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실종 이후

원평재 2006. 9. 19. 21:30

 

가을은 결혼 시즌이다.

재경 빈포 초등학교 동기들의 가정에도 혼사의 계절이 찾아왔다.

더우기 이들이 50대 전후의 가장들이다보니 대체로 자녀들을 처음

성혼 시키는, 개혼의 입장이어서 혼주나 하객들의 감상이 여간 아니었다.

도회지 출신의 사람들이라면 아직 며느리나 사위를 볼 나이는 아니련만

아무래도 시골 출신들이다보니 일찍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일찍 본

집안이 많았다.

 

이미 지난 봄에 딸을 출가시킨 집이 있었고 가을이 되자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남광호라는 친구가 아들을 장가 들인다는 청첩장을 돌려서

며느리를 보는 첫번째 가정이 되었다.

총무를 맡아하는 여반 출신의 박종말 여사는 바야흐로 신바람이났다.

그녀는 워낙 여반 반장하던 기질대로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항상 사발통문 돌리는데에 입이 근질근질한 성품이었는 데,

최근 서울행이 뜸해진 고향의 법무사 이준호를 불러올릴 기회까지

도래한 셈이어서 더욱 어깨 춤이 절로 났다.

 

돌아다니는 소문으로는 이준호가 박종말이를 예전처럼 그렇게 열심히

찾지 않아서 그녀의 심기가 요즈음 많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긴 두사람의 관계라는 것도 믿거나 말거나의 풍문 수준이기는 하였다.

그 은밀한 남녀 관계를 누가 촌탁이나 하랴.

 

"너들아, 남광호 그 땅부자, 알부자가 카나다 출신의 며느리를 본단다.

아들이 카나다 어학 연수가서 사귄 교포 처녀인데 양가에서 말이 많더니

결국 성사되었단다."

박종말 여사는 몇날 며칠 전화통을 부여안고 연락겸 경과 보고를 늘어

놓았다.

연락의 대상은 재경 동기들 뿐만 아니라 빈포 면내는 물론이고 부산,

진주, 마산, 삼천포에 있는 동기들 까지 모두 포함이 되었다.

아들이 하나뿐인 남광호의 집에서는 며느리를 귀국 시켜야한다는 입장

이었고 카나다의 사돈은 딸을 한국에서 시집살이 시킬 수는 없다는

주장이 크게 맞섰다는 것이었다.

어릴때 이민을 간 처녀가 한국말이 신통치 않다는둥, 예비 사돈이

부동산업을 하는 땅부자라서 사위로부터 상당한 재력을 바란다는 둥,

여러가지 발신처가 불분명한 유비통신도 박종말 여사는 양산해 내고

있었다.

 

결혼식 날이 되자 동기들은 이래저래 군침을 다시며 경향 각지로 부터

모두 몰려들었다.

신랑과 신부는 키가 컸고 이 시대의 젊은이답게 잘 웃었다.

점촉 순서, 그러니까 양초에 불을 붙인 다음 안혼주들이 맞절을 하는

순서에서는 시어머니 자리가 고개를 너무 많이 숙여서 마치 카나다

안사돈에게 꿇리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해외 교포가 이 시대에 무슨 큰 벼슬 자리도 아니고, 아마도

남광호의 착한 부인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난 듯하다는 것이 결혼식이

끝난 후에 나온 박종말 여사의 후한 설명이었다.

사실 그녀는 활동적인 성품이 좀 지나칠 따름이지 마음은 곱고 정이

넘치는 편이었다.

 

한편 결혼식 시간이 토요일 오후 네시라서 어중간하다는 불평도 사전에

돌았으나 알고보니 종교 행사로 의식이 진행 되어 모두 꼼짝못하고

한시간을 식장에서 보내고 나니 때는 바야흐로 저녁 시간이 되었다.

종교 행사는 식장에만 국한되었고 인근 스카이 라운지의 피로연장에는

소주와 맥주가 질펀하게 식탁에 올라와 있었다.

역시 성공한 부동산 업자인 남광호의 원모지략이 돋보였다.

그래도 아직 와인이 오를 수준은 아니었다.

 

이제 황혼이 도시의 스카이 라인에 빗겨들면서 술 마실 분위기는 절정

되었다.

빈포에서 대절 버스 하나로 온 동기들은 아예 자정이 되어서나 떠날

작정이었다.

"너들아, 빨리 식사부터 마쳐라. 노래방이 기다린다. 술과 안주는 여기에서

싸갖고 가기로 다 말이 되어있으니 여기서는 그만 마시고 거기가서 마시자.

또 이바구도 거기가서 하자."

박종말 여사가 이준호 법무사를 힐끗거리며 일행을 채근하였다.

 

"저거봐, 종말이가 준호를 노래방에서 나꿔채갈려고 이리 서두네."

눈치 빠른 여자들 몇이서 수군거렸다.

"맞어, 다들 노래와 술에 취한 사이에 준호를 빼돌리려는 수작이야."

맛갈스런 맞장구가 금방 튀어나왔다.

