식을 진행하여서 이제는 어떤 키 크고 마른

여자 가수가 카랑카랑하게 축가를 부르는 순서까지 와 있었다.

곡명이 생각나지 않는 그 노래 위로 나는 갑자기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에

나오는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이 생각났다.

죽마고우의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나비부인의 슬픈 오페라 아리아가 떠오르다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하여간 그랬다.

곡명이 잘 생각나지 않는 축가를 부르는 가수의 음정이 너무 높아서 푸치니의 그 오페라가

문득 생각났는가, 어쨌든 속으로 민망한 감정이 정당한 사유와 핑계를 찾아서 분주하다가

“아차, 여기가 이태원이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머물렀다.

 

 삼십여 년 만에 내가 일시 귀국을 한 것은 장조카의 결혼식을 앞두고 형님이 간곡한 초청을

하여서 나도 큰마음을 먹은 결과였다.

형님이 특별히 나를 오라고 한 것은 혼사 때문만은 아니었고 문중 땅에 최근 신도시가 개발

되면서 생긴 토지 보상금 문제 때문이었다.

형제간에 그 동안 별로 우애도 없이 지내다가 땅 보상 문제가 문중간의 다툼이 되고 보니

아무래도 친동기간에 힘을 합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돈이 무섭다.

전화조차 오고가지 않았던 형제 관계에서 형님은 비행기 표까지 끊어 보내는 열성을 보이는

바람에 나는 허둥지둥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토지 보상은 형님의 주장에 내가 동의를 하는 표시로 도장을 찍으면서 이제 일가친척 모두를

주적으로 간주하는 변호사의 싸움으로 넘어갔고 나는 모처럼 귀국한 김에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재판의 다툼에서 이기더라도 돈은 나와 별로 관계없이 형님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어서

내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서울에서 동기들을 찾기란 걱정했던 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남 서초동에 이들은 동기회 사무실을 하나 열어 놓고서 바둑, 장기, 고스톱 판을 벌이며

노년의 초입에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그 공간을 지키고 관리하며 하루 종일 근무 하는 예쁜 아가씨 까지 있지 않은가.

맨해튼에서 "코인 샵"이라고, 자동 세탁소를 친절 위주로 오래 운영하다보니 이제는 한인들과

히스패닉들을 단골로 잡았고, 늦게 얻은 자식들도 공부를 그럭저럭 빠지지 않게 잘하여서 동부

명문 대학에 보내놓은 나는 이제 세상에 별로 부러울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냉장고에 그득한 소주와 맥주를 무시로 꺼내 마시고

고스톱과 내기 바둑을 즐기는 동기들의 모습을 잠시나마 보니 어쩌면 내가 세상을 크게 잘못

살아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물론 어깨를 팍팍 부딪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걷는 종로 거리의 투쟁적 삶의

모습이라든지, 스피커로는 내내 노약자들에게 버스가 완전히 정거한 다음에 천천히 내리라고

권유하면서도 우당탕 저돌적으로 달리고 멈추는 버스의 관행, 모처럼 반갑다고 해놓고는

강제로 술을 먹이는 우정, 이런 여러 가지 사소한 불편함이 내 의식을 금방 서울에서 맨해튼으로

몰아내곤 말았지만---.

그래, 어느 쪽이든 세상에 완전한 삶이 있으랴.

 

귀국하여 꼭 하나 할 일은 내 친구 김정식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동기회 사무실에 나가보니 그의 집에 혼사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바쁘기 그지없을 그의 사정을 생각하여 결혼식장에서 그를 보기로 작정하였다.

내 짧은 체류 일정에도 그러는 것이 매우 합당하다는 나름의 계산이 있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내 계산이 미국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며 터득한 지혜의 소산이라서 그가 막상 나와

대면하고 나서는 섭섭해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하여간 이번 기회에는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는 내 정황이기도 하였다.

 

김정식!

