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허밍 코러스

원평재 2006. 9. 3. 17:36
16919 

빈포 초등학교 총 동문회 주소록에도 이제 e-메일 주소가 실렸다.

물론 아직 주소가 없는 사람 투성이었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박 교수에게 뜻밖에도 뉴저지에 있는 면도사 정옥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박 교수님 전 상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미국으로 간 면도사 정옥이라요.

10년전 그때 제가 삼각지의 "건강 휴식 이용원"의 정 원장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마침내 흑인 토미와 국제 결혼해서 떠날 때까지 참 많이

도와 주셨지요.

서류 준비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위로를 주셔서 그 은혜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삼각지 로오타리에 구즌비는 오오느은데에---."

제가 떠나기 얼마전 저를 환송해주신다면서 거기 원조 동태국 집에서

소주를 한잔 하시고 배호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주시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제가 잘 있다는 소식은 그나마 정원장을 통하여서 듣고 계시겠지요.

제가 최근 두어차례 정 원장에게 잘 있다는 편지를 썼는데 딱 한번 답신이

오면서 자기는 마누라 영숙이 눈치가 보이니 편지를 보내지 말고 필요

하다면 앞으로는 박교수님에게 연락을 하라더군요.

이해는 되면서도 괘씸도 했는데 앞으로는 정원장에게 별로 연락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한민족 잘살기 기금도 내주고 때가 되면 그와 나 사이에 태어난

자식도 찾아보겠다고 동의했으니 그만해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유감은 없지요.

 

오늘 박 교수님께 이렇게 인터넷 메일을 허락도 없이 보내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선 저도 이제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렇게 글을 쓸수 있다는 사실을

박 교수님께 자랑하고 싶은 것이고요,

또 하나는 부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부담이 되는 부탁은 아닐 것입니다만 우선 부탁을 하게된 경과를 조금

설명 드려야겠습니다.

저는 토미와 이혼을 하고 얼마전에 탈북자 김씨와 재혼을 하였지요.

그 일도 정 원장에게 편지로 알린 바가 있습니다.

뉴저지 레오니아라는 동네에서 가게와 살림집을 함께하는 저희 부부는

인근 한인 사회에서 잉꼬 부부로 불릴만큼 해피하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바버 샵, 그러니까 이발소를 하고있고 저는 그 옆에 네일 샵을

차렸는데 비즈니스도 곧잘 되고 또 위탁 양육하는 딸 아이도 하나 있어서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심리적 안정을 찾고있던 김씨가 최근에 또 불안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나마 다행하게  며칠 전부터는 다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제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김씨가 중국 조선족 자치주 연변을 통하여서 탈북을 하면서 겪은 고초와

위기는 제가 정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썼습니다만 하여간 그 과정에서

심한 정신적 불안감을 병으로 얻고 오래 앓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저와 만나서 외로운 사람들끼리 차츰 정을 느끼게 되고 또 연방

정부로부터 영주권도 얻으면서 불안증은 많이 해소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없는 돈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이를 위탁 양육하고자 한

동기도 김씨의 정서불안정 해소와 많은 관련이 있지요.

그는 함께 탈출했다가 붙들린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북한 수용소에 두고

다시 혼자 탈북을 한 사람이 아닙니까.

상당한 기간동안 김씨는 이런 일로 우울증을 겪었으나 여기에서 아이를

하나 위탁 양육하면서 많이 회복이 되었었지요. 

 

그런데 최근 김씨는 다시 잠을 자면서 심한 잠꼬대를 하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그게 또 김씨의 정서불안정 증세가 재발한 신호인 것을 아는 저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와 대화를 깊이 나누면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캐어보고 또

심리 치료사와의 상담도 주선하여 주었습니다.

 

요즈음 그가 잠을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이유는 추석이 닥아오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랍니다.

그동안 가슴을 져며온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보니 이제는 병들어 누워계시는 팔십 노부모를 내버리다시피

하고 탈북했던 처절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면서 가슴을 내리누른다는 것

입니다.

물론 두 분은 결국 다 돌아가셨는데 이 분들이 요즈음 꿈에 나타나셔서

차례와 제사를 지내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세차~"하며 초혼을 해달라고 꿈속에서 애걸복걸 하신다는 것입니다.

 

박 교수님,

여기까지 읽으시고는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드시겠지요.

첫째는 유물론 공산 독재 체재에서 살았던 사람이 무슨 추석 타령에 조상

숭배냐 하실 것이고 두번째로는 이제 한인 교회에 다니며 여호와 유일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또한 무슨 해괴한 망상이냐고 탓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물론 김씨를 처음에는 그렇게 다잡아 보았지요.

세상에, 공산 독재에서 살았던 사람이 무슨 조상 숭배며 제사며 차례냐고

따졌더니 유일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던지 어쨌던지 북한 땅에서도

특히 추석 같은 명절날 조상 숭배는 유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정책도 때로는 왔다갔다 했지만 북한이 최근에 경제적 재앙을

만나기 전까지는 조상 공경을 위한 명절지내기가 아름다운 전통으로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아니, 유물론 사회라면서 유세차~도 했다는 말씀이오?"