"박종말 여사! 뭐가 그리 바뻐, 대절 버스는 자정에 떠난다 아이가.

여기서 술 좀 더마시고 이야기하다가 가자.

노래방에서는 시간이 돈 아이가. 또 노래하면 시끄러워서 이바구도

못깐다."

이준호가 예전과 달리 밍기적거리며 반론을 전개하였다.

 

"어라? 준호 태도가 달라졌네. 애인들이 권태기에 빠졌나봐."

여자들의 눈치와 입심이 무서웠다.

"준호가 요새 빈포다방의 마담에게 한 눈 판다더라."

빈포에서 올라온 어떤 여자 동기의 해설이었다.

"그럼 종말이는 인제 종말이 왔나? 종쳤나?"

너털도사라는 초등학교 교감하는 동기가 얼른 끼어들며 한 말이었다.

"야는 남자가 뭐 이리 귀가 밝노. 끼이지 말고 모른체 해라."

화려한 블라우스가 몸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여자 동기가 팔꿈치로

교감을 찔렀다.

 

"지난번 실종되었다가 며칠만에 저수지에서 떠오른 철만이 이야기 좀

해 주꾸마."

준호가 소란한 분위기를 확 잡는 화두를 꺼냈다.

남의 불행이 자신들에게는 맛있는 반찬꺼리가 되는게 세태 아니던가.

동대문에서 포목장사하는 여자 동기가 눈치 빠른 소리를 주변에

속삭여대었다.

"야, 이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만 아무래도 준호 저 친구가

시간을 끌다가 대절 버스 타고 그냥 내려가버릴 모양이네."

"맞다. 동대문 포목 아줌마 눈치가 프로 10단이다."

교감 선생님의 추가 해석이었다.

"와? 근심되나?"

블라우스를 어울리지 않게 입은 아까 그 여사의 말이었다.

"그래, 염려된다. 종말이가 불쌍하네." 교감의 말이었다.

"아이구, 교감 선생님이 별걸 다 걱정이구나. 하하하."

부근의 동기들이 희희낙낙하며 웃었다.

 

"야, 임마들아. 지금 자살한 친구, 철만이의 후문을 이야기 하려는데

웃고있기야?"

이준호가 "인정머리 없는 자들이여, 들으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법무사가 시간을 끌려는게 확실해."

사람들이 묘한 단정을 내리면서도 의자를 그의 옆으로 당겼다.

"지난번 실종 되었던 우리 동기 철만이가 며칠 만에 저수지에 떠오른건

우리가 다 아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지. 결국 자살로 판명이 났고---.

그런데 알고보니 철만이가 그 얼마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신 우리 선배,

우리 빈포 지역에서는 가장 크게 자수성가하신 돌아가신 방정수 선배를

그렇게 못내 애절하게 그리워했다는구나.

두 사람이 잘 드나들던 식당에 철만이는 매일 저녁이면 찾아와서 밥을

꼭 두그릇 시켜놓고 숫가락도 두벌, 술 잔도 두 잔을 늘어 놓은 다음

산 사람하고 마주하듯 밥을 같이 먹는 시늉을 하더라는것이지."

그는 말을 하며 약간 몸을 떨었다.

 

박종말이가 몸까지 떠는 그에게 빨리 끝내라는 신호를 의미있게

보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살을 한 그 저수지는 철만이가 방 선배와 사업 구상을 할 때마다

자주 함께 산책을 다닌곳이라는데 하여간 그 선배가 작고를 한 후에는

철만이 혼자서 그 곳으로 하염없이 자주 갔다는구만.

물론 방 선배가 작고하시고 나니까 큰 프로젝트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서

그가 타격이 큰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인생무상을 자주

뇌까리더라는 것이야. 주위에서 들은 사람들이 많아---."

 

"갖고 있던 빌딩의 지하 술집 문제로 조폭들과 다툼도 있었다면서?"

누가 물었다.

"그것도 힘이 센 방 선배가 계셨으면 걱정할 일이 아니었을거야.

최근에는 또 어떤 여자가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철만이가 자살하기

얼마 전에 마음이 넓은 좋은 여자를 하나 소개해 달라더라는거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나 나눌 그런 여자를 말이야."

"아니 그런 말을 자네한테 전한 그 여자는 누군데?"

누가 또 물었다.

"아, 나에게는 업무차---, 세금 상담차 찾아온 여자야."

"다방하는?"

교감 선생님이 얼른 다그쳐 물었으나 그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진도만 나갔다.

 

"자아, 내 말만 들어봐, 그런데 엊그제 그 저수지에서 대형 사고가

또 일어난거야."

그는 좌중의 시선을 다시한번 모으며 침을 꿀걱 삼킨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곳에서 우리 동네 다섯 손가락에 드는 부자라고 하는 천삼수 후배가

죽었어."

"뭐라구?"

재경동기들이 모두 놀라는 소리를 냈다.

심지어 빈포에서 온 동기들 중에도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천삼수 후배는 철만이가 죽었을 때 장의 위원장도 할만큼 그와 가까웠고

무척이나 애통해 했었지.