참으로 얼마만인가. 이 친구는 그저 중등학교 동창으로만 관계를 맺은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지방 중소도시의 명문 중등학교를 다닌 나와 이 친구는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사는 집이 또 가난한 동네 안에서도 서로 가까워 우리는 부모 형제자매들을 마치 한 집안

식구들인 양 공유하며 자랐다.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우리의 걷는 길은 많이 달라졌다.

그는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마치더니 수학

교사를 조금 하다가 컴퓨터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무슨 큰 회사의 연구 개발부로 갔다고

하였다.

나는 해양대학에 들어가서 졸업과 동시에 원양 어선을 탔다. 모두 돈 없는 집안 아이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배를 타고 돌아다닌 나는 바람이 들어 적당한 때에 배에서 내려 본사 근무를 좀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한 것이다.

 

 

 "아니, 강호야! 살아있었구나. 이게 얼마만이야?"

친구들의 성화에 술잔을 기우리고 있는데 그 사이 식은 끝이 나고  혼주인 죽마고우 김정식이

내 등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혼주의 체면이고 뭐고 그는 막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옆에 함께한 부인이 조금 어색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얼싸안았다. 동기회 사무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연락도 힘들었을 것이다.

"언제 왔다 언제 가노?"

"나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

나는 짧게 대답하였다.

"나하고 따로 시간도 못 내겠네. 왜 그렇게 했어?"

"여기도 못 올 번했어. 이제 자주 나올게. 그런데 제수씨는 늙지도 않고 마냥 예쁘기 만 하군요."

내가 옆에 서있는 친구의 부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덕담을 던졌다.

친구 부인은 아직도 아름다웠으나 얼굴에 주름이 많이 가고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옆에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모르는구나. 마누라는 지난봄에 죽었어. 이 분은 내 형수님이셔."

"동서 대신에 내가 따라다녀요. 조금만 더 견뎠어도 좋은 날 보고 갔을 텐데---. 오랜만이네요.

내가 시집와서 새댁일 때 이 시동생한테 자주 놀러왔었지요?

그땐 시부모님 모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살던 때였으니까요."

 

그랬구나---.

우리 모두가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애도 많이 먹인 그 새댁이 이렇게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다 싶어서 나이가 좀 많아보여도 친구의 부인이겠거니 인사를 건넸는데,

사연이 그러하였다.

"아이구, 큰 실례를 했습니다. 이제 뵈니 정말 형수님이시군요. 낯이 익어서 무조건 지레짐작

하고 제수씨인줄로---. 어쨌든 그런 변이 있었네요. 이 친구야, 그럴 때 왜 연락하지 않았어.

우리가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살았네---."

"무슨 좋은 일이라고---. 하여간 이제 자주 연락하자."

나는 문득 친구의 형수님 손을 보았다. 그곳에는 꽤 큰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어있어서

내 마음을 안도케 했다.

예전에 그 손에는 누런 구리반지가 끼어있었다.

내 친구의 형은 화물차를 몬다고 집에는 며칠에 한번 씩 들리고 형수님이 집안 살림을

맡아하였는데 우리 친구들은 그분을 꽤 애먹인 악동들이었다.

그 구리반지 낀 비단결 같은 손이 우리에게 먹을 것이라도 주느라고 스치고 지나가면 내

가슴은 얼마나 오래 뛰었던가.

그런 분을 오인하여 알아보지도 못하였다니---.

세월이 무정하다고 나는 비겁한 자기변명에 매달렸다.

 

 

신랑 신부와 양가의 혼주들이 떠나간 자리에 자그마한 중년 여인이 서있었다.

"오빠!"

그녀가 나를 불렀다.

"순옥이구나!"

방금 그 친구의 여동생, 순옥이었다. 그의 여러 형제자매 중에서도 순옥이가 우리 또래와는

제일 친했다.

우리는 한 수돗가의 물을 먹고 자랐다.

그 때는 동네에 수도가 하나만 있었다.

"와아, 순옥이구나. 우리도 여기 있다. 미국 촌사람만 너무 찾지 마라."

