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조정래 문학과 노벨 문학상 (11월, 내 마음의 편지)

원평재 2013. 11. 1. 08:38

 

 

 

 

 

 

"11월 1일" 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4계> 중 "11월"과 함께 가을 문학기행을 떠나봅니다.

이번에는  벌교의 조정래 문학관과 함께 보성의 다원(차밭)까지 다녀옵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낙안읍"은 피안의 정토 같은 곳입니다.

지금은 막을 내렸지만 두어주 전만해도 "순천 정원 박람회"가 문학기행의 중간지대에서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듯 하였습니다.

 

 

 

벌교는 태백산맥 뿐만 아니라 조정래 문학의 피할 수 없는 토양이 됩니다.

 

문학관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직 지호, 지척에 있지는 않은데 꼬막 정식을 파는 식당

인근 부터 태백산맥은 준령이 되어 우뚝합니다.

벌써부터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동네의 꼬막도 그냥 단순한 맛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닌 줄을 이번에야 알아차렸네요~~~.

김지하가 "꼬막"이라는 시를 쓴 저변의 느낌도 깊이 와닿았고~~~.

 

 

 

꼬막 정식으로 점심을 푸지게 먹고 마침내 조정래 문학관에 도달합니다.

문학관의 옆으로는 태백산맥의 "현 부자집"도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월간 <내마음의 편지> 11월호에 실은 조정래 문학관 "문학기행 에세이"를 올립니다.

 

 

조정래 문학과 노벨 문학상

 

정녕 가을이 무르익었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문예지의 가을 문학기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큰 리무진 버스의 좌석이 거의 다 찼으니 성황이 아닐 수 없다. 행락의 철, 가을 분위기

탓이런가? 그럴 리가! <태백산맥 조정래 문학관>을 찾아나서는 여정 자체가 문학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야 말았으리.

민족사의 파란만큼이나 파고가 높았던 조정래 문학의 내력을 공 체험하자는 의기가 투합 된

결과였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걱정이 앞섰다. 평생 강단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다가 내려온 사람이기에

평소에도 그쪽 관련 담화의 계제에는 꼭 “한 말씀”을 추임새로 넣어주기 바라는 숙명적 시선을

받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학기행 이틀 전에 멀리 스웨덴의 한림원에서는 금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였다. 앨리스 먼로라는 익숙지 않은 이름의 주인공은 캐나다 국적의 단편소설

작가가 아닌가. “한 말씀”의 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모양 같았다.

 

이런 사태(?)에 즈음하여 “영문학사(미국 문학 포함)”의 통시적, 공시적 흐름을 짧게나마 미리

살펴보자면, 대략 고대 중세 영문학의 비중은 갈수록 줄어들고 근현대 백인 중심의 미국

문학사에 비중이 크게 실린다. 특히 양차대전 후의 양상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미국의 정통 문학사에서도 백인 남성 중심의 문학지형이

깨어지고 유태계 문학을 효시로 하여 흑인 문학, 인디언 문학, 여성주의 페미니즘 문학,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계 작가들의 작품들도 영문학의 주류에 끼어들게 된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영연방의 일원이 된 나라의 영어로 쓴 문학 작품도 영문학의 큰

테두리에서 존재감을 주장하는 데 무심할 수가 없다. 이들은 또 제3세계 문학 군을 형성하면서

주목 받기도 한다.

이런 복합적 현상 속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자면 작가와 작품의 선택에서 미로 속에 갇히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껏 몇 차례 우리말과 영어로 영미문학사를 편찬해 본 내 경험 속의 고충은

끝이 없다. 앨리스 먼로도 바로 그런 변경의 여성 단편작가였다. 뺄 것인가 넣을 것인가---.

폄하의 말이 아니라 태생과 활동의 지리적 위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주제적 접근을 해보면 여성 작가로서의 사소한 일상으로 인류가 살아가는 보편적

생활방정식을 풀어낸다는 말로 압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작가의 놀라운 전략이다.

 

일교차가 심한 우리나라의 가을 새벽녘 노상주차장에는 격려의 인사를 하려고 문인들 보다 더

일찍 나온 여성 국회의원이 꼬박 서서 벌(?)을 서고 있었다. 정치가의 입지(立地)가 힘들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유머가 나오려고 하였다.

내가 수인사 끝에 영문학 전공임을 고백하였다. 여성의원이 반색을 하며 무료함과의 새벽 대치

국면에서 원군을 얻은 표정이었다.

“엊그제 저녁 발표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여성 작가임에도 제가 전혀 모르는 분이더군요.

제가 문학을 좋아는 하지만 글 쓰는 재주는 없습니다만.”

