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학 산책

(문학 기행 2) 개심사---

원평재 2008. 10. 30. 22:11

문예지, <문학과 의식>에서 주최한 가을 문학 기행의 전반부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의 "필경사" 방문이었다면 후반부는 개심사, 해미읍성, 마애 삼존 불상.

보원사지로 연결 되었다가 간월도에서 비내리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굴밥을 먹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소설가 정소성 교수와 함께---.

 

  

개심사는 요란하지 않은 백제 양식의 절집으로 의자왕 때에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한번 중수되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성종 6년에 소실된 것을

15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다.

과연 듣던대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물길이 좋은 절 앞의

계곡과 시내와 다리, 가지가 찢어지게 달린 붉은 열매가 달린 감나무, 등등이

천년 후에 찾은 게으른 문학도를 다정하게 맞아준다.

 

이 절집이 전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가 유홍종 교수가 쓴 책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지금 개심사를 예찬한 유교수의 주장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생각컨데,

요란하지 않은 절집의 자태와 더불어, 특히 배흘림을 한 소나무 기둥들이

인공으로 깎은 것이 아니고 자연의 미학을 그대로 쓴 점,등등이 그 양반의 눈에

들었던가 싶다.

 

배흘림은 절집 건물을 반듯하게 보이게 하기위하여 기둥의 중간을 조금 불룩하게

다듬는 기술을 말하는데 이곳 건물들은 그냥 소나무의 원형을 써서 위아래는

가늘게, 가운데는 불룩하게 해 둔 것이 문외한의 눈에도 뚜렷이 들어왔다.

 

선조들의 내력이 그러했듯 항상 반골 기질이 셌던 유 교수는 그러니까 시세를

타는 이름난 절집 보다는 호젓한 곳에 조용히 외면 당하며 지내온 백제 절집이

더욱 마음에 찼던 모양 같다.

물론 전문가로서의 그분의 분별력 이런 감성에 더하였겠지만---.

다만 지난 정권의 말기부터는 너무 용비어천가를 부른다고 뜻있는 이들의 험담을

듣기 시작하더니 숭례문이 불타면서 책임을 온통 뒤덮어 쓰고 표표히 낙향한 것은

인생무상을 느끼게한다.

 

물론 이런 말을 개심사 현장에서는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문득

글로 토로하게 되니 글쟁이의 꼬라지가 어디로가랴---.

 

이번 문학기행은 두번에 걸쳐 올리고자 하였으나 사진이 들어가니 또 길어진다.

한번만 더 늘여나가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