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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생가방문 (미래시학 2016년 겨울호)

원평재 2016. 12. 16. 22:07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우에서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로 향하며 도중에 쉐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래트포드 어펀 에이븐"을 다시 한 번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특히 올해는 쉐익스피어 서거 400주기가 되는 뜻깊은 때가 아니던가.

고향 이름이 "스트래트포드 어펀 에이븐"이라고 길게 된 것은 원래 "스트래트포드"라는 

지명이 영국에 많아서 이곳을 특히 "에이븐 강가의 스트래트포드"라고 하게된 때문이다.  

Stratford는 물론 미국에도 많다. 쇠나루(牛津), 그러니까 Oxford가 많듯이~.


쉐익스피어가 위대한 만큼 그에 따르는 전설과 미스터리도 수만가지이다.

우선 탄생일부터 1564년 4월 26일 혹은 23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교회의 세례부에는 26일로

되어있으나 통상 출산 3일후에 세례를 받는 관행상 23일이 탄생일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렇게 보면 서거일과 탄생일이 똑 같다는 우연도 묘하다.


쉐익스피어는 18세에 26세의 여인, 앤 헤더웨이와 결혼을 한다. 그때의 관행으로 여성 26세가

과년한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연상녀이다. 그런데 당시 혼례일은 보통 약혼 교무금을 물고

1년이 지나서 치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그는 몇달 후 결혼식을 부랴부랴 치룬다.

첫 딸의 출산이 아마도 속도위반, 과속이었던가 싶다.


아무튼 그는 잘 살던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초등학교(이때는 "그래머 스쿨"이라고 하여서

라틴어 문법을 필수로 가르치는 생애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우리의 서당 성격과 비슷하달까)

까지도 중퇴한 쉐익스피어가 연상의 여인과 눈이 맞은 과정도 또한 미스터리하다.

여러모로 천재성이 농후하였던가보다---.

처가는 부유하였다.

첫딸에 이어 아이 둘을 더 갖은 후, 쉐익스피어는 런던으로 혼자 올라가서 극작가로 성공

하지만 그 사이 오래동안 가족과는 이산상태로 지낸다. 


우선 쉐익스피어의 처가와 생가부터 구경하고 나서 좀더 따져 볼 일이다.


 

 

"Lake District" 곧 "시인들의 호반 지역"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쉐익스피어 고향 마을에서는 그의 처가 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유한 티가 역력하다.

 

처가 쪽, 그러니까 부인 앤 해더웨이의 집을 들러보고나서 쉐익스피어의 생가와 만년에 지냈던

집이 있는 시내로 들어서니 허물고 새로짓는 건물들이 눈에 띈다.

서거 400주년을 전후하여 관광객 맞기에 바쁘고 2만 7천명이 산다는 마을 전체에 활기가 넘친다.


폴스탑의 동상이 또한 그럴듯하다.

바보는 자신이 현명한 줄로 생각하고 현자는 자신이 바보인줄을 안다. (뜻대로 하셔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시인 겸 극작가. 16세기 중반 영국 남부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태어났지만 정확한 생일은 물론 그의 생애 대부분이 의문투성이다.

그는 처음에는 배우로, 다음에는 옛 희곡 작품의 개작가로, 그리고는 독립된 극작가로 단계적인

발전 과정을 밟아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3부작 ‘헨리 6세’ 제1부를 내놓은 1590년경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그는 2편의

장시와 38편의 희곡과 154편의 소네트를 완성하였고 소재는 당시의 경향에 따라 역사·신화·전기,

옛 희곡, 중세의 로맨스 등에서 따왔으며 희곡의 종류도 당시의 유행에 따라 희극·사극·비극을

고루 시도했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중세의 연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평면적이고 진부한 인물

대신 햄릿, 이아고, 맥베스 같은 입체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일대 혁신을 이룬

것을 들 수 있다.

 

 기사의 4번째 이미지




쉐익스피어 미스터리


쉐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인가?

    

쉐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쉐익스피어가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제대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 그토록 위대한 작품들을 써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학식과 글쓰기 능력을 가진 정체가 밝혀지기를 꺼려한

누군가가 윌리엄 쉐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작품들을 쓴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진짜’ 쉐익스피어는 누구일까?

첫째로는 영국의 자연철학자로 아는 것이 힘이다등의 명언을 남긴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쉐익스피어의 희곡 속 철자들의 위치를 바꾸면 베이컨의

이름이 나온다는 주장도 .


또 다른 후보로는와 동갑이었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다. 촉망받는 인기 작가였던

말로는 술집에서 사소한 다툼 끝에 결투로 사망했다고 알려져있다.

 ‘말로 작가설지지자들은, 말로가 국가와 트러블을 일으키자 죽은 것처럼 속이고는

윌리엄 쉐익스피어라는 가명으로 계속 작품 활동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쉐익스피어가 지혜롭고 영리하여 그 동안에 존재하였던 대본

들을 보완하고 각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처음 런던으로 갔을때 극장 밖에서 귀족들이 타고온 말을 받아서 챙기는 역할, 즉

발레 파킹부터 시작하여서 마침내 극장 안으로 진급하여 들어가 대본 관리하는 역할

까지 승진을 한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낡은 대본, 찢어진 대본, 망실된 부분, 배우들이 멋대로 개칠한 부분을 보충하다가

마침내 전면 개작, 창작의 수순을 거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읽은 것은 진짜 쉐익스피어일까?