주위에 있던 내 친구 두엇이 그녀의 손을 잡고 탄성을 올렸다.

"내가 제일 친했지, 누이야!"

육사를 갔다가 일찍 제대하여 무슨 사업인가를 한다는 박 중령이 특히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야, 나하고 더 친했어."

은행에 있다가 명퇴로 잘렸다는 친구가 또 나섰다.

'오빠들이 모두 다 잘 해 주었지요, 뭐."

그녀가 시선은 내게 고정 한 채, 조용히 소란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친했다면서 왜 결혼은 다른 사람하고 했어? 나는 배를 타는 바람에 바깥으로 돌았지만."

내 목소리가 그들의 말문을 힘주어 막았다.

그들이 대꾸에 궁색하자 그녀가 조용히 또 설명을 했다.

"제가 오빠들하고 나이가 대략 네 살 차이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오빠들은 항상 저에게 학교

등급이 하나 이상 높은 어른들로만 보였지요.

그리고 제가 교대 나와 초등학교 교사 할 때에는 모두 군대에 가 계셨거나 사회 초년병으로

고생이 많아서 결혼은 꿈도 못 꾸실 때였고요. 호호호."

"아니 무슨 선생님을 그렇게 일찍 했을까?"

박 중령이 꼬치꼬치 관심을 보였다.

"그때는 교대가 2년제였잖아요."

"아참, 그랬지. 내가 다 기억을 했는데---. 그래 신랑은 뭘 하시고?"

"신랑이라니요. 구랑이지요. 오빠들 나이 또래인데. 저처럼 교대 나와서 선생하다가 지금은

교감을 하는데 퇴직 날도 받아놓았어요."

그녀가 크지 않은 눈을 더욱 작게 하여 미소 지으며 지난 일을 이야기하였다.

"어머님은?"

"친정어머니요?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죠.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다 조금 일찍 돌아가셨어요.

큰 오빠도 돌아가셨고. 큰 오빠는 교통 사고였어요."

"저런! 좋은 분이었는데---. 그리고 머리도 좋으셨고---. 사실 말이지 순옥이 머리는 또 얼마나

좋았어. 아깝다 아까워. 한국의 마담 큐리가 될 줄 알았는데."

"왜요, 학교 선생님이 어때서? 난 하도 어렵게 커서 학교 선생님 하면서 겨우 행복을 찾았어요."

"아이들은? 이제 대학을 다 졸업한 나이이겠지?"

계속 박 중령이었다.

"어이, 무슨 호구조사 나왔어? 술이나 먹자."

누가 소리를 지르고 술잔이 돌고 낮 행사가 저녁으로 연결 되려는 즈음, 사람들은 겨우

일어났다.

누가 미국 촌사람 데리고 이차가자고 하는 것을 내가 슬쩍 빠져나왔다.

초가을 오후 날씨가 아직은 후텁지근하였다.

나는 지하철 쪽으로 내려가는 동기들을 가까스로 피하여 오랜만에 이태원 길을 걸어보기로

하였다.

 

"이 친구야, 혼자 가면 어떻게 해."

아까 자꾸 들어서 벌써 낯익게 된 박 중령의 목소리가 등줄기에 따라와 박혔다.

"가긴 어딜 가. 모처럼 귀국해서 구경도 할 겸, 술자리도 피할 겸, 혼자 걷는 것이지."

"<여보 클럽> 가려는 거 아냐?"

"예끼! 그런데 그게 아직도 있나?"

"있을 거야. 나도 아주 오랜만에 이쪽으로 와보나 그래."

"자네 어디 사는데?"

"인천에 살지. 혼자 살아."

"부인과 아이들은?"

"처자는 모두 따렌, 중국 대련에 가서 살지. 조기 유학 때문에 보냈으니 기러기 가족인 셈인데

사실은 이혼이나 다름없어."

"거리나 시간도 모두 가까운데 자주 가고 오고 할 것 아닌가?"

"정이 붙어야 그러지."

