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팩션 스토리

가면 속의 아리아

원평재 2011. 2. 14. 00:51

여름 햇살이 강렬해 지면서 산에 오는 여인들의 모습에도
심한 변화의 물결이 격랑처럼 찾아왔다.

햇살이 강하면 나는 왜 세상의 온갖 소리가 일순에 그 빛살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일순 정적이 오는 것으로 느낄까---.

"에이 그건 나이 탓이지요---."
의사가 이런 진단을 내린다면 그는 돌팔이거나 삼류일 것이고
빛과 음향의 파동 원리를 들이대며 그 현상을 이치로 분석하는 과학자가
있다면,
아무리 그가 유명할 지라도 스웨덴 한림원에서 연설할 기회는 없으리라.

그들에게는 현실계만 있고 상상력이 결핌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현실의 세계를 흡입하는 상상계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여러해 전,
이집트의 "왕가의 계곡"을 갔다온 이래 나는 강한 햇살이 음향을 흡음해
버리고 마는
신비계를 체험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아, 물론 정신분석의는 나에게 다가오지 말지어다.

저 거대하게 펼쳐진 왕가의 계곡이 뜨거운 햇살에 달구어질 무렵부터
현실계의 모든 것, 만물은 영원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법석대던 관광객들도 일순 음성을 잊고 잃는다.

나는 몇달전 초 봄에 저 말썽 많았던 어떤 신도시의 촘촘히 벌집같은
주상 복합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주말이면 인근 야산을 먼저 이사 온 중등학교 동기들과 오르기
시작하였는데
한 여름이 오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묵음과 묵언의 현상을
다시 겪기 시작하였다.

하긴 그 사이에는 건강을 위하여 도심의 피트네스 센터나 다니면서
햇볕과는 담을 쌓고 있기도 했었다.
하지만 여기 신도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햇볕을 맞으며 열심히
산을 다녔다.
자연친화적 건강관리인 셈이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여름 더위와 햇볕이 맹위를 떨치면서
여인들의 복장과 행색에 변화의 격랑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선 캡"을 깁숙히 내려쓰는 정도는 이제 유니폼 같은 필수장비였고
팔뚝에도 타월을 감거나 겨울 옷으로 보신을 하는등,
모두들 햇볕 정책에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는 모습이었다.

"어? 미이라?"
어떤 여인은 붕대 같은 것으로 얼굴과 목과 팔을 칭칭 동여매고
나왔다.
진한 선 글래스를 쓴 모습이 정말 미이라 같았다.
움직이는 미이라도 영화에서 많이 보았거늘---,
그래서인지 끔직한 장면이 도무지 어색하지 않았다.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산행 패션에는 새로운 물결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면 쓴 여인들의 출몰이었다.
"가면 속의 아리아"에 나온 것과 꼭같은 그 마스크를 쓴 여인들의
등장이었다.
상혼이라니---, 그래도 예술적 상혼인가.

산속이라고 여인들의 모습에 사내들의 관심이 없으란법 없지.
초여름의 그 요염한 양볼, 지적인 이마, 이지의 눈매,
유혹의 입시울들은 일순 사라지고,
마침내 가면들이 산록을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팬텀들이 일렁이는 산골길---.

어느날 그 가면중의 하나가 나를 툭 쳤다.
흰 가면이 압도적인 추세에서 이 충동적 가면은 핑크색이었다.

"어, 성자(聖子)구나!"
아래 위, 두 쪽으로 된 가면의 윗부분이 들리면서 주름이 좀 심한
여성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그 이름도 거룩한" 성자였다.
"그 이름도 거룩한" 이란 대학 다닐 때 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 우리가
붙여준 표제였다.
우리는 대학 동기였는데 누군가가 그녀도 이 신도시에 산다는
이야기를 한적은 있었다.
지방 대학 출신들이 신도시에서 동기회를 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 동네 산다니까 언젠가는 만날줄 알았지만 이건 가면 속의
아리아이네. 극적이야, 우린 항상!"

내가 처음 그녀와 극적인 조우를 한건 시 쓰는 내 친구 하나가
그녀를 짝사랑하여,
그녀의 집 대문 앞이던가 담벼락으로 갔을 때 나를 대동한
사연 탓이었다.
그녀의 가녀린 몸매와 청초한 눈매가 순진한 대학생들의 가슴을
저리게했다.
여럿이서 가슴 뛰고 저려했으나 나는 내 친구의 보호자가 되면서
내 가슴을 속절없이 움켜쥐고 내리 누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실내장식하는 회사에 잠깐 있을 때에 그 곳에 있는 두명의
환쟁이 아티스트들이 그녀를 어떻게 알고,
그 청초한 몸과 눈매를 놓고 전쟁을 벌였는데
그럴 때마다 그 전쟁터 술자리에 나는 함께하였다.
그녀도 이상하게 빠짐없이 나와서 합석으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심판관인척, 대범한척 목에건 휘슬이 부딪치는 내 가슴만
내리 눌렀다.