제가 물었지요.

물론 그런 격식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어릴때 듣던 그 가락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생생하니 이제 자유의 나라, 유심론의 미국에서 살며 한번만

이라도 좋으니 초혼을 해서 차례와 제사의 의식을 갖어보아야 마음이

편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번에 그쳐도 좋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을 귀신이라고 여기던 아니던 하여간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유세차~"를 남 눈치 보지않고 부르짖으면 속이 탁 트이겠다는 것입니다.

 

"유우세차아~"

요즈음 그는 혼자서 우물우물 그러고 다닙니다.

길을 걷다보면 유난히 많은 미국 사람들이 혼자 말을 하며 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모두들 가볍게, 혹은 조금 심하게 정신병을 앓고 있음에 다름 아니겠지요.

이 양반이 그러는 것도 아직 심하지는 않지만 본격적인 정신 질환의

시초쯤 된다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곤두섭니다.

제가 요즈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다니니 성가대의 여성 지휘자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규모의 한인 교회인데 노래하는

사람이 적다보니 저도 성가대의 한 사람으로 봉사를 하고 있지요.

 

여성 지휘자께서는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다는 "예닮 소년 소녀

합창단"의 단원이었다고 합니다.

"Yedarm Korean Boys and Girls' Choire"라고 하면 발족 당시부터

한국 전쟁 이후의 폐허에서 나타난 어린 천사들의 목소리 쯤으로 여겨지며

특히 미국 중산층 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는군요.

 

"예닮 합창단이라면 예수님을 닮자라는 뜻의 기독교 계통이었나요?"

제가 물었지요.

"그런건 아니었구요. 저희보다 늦게였지만 성인 코러스에 예그린 합창단이

있었듯이 우리의 옛 정서를 닮고 계승하자라는 뜻이 강한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한복 입고 북치고 장구도 치고 전통 춤도 추고 그리고 동서양의

노래를 모두 아주 잘했답니다.

그래도 이름을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계시면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지요."

모두 그 여성 지휘자의 설명이었습니다.

 

합창단 이야기가 좀 길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이해하고 들어주십시오, 박교수님.

 

"그때 KBS 어린이 합창단에다가 또 기억이 아리까리한 여러 청소년

합창단들이 방송과 TV를 탔고, 나라 밖에서 더 이름을 드날렸잖아요?"

제 물음이었습니다.

"아, 물론이지요. 대단한 유소년 합창단, 청년 합창단들이 많았지요. 그때

날린 소년 소녀들이 지금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세계적 성악가들로 활동을

하고 인정을 받고 있잖아요. 저는 중간에서 전공을 바꾸어 요모양이지만요,

호호호."

세상에!

요모양이라니요.

우리 지휘자 선생님은 예닮 소년 소녀 합창단에서 오래 맹활동을 하다가

국내 대학에서는 자연과학을 전공하였고, 마침내 미국에서는 무어라더라

동부의 저명한 대학에서 MBA를 하였답니다.

 

그 이름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대단한 미국 사람과 인연이 되어

국제 결혼을 하고 지금은 뉴욕의 어떤 화장품 회사 임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맹렬여성께서는 성가대 지휘도 참으로 열정적으로 합니다.

또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집중 신호를 보내면

단원들은 모두 그녀의 큰 눈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립니다.

하지만 사실 더 대단한 것은 단원들의 마음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제 고민을 놓칠리가 없었지요.

 

"미세스 김, 요즈음 마음에 큰 고민 들어계시지요?"

그녀의 우리말은 조금 영어스럽습니다.

영어는 물론 빼어나게 잘 하지요.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니까 또 물었습니다.

"부군이신 김 선생님 모습도 요즈음 안계십니다---."

"아, 김씨는 조선족 개척 교회 쪽으로 자주 나갑니다."

"부부간에 무슨 트러블 계십니까?"

그녀의 자상한 관심에 제가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오우, 그거 음악 치료합시다. 유~세차~~, 그걸 절대음정으로 김선생이

가슴에 묻고, 또 청각에 발랐네요.

한번 뇌리에 굳어버린 절대음정은 심리 치료만으로는 털어내기 어려워요.

아예 음악으로 씻어내야해요."

 

그녀는 성가대 중에서도 조금 시간이 있는 발런티어들, 그러니까

자원자들을 모았답니다.

절대음감을 갖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도 기꺼이 동참하셨습니다.

기악이나 성악이나 기본 음정을 맞추는 키 노트가 있는데 그게 "라"입니다.

도래미파솔라시도의 "라" 음계 말입니다.

합창을 할 때에는 대원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슬쩍 "피치 파이프"라고하는

일종의 피리를 불어줍니다.

그때 맞추는 음계가  "라" 입니다.

CDEFGABC로 보면 A가 "라"입니다. 그래서 업사이드 다운 에이,

뒤집어진 A 모양의 쇠를 울려서 음계를 맞추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 성가대에는 다행히 아까 말씀드린 절대음감의 할머니가 계시기에

그 분이 키 노트로 "라" 음정을 잡습니다.