이태원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붐볐고 노랑머리, 까만 얼굴들도 지천이어서 맨해튼

거리가 아닌 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GI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데도 예나 다름없네?"

"서울이 국제화 된 덕택이겠지. 저거 봐, 백인 여자와 한국 남자가 팔짱을 꼈잖아."

"그렀네, 맨해튼 같아."

"우리도 팔짱을 낄까?"

"에이, 냄새난다. 돌았나?"

두 사람은 별로 말을 잇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을 걸어갔다. 마침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이 뜨막해진 데 까지 그들은 나왔다.

 

"오빠~."

허스키한 목소리가 갑자기 한산한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왔다.

"이크, 이게 뭐야. 오늘 오빠 소리 많이 듣네."

내가 소리를 치며 기겁을 해서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짙은 화장을 한 중년 여인이 서있었다.

"오, 커널 박!"

그 여인이 내 친구, 퇴역한 박 중령을 길거리에서 껴안았다. 

"아니, 가만있자, 이 오빠는 또 얼마 만이오? 미국서 쫓겨 왔소?"

내 친구와 껴안으며 나를 보던 여자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였다.

"어, 너 이거 어떤 개인 날 아냐?"

 

그, 혹은 그녀는 이태원의 게이 바에서 일하며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에

나오는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을 팔자로 잘 부르던 여장 남자, 바로 게이였다.

내가 해운회사의 외항선 항해사를 그만두고 본사에서 일을 할 때 중등학교 동기인 퇴역

박 중령을 만났고 그가 가끔 이태원으로 가까운 친구들을 데리고 왔는데 자주 가던 곳이

일차로는 "몬이져"라는 전통 민속 주점, 이차로 자리를 옮기면 <크레이지 USA>라는

칵테일 바, 그리고 마침내 삼차 종착지점이 게이 바인 <여보 클럽>이었다.

박 중령이 게이가 아닌 것은 당시에 어울리던 나와 우리 친구들이 모두 아닌 것과 마찬가지

였다.

우리는 한때 잘나가던 여배우가 직접 차렸다는 <몬이져>에서 저녁 대신에 푸짐한 안주와

민속주로 배를 채우고 칵테일 바에서 양주 몇 잔으로 기분을 업 시킨 다음, 게이 바,

<여보 클럽>에서 미국산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였었다.

특별히 그 곳에는 소프라노 가수 같은 게이가 있어서 새 손님이 바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간이 스테이지에 올라가서 "어떤 개인 날"을 꼭 불렀다.

그래서 별명이 이름이 되어 “어떤 개인 날”이었다. 여장 남자가 이렇게 소프라노로 노래를

부르다니---, 손님들은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혹은 그녀는 그 게이 바의 보물단지이자 안타까운 희귀종일 뿐,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남성 여창의 가수 카스트라토가 한창 드날리던 18세기 서구 사회도 아니고

또 그런 시대에도 영화 파리넬리에서 보듯이 그 주인공은 결국 비극적이었는데, 이태원 한

모퉁이의 이상한 2층 홀에서 여장을 한 남근의 사내 녀석이 아무리 "어떤 개인 날"을

소프라노로 잘 불러보아야 그저 환자의 신음소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말은 바른 말이지 우리의 게이 아가씨, "어떤 개인 날"은 사실 대단한 존재였다.

파리넬리를 위시하여 이름난 카스트라토들이 그렇게 높은 고음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거세를 한 이후에나 가능했던 것인데 당시 우리의 "어떤 개인 날"은 돈도 없었고 국법도

엄하여서 그런 일은 꿈속에서나 그리는 일이었다.

동남아 방콕에서 그런 젊은이들만 모아서 알카자 쇼이던가, 하여간 신통한 선전으로 춤과

노래를 관광객에게 보여주며 돈을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모두 그 시절 한 참 이후의

일이었다.  

 

하여간 평생 박 중령으로 불리는 우리의 친구는 그 게이 코스를 개발하여 한동안 우리의

총아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재미를 보았다.

