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팩션 스토리

성~격 차이

원평재 2011. 2. 14. 00:36

 

 

"몽 프레르!"

감미롭고도 익숙한 음성이 성일수의 등 뒤에서 들렸다.

틀림없이 정현주 같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외교부에 하루 휴가를 내고 서울 역 앞 대우 센터,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한국 생명주의 학회"에 그가 등록을 막 하고 있는데 일어난 뜻밖의 일이었다.

재벌 기업이 학술 단체에 이런 공간을 내 준다는 사실에 그가 다시한번 찬사를 보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우연한 조우는 사실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성일수 박사는 행정학을 하였고 정현주 박사는 프랑스 문학을 하였으니 학문적 영역에

공통점이 전혀 없었고, 현업에서도 한사람은 외교부의 중견 외무 공무원이었으며 

또 한사람은 점점 학생이 줄어드는 지방 대학의 프랑스 문학 교수였으니 이런 학회에서

우연히 만난다는게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명주의 학회에 행정학 박사이신 외교부 고급 공무원이 웬일로 오셨어요?"

그가 돌아다보니 과연 정현주 교수가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그의 귓전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녀의 무릅이 슬쩍 그의 엉덩이 쪽을 친건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내가 도리어 물어볼 말이오. 프랑스 문학하는 사람이 여긴 왜요? 아니 아니, 농! 농!

그런걸 따지기에는 우리 정말 너무 오랜만이오. 반가운건 기본이고---."

그가 굵은 목소리로 놀라며 말하였다.

"여기가 잡학 학회잖아요."

그녀는 주위를 의식하지도 않고 높은 음 자리표로 대답하였다.

"하하하. 잘못 들으면 남들이 오해하겠소. 그러니까 모든 학문이 집대성되는 학회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하하하."

그는 정현주의 당돌한 발언에 조금 당황하다가 얼른 명답을 만들어내고 말을 이엇다.

"빨리 등록하고 로비에서 차 한잔 합시다."

 

두사람은 페이퍼 컵에 커피를 담고 로비 쪽으로 나오다가 빈 세미나 실을 하나

발견하여서 슬쩍 그리로 들어갔다.

정현주의 순발력이었다.

두 사람만의 공간이 모름지기 만들어졌다.

"생명주의 학회라니까 예전 농과대학이나 농생명과학 관련 학회같아요."

정현주가 조금 자조를 섞어서 입을 떼었고 성일수도 공감하는 분위기로 화답하였다.

"그래요. 우리 공무원 사회에서도 요즈음 생명이란 두 글짜가 들어가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지요. 그래서 행정을 논할 때에도 휴먼 조직 관리, 인간 중심의 시스템

프로세스, 생명주의 조직학, 등등으로 생명이란 글자가 판을 쳐요.

그래서 나도 이 생명주의 학회라는데를 한번 기웃거리게 되었지요. 승진 못하면 어떻게

대학에라도 한 자리 뚫어보려고, 하하하---. 사실 이제는 공무원들이 상하 의식도

약하고 윗사람의 의지나 말이 먹혀들지 않아요.

의욕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막상 실천을 하려면 행정적으로 그런 톱 다운 방식은

생명력이 없다고 아래 직원들이 치받아요. 보텀 업으로 밑에서 올라가는 방식이라야

된다면서---.

우리같은 중간 관리자 계층이 요즈음 설 자리가 없어요."

 

"호호호, 저는 앉을 자리가 없어요. 이제 불문학 해가지고는 밥도 못먹게 생겼어요. 

칼같고 불같던 저도 요즈음에는 참 자조적이 되었다니까요. 아까도 그래서 목소리를

좌충우돌 좀 높여보았어요.

신입생들은 자유전공이라고 전공 없이 인문학 계열로 들어와서는 2학년 올라 갈 때

대부분 영어 전공이나 중국어 전공으로 다 가버려요.

이러다가 밥그릇도 못챙기겠다는 위기감은 말할 나위 없고 그럭저럭 제 강의에

학생들이 채워진다해도 얼마나 처량한지---."

 

"프랑스어 계통이 어디나 심각하군요---. 나도 사실 외무고시에 합격한 직후,

프랑스 근무를 하게되어서 그때 공부를 계속하고 파리 대학의 박사 학위를 한게  지금은

후회가 된답니다.

프랑스어를 잘한다니까 근무지로는 아프리카 쪽이나 돌게 되고---. 한번에 다섯나라

대사를 겸한적도 있다니까요. 엇그제 이긴 토고 대사도 겸했었지요, 가나 주재 대사

할 때였어요.

내 꿈은 미국 대사 아닙니까, 하하하. 이젠 꿈도 못 꾸겠어요."

"그러구 보니 현실이 고달퍼서들 그랬나, 우리 너무 오랜 만이예요. 앙그래용?

몽 프레르!"

정현주가 프랑스 식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그의 옆으로 닥아앉았다.

"메 위! 참 그렇네요. 프랑스에서 비슷한 시기에 귀국했던 당시에는 그래도 우리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은 종이 찻잔을 들고 예전 파리 대학 캠퍼스에서처럼 몸을 붙였다 떼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금방  공부하던 그 시절이 회고되었다.

"저녁나절, 캠퍼스 주변의 쎙 제르멩 데 뿌레 거리를 거닐던 시절이 그리워요,

몽 프레르."

"아이구, 정 박사! 내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몽 프레르 대신에 차라리 우리말로

오빠라고 부르지 그래요.

