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팩션 스토리

가얏고의 전설

원평재 2011. 2. 13. 23:10

이른 아침에 훌쩍 탄 직행
버스가 제대로 속도를 못내며 끼억끼억
과음한 다음날의 술꾼 같은 소리를 내더니 운전수가 마침내 차를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이 버스는 기어가 들어가지 않으니 내려서 지금 막 따라오는
다음 버스를 타라고---.

내 자리는 이날 따라 뒷편이었다.
버스를 탈 때는 항상 앞쪽을 고집하는 습관 비슷한 것이 있는줄을
나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는데, 하필 오늘은 무슨 바람으로 뒷죄석을
택했나, 일진이 나쁠려니!

이제 앉아가긴 틀렸다고 혀를 차면서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
쫓아내리는데 뒷버스는 우리가 싫다는 듯이 휭하니 달아나 버렸다.
헐떡거리는 버스가 그걸 쫓아가기는 다 틀렸고 우리는 다시 병든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늦게내린 내가 앞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세상만사 세옹지마인가---, 오늘 일진이 나쁘진 않네.
옛 친구와의 술자리도 기다리고 있고---.

서서가게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기사도 자칫 승객들의 기세에
눌리다가는 낭패볼 우려를 느꼈는지,
"잠실 까지 모셔드릴테니 거기서 갈아타면 될거 아니요"
이러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아이구, 큰 인심쓰시네" 어느 아주머니의 한숨에 차내에는 웃음이
퍼졌고 병든 차는 내내 헛구역질을 해가며 그래도 제 할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엉겹결에 앞좌석에 앉은 나는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짊어진채,
손에는 두꺼운 책을 두권씩이나 쥐고 옆에 서있는 여학생에게 마치
죄라도 지은듯 싶어서 얼른 책을 나꿔채어 내 무릎에 놓았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여학생은 고마운 목례만
깎듯이 했다. 한동안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나는 무심결에 책장을
보았다.

Psychiatristic/Mental Health/Nursing
두꺼운 원서의 타이틀이었다.
<심리분석적 정신건강 간호학>인가하는 과목인 모양인데, 키워드
사이에 빗금은 왜 꼭 치는지---.
아마도 책 표지에 부착되는 마그네틱 바의 밀집과 소산 관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관심은 35년전의 어떤 기억에 밀려서 얼른 사라져버렸다.
35년전 이맘때쯤 나는 오늘 저녁에 술한잔 하자는 친구와 더불어
춘천 근교에서 ROTC 소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모두 대학신문의 단과대학 대표 기자를 맡아하면서 문학을
지망하는 "문청"이었다.

아니 조금 엄격하게 나누어보자.
경영학 쪽의 나는 사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비장한 자세라기
보다는 "비장감" 자체를 관념적으로 사랑한 걸멋든 청춘이었고,
사학을 전공한 오늘 만날 친구 K는 진짜 장편 한편을 졸업전에
쓰지 못하면 자살을 결행할 기세로 끙끙거리는 단호한 청춘이었다.

간간히 200자 원고지로 엄지 손가락 두께 만큼이나 악필을 휘날린
그는 마치 오페라 라보엠에서 악보를 태우듯 그 상형문자처럼 갈긴
원고지를 목탄 난로에 한장씩 쑤셔넣으며 백구 소주를 털어넣었고
빨간 세코날을 마패처럼 주머니에서 끄집어 내어 흔들어 보이면서
간이 작은 친구들을 겁주었다.

아마도 그가 생명을 건진건 ROTC 때문이었으리라.
그것도 강인한 훈련의 덕이 아니라 정신없이 몰고간 가혹한 군사훈련
프로그램의 정신 홀리기와 그 암울하던 시절에도 장교로서의 취업이
보장된다는 절망의 건너편에 있는 상대적 희망감, 그리고 155마일
휴전선에 나가면서 2차대전 초기의 마지노 선이나 대전 말기에 독일이
러시아를 대비하여 구축한 절망적 "동북 방벽" 같은 곳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비장한 착각 등으로---.