재미를 보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동기회 행사만 있으면 뒤풀이를 그가

게이바 코스로 주도하여서 동기회에서 말빨을 세웠다는 말이다.

그 게이 바는 인근의 GI들이 드나들면서 무슨 특별한 연줄이 생겼던지 당시만 해도 귀한

미국산 양주와 맥주를 내왔는데 생각과 달리 시중보다도 술값이 저렴하였고 또 많이

마시기를 종용하지도 않았다.

게이들은 사회적인 약자였고 모르긴 해도 그런 술집들이 갖는 약점도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런 곳에 가끔이나마 출입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돈푼께나 가진 호색한들도

있었겠지만, 일단 단골로 출입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적 한계인들이 많았을 것이고 경제적

여건도 그리 좋지 않았을 터이니 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영업상으로도 자멸

행위였을 것이다.

또한 우리같이 약은 손님들에게도 고객 관리 차원에서 박리다매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게이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만 해도 더욱 권리 행사에

소극적인 집단이어서 결국 그곳은 주머니가 가벼운 술꾼들이 다니기에 만만한 술집일

수밖에 없었다.

희귀종이지만 희귀성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제대로 사람대접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런 밀교 집단을 은근슬쩍 구경시키고 가볍게 즐기는 상황을 개발한 우리의

박 중령은 대단한 전략가인 셈이었고 그로 인하여 동기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한동안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차례 그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치사한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술을 팔아주면서도 마치 약자를 등치는 것 비슷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 중령을 뺀 우리 친구들의 게이 바 순례역정은 대략 그 정도의 선이었다.

다만 박 중령의 행태는 조금 아리송하였다. 당시에도 그의 결혼 생활은 원만치 못하였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부인이 너무 사치하였고 도박에도 빠져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 가정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그는 이곳에 와서 성적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타고난

환자들로 부터 풀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육체적인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고 정신적 카타르시스 차원에서라도---.

가끔 내가 그를 걱정하며 혼자 생각해 본 명제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병이 나면 환자가 되는 것이고 그럴 때 설사 돌림병이라고 할지라도

타인이 그를 무시할 수만은 없을 진 데, 게이 바에 모여 있는 이들은 돌림병자도 아닌

단순 환자에 불과한데 누가 멸시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들도 모두 성적 정체성 혼란이라는 아픈 곳만 빼면 모두 보통의 인간에 다름 아니었다.

자, 그런데 지상의 모든 종교나 관습은 이들을 단순 환자가 아니라 능멸 받아 마땅한

폐인쯤으로 여기고, 혹시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은 선한 사마리아인들 까지도 이번에는

그들을 턱없이 동정하거나 측은하게 여기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박 중령도 그런 선한 집단의 한사람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자위하는 것 같았다.

 

그를 뺀 나머지 동기들이야 결단코 그렇게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다 천만다행하게도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주는 마누라를 얻은 덕택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점점 더 그 분위기에 탐닉할 때에 우리는 슬슬 발을 뺐다.

그러다가 나의 미국 이민이 확정되면서 큰 이별 잔치를 그곳에서 벌인 것이 우리 모두가

그곳과 작별을 고하는 계기가 된 모양 같았다.

그때는 마침 어떤 GI가 ITAEWON YOBO CLUB이라는 게이소설을 써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는 몰라도 꽤 책이 팔린 뒤였고, 그로인해  “여보 클럽”에 외국인들의 출입이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예전 같은 대접을 받기 힘들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세상에!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오빠 두 사람이 정말 함께 웬일이죠?"

어떤 개인 날이 이번에는 나까지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 아름다운 소프라노가 다 어디로 갔나?"

내가 팔을 뿌리치며 쉰 목소리에 대하여 힐문하였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렇게 되었어요. 엉엉엉."

그, 혹은 그녀가 우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젖가슴이 얕은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왜 그래요, 좀 안아봅시다, 오빠."

"말아라, 한길에서. 저기 건너편에는 파출소도 보이네."

내가 끔찍하다는 시늉으로 말을 받았다.