문인들의 새벽행차에도 나와 보는 정치가라서 그런지 말씀도 겸손하다. 의원들이 사실 새벽

어시장에만 나갈 일은 아니리라.

“모르셔도 좋을 만하지요. 그렇게 알려진 작가는 아닙니다. 저도 어제 아침 일찍 대형 서점에

가서 그 작가의 원서를 구하려 했으나 그간 재고가 없었다고 하네요. 번역본도 단편 소설집으로

네 종류가 나오긴 했는데 모두 절판이 되어서 일단 배송 신청을 해 두었지요. 상황을 참고

하시고 자책하진 마십시오.”

내가 유권해석을 하면서 의원을 안도시켰다. 우리는 고은 시인과 황석영 소설가가 벌써 십여 년

째 최종 열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면서도 내내 외면되는 현상을 아쉬워했다.

“대형 서점의 맨 앞 매대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전 작품들이 <노르웨이의 숲>을 비롯, 산더미

처럼 쌓여있어서 이번 문학상의 예상 기상도를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사태를 감안하면

앨리스 할머니로 선방은 된 셈이 아닐까요?”

나의 애국적 발언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녹이는 가운데, “문학기행단”이라는 표지를 앞창에

크게 달고 리무진 버스는 장도에 올랐다.

 

나는 이야기를 차내에서 조금 더 이끌고 나갔다. 노벨 문학상은 105회 수여되었는데 여성은

이번을 포함 13명이다. “여소남대”랄까, 남성 위주의 시상 경향을 부인하기는 힘들지만 다른

분야와 비교해서 특별히 낮은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단편 작가에게도 시상이

되었다는 흐름이 아닐까. 물론 단편 소설집 12권을 낸 이 작가도 최초의 작품은 장편이었지만.

우리와 달리 서구문학에서는 장편소설(novel 혹은 roman)과 단편소설(short story

혹은 noveletta)은 엄연히 다른 장르로 정의되는데 우리는 일본의 영향으로 소설이라는 표현이

 데 모두 들어가서 같은 장르로 오해가 되고 있다는 점도 간략히 설명하였다.

한편 요즈음은 수필 계에서도 “단 수필”이라는 아주 짧은 수필 형식이 새로운 패션으로

등장했다는 것과 수필에도 시적 수필, 스토리 수필, 추리적 수필 등의 경지가 개척되어서

이전의 문학 담론과는 다른 현상이 보인다는 점도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내 의무는 끝이 났다. 마침 여수 출신으로 언론계에 오래 몸을 담았던 분이 태백산맥과

조정래 문학에 대하여서 나름의 소개를 하였다. 주요 직책에서도 이제는 퇴임한 분이라 연배도

높았는데 이 대하소설을 이번 기행에 대비하여 다시 읽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통독하였다는 것이다. 압축, 요약해준 일반론적인 부분들은 기행단의 기억력과 잠재

의식을 일깨워 주어서 참으로 요긴하였으나 짧은 지면에 여기 다시 옮겨 담을 겨를은 없고

그 분의 특이한 견해 한두 대목만 두고두고 음미할 자료가 될까 하여 소개해 보고 싶다.

 

그분의 견해로는 태백산맥의 시원은 이미 동학란에서 기초하였고 구체적 형상으로는 삶의

원천 “쌀”의 생산과 분배, 수탈 과정에서 찾아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또 소설의 중심지, 벌교의 언어생활에는 “욕”이 많은데 소설 속에도 육화되어 있다고 하였다.

욕이 이곳 말에 성한 이유는 바로 지주의 착취와 수탈, 고리대금에 따른 이자, 여기에 관의

착취까지 겹쳐서 소작농들은 욕과 육자배기로 화풀이하며 견뎌내다가 결국 터진 것이 이른바

동학란과 여순 반란사건 이라는 것이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이런 토양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견해였다.

 

벌교의 풍수지리로는 소백산맥이 지맥으로 벋어난 지역이라서 산들이 많고 이를 중심으로

근세사에 수많은 전투와 항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 주민들의 마음에는 그 산세

아래 “낙안”이라는 실제의 지명이 이르듯, “안락정토”의 세계에 대한 꿈이 서렸을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벌교 간척지와 연안의 뻘밭은 1일 2회의 조수 변화라는 자연적 조건을 바탕으로,

그리고 낮이면 관군, 밤이면 반군 식의 인위적 조건까지 더하여 개인의 성격 구성면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겠는가하는 사적 견해도 피력하였다.

 

빨치산 관련 대표소설로 지리산(이병주), 태백산맥(조정래), 남부군(이태),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등을 거명해 본다면 작품의 성격이 “중도”, “중도 좌클릭”, “중도 우클릭”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데, 그래서 이 네 작품이야말로 민족사의 비극적 서사를 가름하는 잣대의

역할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견도 제시하였다.

