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의 사계

눈마을 통신 1 (떠나간 친구 생각)

원평재 2011. 1. 25. 09:54

 

눈이 많이 오는 동네에 살며 가끔 편지를 띄웁니다.

여기 사진들은 제가 사는 동네의 설경입니다.

 

 

새해가 시작되고 며칠 되지 않아서 뉴욕에 사는 중학교 동기가  피츠버그의 내게 

전화를 했다.

연락이 별로 없던 친구의 전화라서 섬찟 예감과 짐작이 갔다.

"나 상수다. 아무개가 갔다."

그렇게 되었구나---.

 

그 아무개도 중학교 동기인데 여러달 투병 중이었다.

그게 오래 끌 병명이 아니어서 모두들 걱정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부음이 올줄은

몰랐다.

지난 연말에 문병 겸 전화를 했더니 "모처럼 환자가 잠이 들었는데 깨울까요?"

묻는 부인에게 황급히 그만두라고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새해가 되면 다시 전화하여 인사 겸 목소리를 듣고자 했었는데 차일피일 며칠이

영결이 되고 말았다.

"이제 뭐 누구나 가야할 길을 조금 먼저 갔지만 참 안타까울 따름이네.

내일 뷰잉 의식이 있는데 피츠버그는 멀어서 못오겠제? 여기 가까운데 사는

종관이하고나 가볼란다."

종관이도 뉴욕에 사는 동기이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도 월요일에 있었던 교회 장례식에는 가지 못하고 주말의 뷰잉 의식에만

갔다왔는데 너무나 눈물이 많이나와서 참지 못하고 구석에서 한참 울었단다.

미망인도 그를 보고 많이 울더란다.

나이가 높아지고나서 눈물이 말랐는데 모처럼 많이 울었다고 한다.

8시간이 걸리는 거리라서 가보지 못한 내 마음도 형언할 수 없이 아팠다.

 

그렇다.

이제 누구나 우리 나이가 되면 조만간(sooner or later) 가야할 길이지만

천국에서의 기약 말고는 지상에서의 별리라는 안타까움과 삶의 유한성에 대한 

서글픔이 슬픔을 더한다.

종교적, 정신적 수양과 구도의 결과로 해탈, 구원의 경지에 도달한 범상치 않은

인물들도 주위에는 혼재하지만 헤어짐에 대한 인지상정은 기본이 슬픔이다.

 

작고한 동기는 학창 이후, 뉴저지에서 처음 만났다.

오래 미8군에서 근무하다가 그가 특별 이민 케이스로 미국에 온지는 하와이에서의

두어해 체류를 합쳐서도 모두 10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짧은 이민경력과 은퇴 나이에 접어든 특별한 정황들이 깊은 감정의 교류를 갖여왔고

삶의 현실에 대한 지혜와 분별력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그의 인생 역정은 내 어줍잖은 글의 자료로서도 역할을 했으나 기회있을 때

조금더 많이, 오래, 깊이있게 이야기를 들어둘걸,

나중에, 나중에, 라는 게으름으로 기록할 건덕지를 놓친 안타까움이 있으나

이제는 그런데에 연연할 마음의 여유도 마르고있다.

우리 나이가 몇인가.

 

고인이 객지 생활에서 향수에 지쳐 쓸쓸히 지낸건 결코 아니었다.

물론 8년 전 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하늘창이 있는 방에서 보름 달을 보거나

특히 비행운을 남기며 먼 길을 떠나는 대형 비행기를 바라다 보면 고향 생각도 났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고향을 가기 보다는 유럽 여행이나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메디케이드와 양로 혜택 등을 염두에 두고 나라 밖으로 티가나는 거동은 삼갔다.

미국 안에서도 다닐 데가 많다고 했으나 그가 제안한 대륙 횡단, 혹은 크로스 컨추리

여행을 몇 커플이 함께하자던 계획은 불발되고 말았다.

 

한인 교회생활로도 그는 수많은 교우들과 교유가 있었고 학교 동문 모임도 심심치

않았다.

또한 교회의 구역장, 셀장도 맡아서 그 일에도 바빴다.

지역 경찰서에서 종신 유급 봉사자로 일주일에 네번 열심히 근무도 하였고 짬을

내어서는 아침 산책도 동네의 나이든 한인 교민들과 함께 하였다.

그는 신대륙에서도 바쁘게 살다가 지상생활을 하직하고 천국으로 떠나갔다.

천국 가는 길의 여정도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다.

장례 보험을 일찍 들어두어서 납입 비용이 상대적으로 덜 든다고 하였다.

시민권을 신청하거나 운영하던 업체를 팔 때나 final address임을 강조하며 집을

장만할 때나 또 고칠 때나 그는 힘들여하지 않고 슬슬 재미삼아 모두 자기 손으로

하였다.

큰 딸 내외는 일본에서 오래 대학 교수와 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작년엔가

국내로 들어갔고 둘째 딸과 아들은 모두 미국으로 초청, 인근에서 살며 얼마전

필혼을 보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말대로 어지간히 살다가 갔다.

세속에서의 그의 final address는 사랑하여 마지않던 뉴저지 주, 리지필드,

백년묵은 가로수가 줄줄이 울창한 동네이다.

   

 

 

 

 

 

 

 

도메니코 지폴리 // 오보에와 첼로, 오르간과 현을위한 아다지오 /


Domenico Zipoli Adagio for Oboe, Cello, Organ and String orchestra 오보에와 첼로, 오르간과 현을위한 아다지오
도메니코 지폴리가 여러개의 독주 악기를 위해 쓴 이 아다지오는, 세개의 협주 악기의 연합에 힘입어 바로크 스타일도 고전주의 스타일도 아닌, 장중 한 폭을 확보하고 있는 곡이다. 반주자의 역할을 위임받은 오르간은 첼로와 오보에로 하여금 서로 동등한 파트너로써 중심 선율을 분담하게 하고, 오케스트라는 풍부한 톤으로 이들의 화성을 받쳐주는 형식을 취한다
Domenico Zipoli (1688-1726)
이태리 피렌체근교 프라토(Prato) 태생의 작곡가이자 오르간 주자인 지폴리는 19세때 피렌체에서 정식 음악 공부를 시작, 나폴리, 볼로냐에서 음악을 공부 171 0년 로마로 옮겨 파스퀴니를 사사 1715년에는 예수회 성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어 스트로치 공주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유능한 음악가로 인정 받습니다. 지폴리는 곧 예수회에 입회 1700년대 남미 원주민 세계로 뛰어든 예수회 신부 들과 아르헨과 페루의 밀림에서 원주민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직접 음악을 작곡 연주하면서 남미 원주민들의 토속적인 음악 색채가 녹아 있는 신비로운 선율을 만들어 냅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코르도바 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작곡가와 오 르간 주자로도 활동, 독특한 작품들을 발표, 1724년 학업을 마친 지폴리는 신부로 서품될 예정이었으나 1726년 결핵으로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젊은 나이의 요절로 많은 작품이 남아있지 않으나 대위법과 이탈리아 오르간 음악의 전통을 간직한 건반음악들이 오늘날까지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크 시대(17-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르간 음악은 전무후무한 황금시대를 맞는데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남미의 서정이 깃든 오르간 소나타를 비롯 오라토리오 외 건반 소품곡(Keyboard Pieces)들이 있습니다.
  • Pierre Pierlot, oboe
  • Anne-Marie Beckensteiner, organ
  • Bernard Fonteny, cello
  • Jean-Francois Paillard Chamber Orchestra
  • Jean-Francois Paillard,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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