"그만해라. 미국 친구가 에이즈 걸릴까봐 저러나보다."

내 친구가 낄낄거리며 끼어들었다.

"농담이라도 그러지 말아요. 그것과 우리는 무관하다는 걸 잘 아시면서. 자 어서 우리끼리

한잔 하러 들어가요. 아가씨들은 아직 안 나왔으니까 우리 셋이서 오랜만에 오붓하게

한잔해요."

"아직도 전에 있던 곳에 있어?"

내 친구의 말이었다.

"아니요. 내가 큰 마음먹고 새로 개업한지가 꽤 되었는데도 국내에 계신 오빠도 안 오시고---.

하여간 썰렁하지만 여기 좀 보세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어떤 게이의 날>이라는 간판이 그리 크지 않게 달린 술집이

보였다.

"이 거 이래도 괜찮은 거야?"

내가 놀라며 물어보았다. 맨해튼이라도 이런 식의 간판은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구청에는 <어떤 개인 날>로 영업허가를 받았지요. 저 위쪽 간판에는 그렇게 크게 붙어

있잖아요.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모두 <게이 날>이라고 불러요.

요기 작은 간판대로, 아니 그것도 줄여서---, 호호호.”

마지막 웃음소리에서 예전의 어떤 개인 날의 청아한 소프라노가 묻어나왔다.

이른 낙엽 몇 장이 그녀의 얼굴에서 어깨로 그리고 마침내 청바지 입은 빈약한 엉덩이 위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다시피 하고 <어떤 게이의 날>로 들어섰다.

 

전에도 그랬지만 "게이 바"라고 인테리어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었다.

특별히 냄새가 날 리도 없었다. 게이 바의 진면목은 역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었다.

게이들이 나와야 게이 바는 형성되었던 것이다.

"노래부터 불러봐."

박 중령이 예전처럼 호통 치는 소리를 냈다. 삼십년의 세월을 확 밀치고 우리는 힘이 솟았다.

"오빠들! 나 요즈음은 노래 못 불러요. 담배를 너무 먹었더니 때때로 목에서

피가 나오데---."

"병원에는 가봤어? 당장 가봐, 안 그러면 내가 때려 줄 거야!"

박 중령이 놀란 표정으로 처음 커다랗게 물었는데 끝내는 애통한 어조가 되었다.

"진료소에 정기 검진 갈 때 그런 증세를 물어보았더니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대요. 겁도

나고 시간도 없고 아직---. 오빠 화내지 마, 나 마음이 여리잖아. 내일 당장 갈께. 나무라지

마라, 응?"

그가, 아니 그녀가, 아니 '어떤 개인 날'이 겁먹은 얼굴로 내 친구에게 매달렸다.

우리는 오랜만에 조니 워커를 한 병 땄다.

술이 반병 밑으로 내려가자 박 중령이 어떤 개인 날의 무릎 사이로 손버릇을 벌였다.

"너 아직 수술 못했지?"

"왜요. 벌써 했지요. 우리나라가 성형 수술 세계 일등이잖아요."

"아이구, 끔찍하다. 그냥 두지 그랬냐---."

박 중령이 쇼크를 먹은 얼굴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오빠, 왜 그래요? 한번 자요, 우리. 전에는 수술하기 전인데도 잤잖아요."

"어라, 이년이! 내가 언제 잤어. 난 그런 놈 아니야. 어떤 놈하고 자고서는 나하고 잤다는

거야!"

그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욕설들이 튀어나왔다.

"오빠, 소리 지르지 마. 나 겁이 많잖아요. 그럼 나 울어버릴래."

어떤 개인 날이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오빠, 그래 오빠하고 잔 게 아니었어. 이제 수술했으니 한번 잡시다. 성님도 중국에 가시고

계신다면서요?"

"내 마누라가 왜 니 성님이냐! 이게 정말 못할 말이 없네. 더욱이 이 친구 앞에서. 이래서

내가 이쪽에 오던 발길을 끊은 지 오래 되었다니까---."