나와 K는 공교롭게도 춘천 인근으로 배속을 받았다.
멋을 좀 부려서 표현한다면 "동부 전선'으로 배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 병사나 러시아 병사는 물론 크로아티아 병사도 눈에
들어오진 않았고 미군 병사들만 춘천역 앞에 있는 캠프 페이지
인근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맨날 서울 나갈 궁리만 했는데 배속 첫해에는 위수지구 이탈이
어려웠고 해가 바뀌면서 요령이 생겼다.
방법론이야 지금은 잊었지만 하여간 서울은 자주 뻔질나게 다녀온
것으로 기억된다.

서울에 도착하면 우리는 우선 명동으로 달려갔다. 
명동 성당 건너편의 "은성", 최 아무개 TV 톱 탈랜트이자 당시는
연극인으로 더 유명했던 사람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대폿집, 톱밥이
깔린 바닥에 침을 퉤퉤 뱉으며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를 논했으나",
내가 미술 대학 다니는 여학생의 꽁무니를 쫓는 순간부터 두사람의
행보는 달라졌다.

그는 과묵하고 냉소적인 옛날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서 양동이나
종삼이나 종묘 뒷쪽의 갈보집을 훑고 다닌다고 과장되고 위악적인
모습을 과시했으나 내가 다 믿지않은 것은, 마치 내가 이번 주에도
그 미대생과 키스를 얼마나 했는지 입술이 부르텄다고 거짓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입술은 무슨---, 사실은 손목도 잡기 힘들었었다.
그러나 어쨌든 두사람이 휘젓고 다니는 길은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열차 시간은 두사람이 항상 일치시켜 놓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경춘선 일요일 저녁 시간은 입추의 여지도 없는
승객들과 발차시간의  잦은 지연, 느릿느릿한 속도, 술취한 자들의
주정과 고함과 냄새, 세상의 온갖 메스꺼움이 모두 함께하는 쓰레기
통이었으므로 우리 둘은 그 속에서 전혜린과 루이제 린저, 프리드리히
니체와 싸르트르, 또 박승훈의 "영년구멍과 뱀대가리" 그런 것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죽였고 그것도 밑천이 떨어지면 그때 막 나와서
인기를 끈 "주간 한국"을 사 보았다.

우리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불란서의 지성이 "물건"이 좀 시원치않은 것 아니냐고 힐끔힐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노가리고 있을 때, 때아닌 키득거리는 웃음이
우리의 배꼽 아래쪽에서 나왔다.

우리 둘은 늦어서 자리를 못잡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바로 우리
아랫도리 쪽에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묘령의 아가씨가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젊은 여자는 무릎에 잔뜩 놓은 책들이 아니더라도 여대생이 틀림없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아, 한국여자(아니 동양여자)도 이렇게 우유빛일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도 서양여자를 닮았다.
덩치도 있고 앉은 키도 꼿꼿하고 이마 또한 준수했다.
과연 인연이 된다면 대어를 낚는 순간이랄까---.
어쨌거나 나는 맨날 껴안고 키스했다고 거짓말해댄 상대가 있으니
차례는 맨날 종삼간다는 K의 차지였다.

나는 그녀의 무릎에 걸린 가장 두꺼운 책의 타이틀을 훔쳐보았다.
영어로 된 책 제목은 "ANATOMY"였다.
"해부학"이라---. 춘천에 의과대학이 당시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간호대학, 그래 춘천 간호대학이구나.
춘천까지 서서 가면서 우리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으나
이심전심이자 염화시중의 미소를 자주 교환하였다.
마침내 기차가 춘천에 도착했을 때 차라도 한잔 권할려는 우리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그녀는 마치 뺑소니치듯 사라졌다.

이제 우리의 서울행은 본격적으로 빈도를 더하여 갔고 일요일 저녁
춘천행 기차를 타러 성북역 플랫폼에 나오면 인파 속에서 그녀를 찾는
작업이 보물찾기처럼 가슴 울렁거리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리고 보물을 찾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매번 그녀는 맨뒷쪽 객차의 앞쪽 출입구 서는 지점에 자리잡기의
노림수를 도모하고 있었다.
무거운 해부학 교재는 항상 손에 들고서---.
우리의 노림수는 물론 그녀의 꽁무니였다.