시를 연습하던 첫번째 내 친구와 성자는 별 진전이 없는 가운데.
이제는 이 두 그림쟁이들이 청초하게 합석한 성자가 보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실제로 격투를 벌였다.
그리고 어느날의 가장 격렬한 격투 끝에 지금은 추상 미술계의
대부가 된 친구가 그녀를 납치하듯 택시에 싣고 사라졌다.

실종되었던 두 사람은 하루 이틀 사이로 따로따로 나에게 나타났다.
사내가 먼져였다.
편의상 K라고 하자.
"잤는데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었네. 내가 미대 다닐 때 깊이 사귄
여자가 지금 다시 나타났거든---. 애를 없고."
수작인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 일이 항상 이렇게 비극적인지 희극적인지 하여간 극적이었다.

"몸 사랑을 정말로 했어?"
'몸 사랑'이란 좀 거룩한 말은 지금 내가 어떤 칼럼니스트로 부터 배운
문자 속이고 실제로는 매우 야한 표현이었으리라.
"그럼! 격렬할 때마다 기침을 쿨럭쿨럭 하더라."
평소에도 그녀는 기침을 곱게 하였었다.
하여간 K도 좀 야하게 말한듯 기억이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런 생생한 표현이었다.

"소리도 질렀어?"
내가 바튼 소리로 물었을 것이다.
"아냐, 기침만---."
그 정도면 거룩하게, 그리고 청초하게 한건가---.
내가 또 침을 꿀꺽 삼켰을 것이다.

그 다음 다음 날은 성자에게서 연락이 와서 또 만났다.
"K한테 책임지울 일은 없어. 난 사실 그전에 이미 어떤 그림쟁이
하고 관계가 깊었었거든. 나이많았던 그 사람이 문득 사라지고 난
자리에 K가 이윽고 나타난 셈이야. 엊그제 밤에도 둘이 그렇게
싸우긴 했지만 난 항상 무심한 편이었어."

불쌍한 놈들---, 무서운 세상에---.
그 때 수준의 내 생각이었다.
그 시대와 내 나이의 수준으로.
지금은?
무심하다.

호텔 커피 숍에서 그녀가 갑자기 크게 울었는데 아무리 상상력이
부족한 나라는 인간이었지만,
이 순간은 바로 어디 조용한 데에서 이 청초한 여인의 울음을
다둑거려야 정상적 스토리라는 생각은 문득 들었다.
예컨데 거기 호텔 방에서.

하지만 나는 상상력도 좀 빠졌지만 순발력은 더 빠져서 우물우물
위로사만 늘어놓고 아마도 혼자서 막걸리 한 사발에 막회를
씹었던 것같다.

입은 무거워서 이 사나이들의 분투하던 모습을 알고있는 존재는
이 글을 쓰는 이날 이때까지 오로지 나 하나,
아니 성자가 또 있구나.

세월이 약이고 성자도 그 후에 시집 잘 갔다는 소식,
미국으로 가서 어떤 연구원과 맺어졌다던가---.
그 때는 최고였다.

"가면 쓰고 나타났구나. 귀국해서 여기에서 산다는 소식은
간접으로 들었다만---."
"나도 네 소식 가끔 듣고 있어. 보고 싶었어, 너만!"
주름진 얼굴에서 눈물인지 땀방울인지가 흘러내렸다.
"아이구 나야 항상 산초 판차에 방자같은 노릇이었지.
네가 눈길이나 주었니. 아차, 그래 항상 넌 날 쳐다봤구나."
"바보!"
가면의 윗두껑이 덜컥 닫혔다.
아니 덜컥이란 소리가 났을리야 없지.

"어이 빨리 안오고 외간 여자와 무슨 짓거리하는 거야.
도와 줄까?"
친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제야 귀가 뻥 뚫리고 주위의 소음이 갑자기 귓전에
생생하였다.

'미니멀 팩션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터 리베, 노이에스 리베  (0) 2011.02.14
납회 등반  (0) 2011.02.14
돈텔 마마  (0) 2011.02.14
성~격 차이  (0) 2011.02.14
루마니아 여자  (0) 201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