중간에 우리는 꼬막 집에 들러서 맛갈스러운 점심을 먹었다. 꼬막에 내포된 은유는 이제야

무궁무진한 상징과 기호로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꼬막은 뻘밭에서 최하, 최소의 기본 상태로

지내다가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꼬막은 조수간만의 흐름대로 그 쫄깃한 속살을 벌려서

삶을 유지한다.

 

마침내 우리는 벌교의 조정래 문학관에 들이닥쳐서 시공이 초월되는 체험영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 십년도 채워지지 않은 그곳 이야기를 여기에서는 더 이상 쓰지 않으련다. 누구나

한 번씩 이곳을 순례할 계제가 있을 것이라는 나 나름의 전제가 있기에 찬사와 아쉬움을

섞어서 또 하나의 버전을 만들어 낼 일은 아닌가한다.

담당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태백산맥은 영어와 중국어 번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한다. 아리랑은 물론이고 또 다른 조정래 단편 선들도 번역 작업이 진행되거나

계획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의 경제-문화적 국력이 이를 감당해내고 있다. 그의 초기 소설, 특히

단편 등에서 보이는 전복적 주제는 이제 새로운 가치 창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진화론적 궤적이 있기에 우리의 꿈은 그윽하다.

 

 

문학기행의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 문학담론을  추임새로 나누었습니다.

 

해설사가 깊고 넓게 작가의 세계를 설명, 설파합니다.

 

 

 

 

 

 

 

 

  

 조정래 문학은 이 곳에서 그리스 비극같은 절대적 숙명, 준엄함, 엄숙성으로 지배적 담론이

되어 있는듯 합니다.

그런 정서는 피치 못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그 한계성의 자승자박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다행히 그의 문학은 작가의 생전에 승리의 승전보를 올리게 되고 이어 그 여유를 에너지 삼아

세계화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만.

 여하튼 이분법적 문학작품 해제 보다는 그 이후의 무엇을 탐내보는 마음입니다. 

 

 

조정래 문학은 가히 노벨 문학상에 가까이 접근한 몇 안되는 우리나라 문학의 금자탑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초기 단편에서 보는 전복적 프레임 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가 보다 더 소중한 가치로

부각되는 후기 장편들이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전략적?으로도 그런 가치는 노벨 문학상에 더욱 가까운 길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의 삶이

추구하는 기본적 가치이기도 하겠지요.

예컨대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허무를 부르짖은 잘 알려진 작품 덕이 아니라

분량에서는 조금 부실한 마지막 중편, "노인과 바다"라는 사실이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 속의 장면을 재현해보는 모임인가 합니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그의 탄생일에 맞추어 음유하는 행사가

더블린에서 해마다 열리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의 문화 수준도 이제 이 정도가 되었습니다. 감동입니다.

문득 지상으로 부터 시선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낮달이 반쪽입니다. 

 

우리 문학 기행단의 일원으로는 늦깎이의 여가수도 합석을 하였습니다.

초대 가수의 자격으로---,

유아교사 자격증으로 아이들을 이끌던 이 사람에게 어느날 가요 콘테스트의 입상이라는

운명이 천형처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벌교의 철길은 예사롭지 않게 소설의 한 배경과 오버랩 됩니다.

 

지금은 벌교 땅도 수탈 경제의 피해를 입은 땅, 거기 사는 희생자들의 고장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이미지 변신이 느껴집니다.

벌교하면 또 보성이고 보성하면 또 찻닢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들러본 차 농장이 아름답습니다.

 

 

 

 

 

 

 

 

 

해가 빠지고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 사계 중 11월 '트로이카'

Tdhaikovsky, Pyotr ll'yich(1840.5.7~1893.11.6)


Composer: Pyotr Il'yich Tchaikovsky

 

 

Performer: Vladimir Ashkenazy


Audio CD (November 9, 1999)

Label London / Decca


11. November : Troika

* 트로이카 : 세마리의 개가 끄는 러시아 전통 썰매

 


  

1875년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N.베르나르드라는 사람에 의해

음악잡지 누벨리스트(가십메이커)가 창간되었는데 1876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월별로 계절적 특색에 맞춘 러시아 詩를 선택하여

그 시의 성격을 묘사하는 피아노곡을 게재하기 위해 차이코프스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최초의 곡은 1875년 12월에 써졌으며 마지막 곡은 1876년 11월에

완성되었는데 제 3,5,6,10,11번은 모스크바에서, 제12번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6번 '뱃노래'와 제11번 '트로이카에서'가 유명하지만

제10번 '가을의 노래'도 저무는 가을의 센티멘털리즘을

잘 그리고 있는 아름다운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