그런 순간이 얼마나 지났던가, 마침내 어느날 그 기차칸에서 K가
그녀에게 춘천에서 차나 한잔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답변은 의외였다.
"차 같은건 말고 바로 가야금으로 오세요."

나는 처음에 그 말을 전혀알아듣지 못햇다.
그러나 얼굴빛이 햐얗게 바래는 K는 집히는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기 부대에서 상급자들이 일급 요정,
"가야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금"을 우리 면전에 휙 내던진 그녀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K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저녁 어둠 속에서도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날은 다른 도리가 없었고 다음 주중에 둘이 함께 가야금을 한번
찾아가보기로 대충 약속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가야금은 큰 한옥 요정이었다.
육군 소위 봉급 수준으로는 찾아갈만한 집이 아니었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나 아가씨나 모두 보이지 않는 한적함이 있었다.
새로 단청을 한 고운 고옥의 방한간을 잡고 가슴과 지갑이 모두
떨리는 상태로 우리 둘은 좌정했다.
목이 쉰 마담이 우리들의 소위 복장을 좀 기이하다는듯이 일별하며
주문을 받으러 들어오자 우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간호대학 다니는
아가씨나 혹시 따님은 없느냐고 물었다.

"또 그년이 그러고 다니네---"
"미자"라는 여종업원이 서울에 있는 그녀의 집에 갔다올 때면 꼭
옛날에 다니다만 간호대학 교재를 갖고 다녀서 젊은 남자들이 수도
없이 찾아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매상에도 별 도움이 없고 혹시 사고라도 날까봐서 마담으로서는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나마 미자는 지난주 서울
갔다와서 갑자기 이 요정에서 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날 우리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K가 "나는
항상 이렇게 뒷북치고 헛집는단 말이야"라고 후렴처럼 말하던 소리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아침 버스에서 서서가던 여학생은 마침내 자리가 나서 내가 받아주었던
간호학 책도 되받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은 문자 메시지로 무언가를 열심히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하는 청년과의 교신이기를 무언으로 빌었다.

이제 저녁의 광화문 거리.
두 사람이 만나서 잔을 돌리며 이루지 못한 문인으로서의 꿈을
아쉬워하다가 문득 내가 K에게 물어보았다.

"가야금이라고 기억나?"
"아, 그럼, 물론이지. 우리가 문인으로 입신하면 누구든 먼저
<가얏고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자고 했잖아."
"그것까지 기억하는군. 가야금의 해부학 여자가 참 멋있었는데---."
"비밀이었지만 난 결국 그녀와 잤어."
"엇?"

나는 당시 군복을 때 맞추어 벗었지만 그는 장기 복무를 택했고
월남까지 갔다왔다.
그러니까 월남가기 직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분으로 부대의
장교들과 회식을 바로 그 가야금에서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 주인 마담이 바로 미자였단다.
그 사이 결혼도 하였는데 남편은 민간 토목 기술자로 역시 월남에
가있고 미자는 부쳐주는 돈으로 가야금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당시에도 우리와의 기억을 잘 반추하고 있었고 나의 안부까지
물었다는 것이다. 나는 안도하였다.
하지만 글쎄 그가 지금껏 그런 것 까지 기억을 했을까---.
차라리 덕담 수준인가.

하여간 그가 월남으로 다음주에 간다고 했더니 미자는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했다. K도 그때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는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두사람은 몸을 섞었다는 것이다.

"집념이 강한 여자였어. 가난해서 전문 간호사 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지. 언젠가는 간호 조무사 학원 같은거라도 설립하겠다더군.
원래의 꿈은 간호장교였다고---."
"왜 이때까지 비밀로 했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가얏고의 전설은 언제 쓸거야?"
"자네가 먼저 써서 인터넷 소설방에 올려. 난 기브업이야."

"요즈음은 돈이 없어서 간호사 못되는 비극은 없겠지?"
한참 있다가 내가 엉뚱한 질문을했다. 아침에 본 그 여학생이 언뜻
눈에 밟혀서 그랬나보다.

아침에 본 아름다운 여학생, 그대여! 간호사도 뜻한데로 되고 또
간호장교도 되고 문자 메시지 날린 청년과도 아름다운 결혼을 하되,
결코 젊은 청년들에게 <가얏고의 전설> 같은걸 쓰게하진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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