 

너무나 유명한 쉐익스피어, 하지만 쉐익스피어 희곡 원작은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는 은근히 외설스러운 표현들이 많다. 욕설, 강간, 오쟁이진

남편, 상스러운 유머들, 잔혹한 살해방법 등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읽어온 많은 쉐익스피어 작품들은 적당히 순화되고 위생처리된 셰익스피어다.



먼저 저기 보이는 쉐익스피어 센터를 통해서 들어와 전시품과 영화를 보고 이어서 생가로

들어온다.





 

초기 방문자들이 창에 낙서를 했는데 월터 스콧 등 유명인들이 많다.



서까레가 우리 시골집과 닮았다.





 

엘리자베스 조의 이 사람들과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생가 관람을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튜더식 건물이 인상적이다.


이 마을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토마스 로저스의 손자 존 하바드는 미국에서 하바드 대학을 세웠다.



채플 스트리트에 위치하고 있는 뉴 플레이스는 런던에서 돌아온 셰익스피어가 1597년부터

1616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1623년 셰익스피어의 아내 앤이 죽음을 맞이한 것도

바로 이곳에서 였다.

1597년 셰익스피어의 주요 활동 거점은 아직 런던이었지만 스트래트포드의 아름다운 이

저택을 60파운드에 매입했다. 그가 이곳에 완전히 정착해 살게 된것은 1610년에 이르러서

였다.

그 당시 뉴 플레이스는 스트래트포드에서 두번째로 큰, 유일하게 벽돌로 지어진 저택이었다.

거처였던 곳은 거의 파손되어 있는 등 지금에 와서는 당시의 웅장했던 저택의 모습을 다 찾아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앞뜰과 뒤뜰에 펼쳐진 정원과 과수원, 헛간

등을 포함해 얼마나 화려한 저택이었는지 짐작해볼 수는 있다.


원래 서거 400주년에 맞추어 복원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현재도 공사중이었다.


오른 쪽으로 공사장 가림막이 조금 보인다. 400주년 해에 마칠지 못할듯 싶다.


현재 남아있는 내부는 주로 도서 중심으로 기념품을 팔고있었다.


 

쉐익스피어가 다니다 중퇴한 초등학교

 


그래머스쿨은 라틴어 문법을 주로 가르친 당시의 초등학교, 우리의 서당 격이다.





















 

 

 

R Strauss Horn Concerto No 1 in E flat major Op. 11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호른 협주곡 1번 Eb 장조


 

Horn, Barry Tuckwell

With NHK Symphony Orchestra, Japan

 

 

 

 

1악장, Allegro

  

 

 

 

2악장,  Andante

 

 

 

 

3악장, Rondo : Allegro

 

 

Richard Georg Strauss, 1864 ~ 1949

뮌헨 출생. 아버지 F.슈트라우스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뮌헨 궁정관현악단의 제1호른 주자 겸 왕립

음악학교 교사를 지냈다.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11~16세 때까지 그곳 궁정악장

(宮廷樂長) 마이어에게 사사하여 12세 때 《축제행진곡》(작품 1)을 작곡하고 13세 때는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平均律)을 연주하였다 한다.

1882년~83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또 그 사이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빈 ·베를린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뷰로와 사귀는 등 그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

하였다. 84년 《교향곡》(작품번호 12)이 뉴욕필하모니에서 초연되고, 같은해 뷰로의 뒤를 이어

마이닌겐관현악단의 악장에 취임,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브람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슈트라우스는 철저한 반(反)바그너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감화로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심취, 마침내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에서는

바그너보다 감미로우면서도 관능적인 선율로, 교향시(交響詩)에서는 리스트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광범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에는 소프라노가수이자 자신의 가곡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가 된 파울리네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또 베를린필

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뮌헨 근교에 산장을 짓고 때때로 연주여행을 하는 이외에는 주로 그곳에서 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생애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은, 만년에 그가 나치스정권에 협력한 결과가 된

몇몇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서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작품으로는 《살로메:Salome》(1905)《엘렉트라:Elektra》(1909)《장미의기사(騎士):

Der Rosenkavalier》(11) 등 15개의 오페라, 《돈 후안 Don Juan》(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키호테 Don Quixote》(98)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99) 등을 비롯한 10곡의 교향시,

그리고 수많은 가곡과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다.

 

 

Barry Tuckwell

 

호주 출신의 영국 호른 주자.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다 13세부터 호른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드니 음악원에서 만을 사사했다.  

15세 때부터 빅토리아 교향악단, 시드니 교향악단 주자를 엮임했고 1955년 부터

1968년까지 런던 교향악단의 수석주자로서 활약했다.


1968년 터크웰 목관 5중주단을 조직하고, 독주 및 실내악 방면에서 활약하는 한편

런던 왕립음악대학 교수직을 맞고 있다.

배리 터크웰은 확실한 기교와 명쾌한 음질, 스케일이 큰 연주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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