몽 쇠르가 수녀님들에 대한 호칭사 이듯이 몽 프레르는 사실 수사님들을 부르거나,

무어랄까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오라버님 같은 거 아니오. 앙그래용? 마담므 정!"

"오빠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성 박사님에 대한 내 감정이 뜨거워져서 안되요.

몽 프레르가 좋아요. 내 몸 속에 한번 들어온 후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오빠인가요."

"메 농! 아이구, 현주씨, 나 당신 몸에 들어간 적 없어요."

"천만에요. 메 위! 우린 했어요!"

정현주가 성질대로 소릴질렀다.

 

시떼, 그러니까 국제학사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했던 파리 생활 초창기의 어느해 저녁,

그들은 외로움과 야망과 상띠망을 포도주에 모두 섞어 넣어 자정까지 마시고 나서

같은 침대로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밤의 행적에 대한 해석은 각각 달랐다.

특히 몸을 섞었느냐하는 부분에서---.

그건 치사한 책임론 공방이 아니라 현실의 벽을 두 사람이 깨부수느냐 마느냐의

의지 다툼이기도 했다.

성일수는 한국에 아내가, 정현주는 독일에 유학생으로 와있는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결국 성일수의 의지로 두 사람은 평지풍파를 만들지 않고 파리시절을 넘겼다.

 

귀국 후에도 성일수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두 사람이 가끔 만났다.

때로 부부가 함께 만난적도 있었다.

네사람이 만났다는게 아니라 파리대학 동문회 같은 공식 모임, 망년회 같은 때였는데

그것도 곧장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일수가 외국 공관, 주로 아프리카로 나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연락이 끊어졌던

것이다.

독일에서 철학을 하고 왔다는 정현주의 남편되는 사람은 인문과학과 독일어가

천대받는 세태의 희생물같은 몰골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한두번 부인의 옆에 붙어서

나타나더니 이래저래 더이상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 번역물에서 그의 이름은 빛나고 있었지만.

 

"몽 프레르, 우리 오랜만인데 살짝 키스 한번 할까요?"

정현주의 도발이었다.

"이 사람아, 지금 아침이야, 이성의 아침, 마흐뗑 드---."

그러는데 그녀의 입술이 그를 덥쳤다.

"프렌치 키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로군. 부군께서는 번역을 많이 하던데 잘 계시겠지?"

"우린 지금 별거중이야요. 몰랐어요? 소문께나 났는데---. 제가 지방대학 전임이라서가

아니라 헤어지기로 작정한 것이지요. 그 댁 언니는 잘 지내시지요?"

"아이가 셋이라네. 그건 그렇고 부군께서는 참 좋은 사람이던데---. 왜 헤어질 생각이야?

서로 이해하고 적당한 선에서 잘 지내시지. 정 박사가 무슨 재벌집 며느리 못되어서 안달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아, 음악이나 체육하는 사람과 연애라도 하는건가?

학문적 성취도 같은거라면 내 보기에 부군 만한 배우자 찾기도 힘들텐데---."

 

그가 무슨 현자나 되는듯이 말을 이어가자 정현주는 말을 아끼고 경청하더니 마침내

한마디를 툭 던지며 일어섰다.

"몽 프레르! 세상에는 우리의 철학이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너무 많다는 쉐익스피어의

기억하지요?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지려는건 성격차이 때문이에요."

"성격차이? 아, 그 진부한 상투성!"

"몽 프레르, 정말 뭘 모르시네요. 성~격 차이 말이에요. 그 격이 서로 너무 달라요."

그녀가 나갔고 그도 따라 나섰다.

 

잡학 학회라고 자괴하면서도 두 사람은 세션을 따로한 두 세미나 실에서 각각 발제

까지하였다.

성일수는 생명주의에 입각한 외무 행정의 실천적 방안에 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하였고 정현주는 인기가 없어진 프랑스 문학 대신에 EU 문화 콘텐츠와 영상 현황

이라는 주제로 해박한 지식이 무기가 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학문도 헝그리 정신인가.

프랑스 어권의 아프리카로만 나돈 성일수는 이제 대학으로 들어와 안주하고 싶었고

정현주도 사라져가는 프랑스 어문을 버리고 밥그릇을 챙겨야하기 때문인지

이날 두 사람의 발제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무게있는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학회가 끝나고 뒷풀이 순서에도 정현주는 참석할 모양같았으나 성일수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수많은 승용차가 그 많은 층들을 겹겹으로 채운 대우 힐튼 주차 빌딩으로부터

그가 차를 빼내어서 남대문 쪽으로 내려오니 멀리 시청앞 광장에는 붉은 악마들이

다음날 새벽의 축구를 미리 응원하며 "대~한 민국"을 연호하고 있었다.

시청과 광화문 쪽을 피하여 남대문에서 명동 입구로 그가 차를 돌리는데 거기 잔디

공간에도 붉은 악마들이 잔뜩 모여서 응원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순간  성일수는 눈을 의심하였다.

숭례문이라는 세 글자의 현판이 근엄하게 내려다 보는 아래 그 큰 문 한 쪽에서

붉은 남녀 악마들이 응원복을 갈아입는지 옷을 벗고 있었다.

참으로 건강한 몸매들이었다. 서구 체형의 남녀들이어서 혹시 차름 몰며 그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이런건 아무나 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리라,

사람간에는 정말 극복할 수 없는 몸의 차이가 있구나,

성일수는 생각하였다.

 

멀리 들려오는 "대~한 민국"과 "오~필승 코리아"의 건강한 함성이 아까 정현주가

말한 "성~격 차이"라는 안타까운 말과 문득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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