그분이 피치파이프 대신에 "라"하시면 파트 별로 목청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이제 그 분까지 자원하여 참여하셨으니 여섯명으로 급히 만들어진 아카펠라

합창단은 신명이 났습니다.

 

아, 박 교수님.

잘 아시겠지만 아카펠라는 기악의 반주가 없이 인간의 청아한 목소리 만으로

화성과 대위를 극대화한 성악이 아닙니까.

모두 저희 성가대 지휘자로부터 제가 배운 풍월입니다.

저는 또 따로 여기 뉴저지 커뮤니티 칼리지의 평생 교육원에서 성악과정을

공부하고도 있습니다.

공부는 제 평생의 한이자 원입니다.

어쨌든 지휘자 선생님에 따르면 아카펠라 성악곡은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닿게하는 사닥다리라고 합니다.

아카펠라 합창에서 가사를 뺀 것이 허밍 코러스입니다.

또한 아카펠라에서 청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 마드리갈이라고

하여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이미 마드리갈 합창단이 있었다는군요.

이런걸 하나도 모르고 면도나 밀며 지낸게 제 청춘시절이었습니다.

 

"자, 우리 이제 푸치니의 나비 부인, 제2막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로 목소리

뭉칩니다. 보면대에 파트별로 악보도 다 얹어두었어요."

아, 언제 이런 준비를 다 하셨을까.

정말 이렇게 대단한 분이 우리 지휘자이십니다.

저는 메쪼 소프라노까지 밖에 못 올라갑니다.

그래도 음색이 좋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어? 지휘자 선생님. 이게 뭡니까?"

"음 음음 음음음 음음음" 이렇게 시작한 원래의 허밍 중간에 갑자기

"유~세차~"하는 가사가 문득 나타난 것입니다.

"아, 그게 바로 음악치료의 묘약입니다. 바리톤 파트에서 구성지게 한번

뽑아주세요. 그 다음 음 음 음음음 음음음, 유~세차~, 이번엔 앨토 파트!

아예 유~세차~ 학생부군~까지 넣어줍시다. 김선생의 귀에 아니 가슴에

쟁쟁한 그 목소리, 그걸 우리가 허밍 코러스 중간에 넣어서 원없이 불러

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반 가슴에 맺힌 앙금이 막 씻겨내려갈 것입니다."

 

영혼과 음악의 관계를 저는 더 이상 이야기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 눈에서는 그냥 눈물이 흘러내릴 따름이었습니다.

"제가 예닮 소년 소녀 합창단 때에는 가톨릭 전례음악도 많이 했어요.

반주가 없는 그레고리안 챈트를 부르며 우리는 인간의 음성이 천상에 닿는

느낌을 체험했었지요. 공자님도 인간사의 의식 가운데에서 예악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제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지휘자 선생님이 음악 치료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두 주일 후에 우리는 예배 후의 친교의 시간에 비종교적 행사임을 미리 

전제하고 허밍 코러스의 시간을 갖였습니다.

김씨 양반도 이날은 우리 교회로 왔습니다.

던킨 도너츠와 갓 구운 쿠키와 뜨거운 에스프레소 커피 잔을 들고 서있던

이 양반의 등 뒤에서 우리 여섯명 아카펠라 단원들은 허밍 코러스를

불렀습니다.

음악의 중간에 자연스레 삽입되고 이어지는 "유~세차~" 부분을 듣더니

이 양반은 흠칠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하지만 곧 "유 세차~학생 부군~"하는 삽입구가 또다시 나오니 이윽고

그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져나가더군요.

친교의 자리에 나와있던 다른 교우들도 이 아름다운 허밍에 귀를 기우리더니

이윽고 고국을 떠날때 두고 잊었던 우리말 가락이 섞여나오자 깊은 흥미를

갖고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섞인 우리 말은 단순한 노래 가락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미리

양해를 구해 둔 바 있었지요.

 

그 날 이래로 김씨는 허밍 코러스를 하루 종일 흥얼거리며 일을 합니다.

"유~세차~"라는 우리말 가락은 넣기도하고 빼기도 하지만 손님들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그저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라고

아는체 하는 사람, 혹은 그냥 콧노래로 따라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레오니아가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닙니까---.

 

박 교수님,

추석이 닥아오고 있습니다.

혹시 전통가례의 수준에서 추석 명절 차례의 순서를 간략하게 알려주시고

또 "유세차"도 전문을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게 제 부탁입니다.

그런 제례의식이 제가 선택한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일이야 있겠습니까.

그저 두고 온, 혹은 잊고 온 앨범을 다시 뒤적이고 싶은 심정으로, 그리고

또 김씨의 병세 여하에 따라서 필요할지도 모를 구급약을 상비한다는

느낌으로 부탁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 처지에서 박교수님을 미국으로 방문하시도록 초청할 입장도 되지 못하고

지난 일에 대한 보은은 커녕, 마냥 부탁만 들여서 죄송합니다.

 

다가오는 추석 차례, 잘 쇠시기 바랍니다.

 

뉴저지, 레오니아에서

빈포 초등학교 후배 정옥 드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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