그가 나를 슬쩍 쳐다보며 난감한 듯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야, 강호야.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너는 짐작이라도 가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나를 빤히 보며 의문문을 던졌다.

“마누라 건사 잘 못해서 생긴 병이겠지 뭐---.”

나도 술 취한 기분을 내세워서 별일 아니라는 듯 위악적인 답을 하였다.

“임마, 넌 짐작도 못하는구나. 다 너 때문이야. 그리고 또 아까 그 형수님 때문이고 가장 큰

원인은 순옥이 그 가시나 때문이야!”

“왜 갑자기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

“사람이 이렇다니까. 자기가 겪은 고통이 아니면 제 눈 속에 박힌 들보도 보이지 않는구나.

너는 예전에 독수공방하며 불쌍하게 보이기만 하던 형수님을 내가 좋아라 따라붙을 때면

꼭 훼방을 놓아서 그분의 시선을 빼앗아갔고, 또 내가 순옥이를 사랑하리라 작정했을

때에는 걔의 관심을 네가 독차지해버렸어.

조금 아까도 그 순옥이의 태도 봤지. 온통 너만 감싸고 돌잖았어.”

 

“미쳤구나. 내가 오랜만에 나타나서 순옥이 관심이 더했겠지. 그리고 그렇게 순옥이를

좋아했으면 내가 외항선 탔을 때나 미안하지만 내가 결혼한 다음이나 또 미국으로 간

후에라도 왜 청혼을 하지 않았어, 이 멍청아!”

“야 임마, 그 가시나가 나를 좋아해야 말이지. 내가 접근하면 내 입에서 좋다는 말도 못

꺼내게 했어. 네가 결혼하자 그 가시나도 교대 선배하고 금방 결혼해버린 게 다 네

탓이었어. 임마!”

“네가 과민하구나. 이 친구야. 그래서 아까도 나를 놓치지 않고 좇아왔구나.”

“그래 그랬다, 이제야 좀 눈치가 생겼구나. 그때는 그렇게도 모르고 둔감하더니. 하여간

나는 늦게나마 집안에서 중매를 서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이

마누라도 종내에는 내가 순옥이를 좋아하다가 놓쳤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혼전 순결이 의심스러운 내 마누라 대신에 항상 순옥이라는

친구 여동생에 대한 환상을 좇고 있으니 결혼생활이 원만하게 될 리가 없지.

결국 마누라하고는 잠자리도 시원치 않았고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이 모자라는 인간들이나

학대하며 기고만장했다네. 내 팔자가 그래, 임마!”

그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긴 대사를 나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읊었다.

오랜만의 귀국행차가 집안의 유산문제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얽혔던 내 주변의 모든 숙명적

일들을 풀고 나서야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스핑크스의 통과의례에 바야흐로 걸려든 것

같았다.

 

“아하, 오빠가 그랬었구나. 나도 무언가는 몰라도 그럴 줄 알았어요. 무슨 낌새가 달랐어.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한번만 자요. 수술하기 전에 참 잘 해주셨잖아요. 그런데 수술이

기가 막히데요. 창자를 좀 떼다가 붙였다네요."

"에라, 이 년이! 넌 수술하지 말았어야해.”

박 중령의 입에서 또 험한 말이 나왔다.

“그건 그래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그렇게 수술을 하고 싶었고 그래야 여자로,

아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수술을 막상 하고나니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어요. 여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남자는 더더구나 아니고---.

수술 전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만족을 얻었는데 막상 수술을 하고 난후에는 남자를 내

속에 받아 넣어도 아프고 떨리고 아무런 감동이 없어요.

그런대도 내 속으로 들어와 본 남자들은 기가 막히데요.

나는 아무런 만족이 없는데 말이죠. 끝이 나면 꼭 감기에 걸린듯해서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을 먹어요.

참, 여성 호르몬제도 많이 써요. 그래야 종아리에 털도 나지 않게 되고, 젖가슴이나

젖꼭지도 부풀어야 하니까요.