그런데 이 천삼수라는 후배가 동네에서 식당하는 예쁜 여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는구만.

그러면서 돈을 좀 빌려준 모양인데 최근에 이 돈을 갚지 않는다고 그

여자를 윽박지르고 심지어 몇날 며칠씩 때리기도 했다는거야."

 

"나쁜 놈이네, 여자를 때리다니---."

여반 동기들이 입을 모아 고인을 욕했다.

"하여간 매질과 공갈협박에 못견딘 여자가 자기 차에 천삼수를 태우고

저수지 근처로 갔다가 그냥 물 속으로 돌진했다는거야.

마지막 순간에 이 여자는 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는데 도어에 옷이 걸려서

뇌사 상태가 되었고 천 후배는 그냥 골로 갔다는거야.

바로 엊그제였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철만이가 자살한지 49제 되는

날이라던가, 그렇지 아마---."

 

"아하, 희안하다. 그런걸 주당 씌었다고 하는거야."

서울 사는 어떤 여자 동기가 적절한 말을 안다는듯이 대꾸하였다.

"주당이 뭔가하면 귀신이 씌었다는 이야기야.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데 때로 평소에 아주 가까웠던 사람이나

반대로 원한이 맺힌 사람을 저승으로 가면서 함께 데려가는거라네.

예전에 그 저수지에 엿장사가 빠져 죽었는데 가까운 사람들이 밤이면

엿장사 가위 소리를 듣고 그리로 따라 들어가서 여럿이 죽었다는거야.

요새 무슨 빙의라는 소설책도나왔잖아. 주당도 그 빙의 같은 말이야."

평소 유식하다는 평을 받는 어떤 여자 동기의 적절한 설명이었다.

 

"자아, 여기 평소 천삼수 후배하고 가까웠던 사람있으면 손들어봐.

조심하라는 뜻이야."

이준호가 좌중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마침 신발 수출입을 컨테이너로 크게 하는 박청수 사장이 늦게야

나타났다.

"어, 돈많은 박사장. 사업이 항상 바쁘니 이제 나타났구만. 자네 우리

고향 마을의 천삼수 후배 알어?"

이준호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였다.

"아, 잘 알다마다. 내가 그 녀석하고 아주 친하게 지내지. 고향 마을에서

돈께나 만지고 방구께나 뀌는 성공한 후배 놈이잖아."

 

박청수가 말려들자 분위기가 조금 술렁거렸다.

누가 급한 김에 얼른 사정을 설명하였다.

"야, 굿이라도 한판해라. 너 큰일났다. 귀신이 부르겠어. 조심하거라."

여러 사람들이 그런 식의 이야기를 불쑥 불쑥하였다.

 

그러나 한때 돈만 알고 여자만 밝힌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조용한 미소를 짓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 그렇게 호락호락 저승 갈 수가 없어. 내가 요즈음 양로원 하나를

지원하고 있데이. 오갈데 없는 무의탁 양로원의 그 분들 두 눈 다 감기기

전에는 염라대왕이 날 부르지 않을거야.

내가 예전의 박 아무개가 아니야.

돈 벌면 뭐하노. 잘 써야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분들은 아직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변을 당하신 것 같네. 난 마음 다 비웠데이.

얼마전에 우리 동기, 시청 공무원하며 손재주가 좋아서 목각하던 친구가

저 세상으로 갔잖아. 그 때 충격이 엄청컸데이. 

그때부터 내가 마음을 바꿨데이. 그 친구는 돈 한푼 없이 살다가 깨끗이

청산으로 돌아갔잖아. 

그 이후에 나는 갖고 있던 농장도 양로원에 기증했어.

그 농장에서 오늘 내가 키우던 염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세마리더라.

원래 한 마리 정도라야 순산이 되는데 셋이니까 다 죽게 생겼어.

내가 죽을 고생을 하여서 두마리를 건졌다.

지금 내가 두 생명을 건지고 오는 길이야.

그런 내가 황천길로 가겠나?

누가 아까 나보고 오래 살려면 떡해놓고 굿판 벌리라 했지.

거기 드는 돈 갖고 나는 양로원으로 갈끼다."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하였고 하객들의 분위기도 숙연, 그

자체였다.

그런 와중에도 이준호 법무사는 역시 만고의 영웅이었다.

종이 컵에다가 소주를 가득 부어들고 그가 건배 제의를 하였다.

"여러분, 한잔 해야지. 잔치 집에서는 얼그리 취해야 예법에 맞능기라.

우리가 모두 축하하러 여기 왔잖아.

새로 출발하는 한쌍을 위하여 내가 축배!라고 건배사를 외치면

여러분들은 세번을 연호하며 화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건배!"

그가 소리치자 하객들은 "건배! 건배! 건배!라고 열창하였다.

종말이도 에라 모르겠다는듯이 소주를 한 컵 가득 털어넣었고

건배사가 퇴마록인듯 잔치집 피로연회장에는 다시 활기가 돌았다.

 

(이번 이야기 끝)

 

이전에 올린 "빈포 시리즈" 중에서 "실종"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속편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