수술 전에는 대충 면도로 밀고 약도 먹지 않았는데---. 오빠, 여기 좀 만져 봐요.”

“너 자꾸 나를 끌어들이지 마러. 우리가 언제 무얼했다구?”

“그래요, 우리가 무얼 했는지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오빠와 나는 발가벗고 서로 껴안고만

있어도 내 마음은 따뜻해졌어요.

오빠 같은 남성만 평생 만나면 수술은 안 해도 되리라 싶었지요.

그런데 막상 수술을 하고나서 그렇게도 애타게 그리워한 여자가 되자마자 나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간 오빠가 오시지 않은 탓도 클거예요.”

“너 정말 맞아야겠구나. 내 친구 앞에서 다 까발렸으니 이제 끝까지 가보자. 너 내가 마누라

개 패 듯 하는 것 잘 알지.

마누라는 그걸 못 참았지만 넌 참고 견디고 즐겼어. 오늘 밤에 또 한판 벌이자. 저기 가서

가게 문 잠궈. 오늘은 내가 여기 전세 낸다. 알았어?”

그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더니 바지에서 혁대를 풀어서 휙 소리가 나도록 한번 허공을

가로질렀다.

 

“오빠, 나 그걸로 때리려고 하지 마. 전에는 내가 참았지만 수술하고는 그런 거 참지

못하겠어. 다른 놈들도 별짓 다했는데 이제 그런 건 못 봐 주겠어.”

그녀가 바람을 가르고 날라 오는 혁대를 피하자 박 중령이 따라가다가 발목까지 흘러

내려온 바지가랭이에 걸려서 구석에 있는 긴 소파 위로 구겨지듯 쳐박혔다.

그는 에라 잘되었다라는 듯이 그냥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어떤 개인 날은 그가 실린 소파 쪽에 간이 간막이를 둘러치고는 천천히 작은 스테이지로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의 아리아, "어떤 개인 날"이 이탈리아 원어로 낡은 스피커를

통하여 흘러 나왔다.

여성이 되고 싶어서 매일 여성 호르몬을 경구투입하고 있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러나

한창 때에 빛나게 부르던 카스트라토 창법은 이제 사라지고 남자의 쉰 목소리가 되어서

나왔다.

그녀는 내가 예나지금이나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탈리아 원어로 노래를 끝낸 다음 항상

그랬듯이 우리말로 풀어서 가사를 또 느릿느릿 읊어나갔다.

 

“어느 맑게 개인 날. 저 푸른 바다위에 떠오르는 한줄기의 연기 바라보게

될 거야.

흰빛갈의 배가 항구에 닿고서, 예포를 울릴 때, 보라--그이가 와요.

그러나 나는 거기 안가, 난 작은 동산에 올라가서 그 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보리라---

만날 때까지.

복잡한 시가지를 한 참 떠나 한 남자 오는 것을 멀찌감치 바라보리.

누군지 아는가?

산 언덕위에 오면 무어라 말할까? 멀리서 버터플라이라고 부르겠지.

난 대답하지 않고서 숨어버리겠네.

그렇게 안하면 지나친 기쁨에 난 죽을 거야.

한참 동안을 그는 내 이름 부르면서 내 어린 아내며, 오렌지 꽃이라고.

늘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리라---.”

 

게이샤의 비통함과 절망감을 자신의 것으로 녹여 부르던 그녀도 마침내 콜록거리며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내 친구가 쓰러진 소파에 포개어 지듯이 엎어졌다.

그리고 이내 빙글거리며 도는 조명등을 받아 눈부신 두 팔과 긴 손가락으로 내 친구를

한 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려면 이제 이태원을 떠나야만 하였다.

“어떤 게이의 날”의 문을 밀고 나오다 보니, 길 바로 건너편에서 “칵테일 바; 스핑크스”라는

전광 패널 간판이 휘황했다.

그리고 패널 아래에서는 네온사인으로 환생한 그 불가사의한 영물이 나를 향하여 이제 가도

좋다는 듯이 앞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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