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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해설

원평재 2011. 2. 18. 02:23

구약 전도서에서...


 
**세상 만사가 헛되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서 1:2-11***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프랑스 파리는 미국에서 온 "본국이탈자"들로 득시글거렸다.
이들은 주로 참전용사이자 예술에 관심이 많으면서, 본국에서는 현실 부적응증을 겪는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피를 말리던 청년들은 하루 아침에 고국에서 전쟁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경이와 외경은 망각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아니면 과도한 자기 과시자는 이웃으로 부터

곧 '사람 백정"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유럽 특파원의 자격으로 파리에 온 헤밍웨이도 본질적으로는 이들과 같은 동류항의 사람이었다.
전승국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청년들도 "전후파" 즉 "아프레 게르(apres guerre)"의 심사에서는 역시

동질적이었다.
이들을 묶어서 "잃어버린 세대"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기성의 가치를 상실한 세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참전 용사의 연금을 쪼개어서 끊임없는 음주와 성적 환락에 몰두하였다.
하긴 전후 당시에는 달러의 평가절상(dollar appreciation)이 대단하여서 이들의 방종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삶을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샅샅히 그려놓았다.

신문기자이자 戰傷으로 성 불구가 된 "제이크 반즈"는, 역시 첫사랑의 남자를 전쟁중에 이질로

잃고서, 살아 있을 때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했던 사실에 크게 상심하고 있는 "브렛 애슐리"와

정신적인 연인 관계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관계일 뿐이다.
회한과 현실적인 한계 상황 속에서 정서불안정을 겪는 브렛은 제이크와 친구 사이인 로버트 콘과

관계를 맺고, 또 다른 유럽의 귀족들과도 난혼 관계에 빠진다.
동시에 그녀는 마이크 캠벨이라는 영국의 귀족과 약혼 관계를 맺었으나 그도 알콜 중독자에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이 일단의 청년들은 7월이 닥아오자, 모든 기성의 가치는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는 아직 설정되지

않은 전후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일대 탈출을 시도하여, 스페인에서 7월 초에 열리는 "성 페르민"

대축제를 향하여 출발한다.
도중에 제이크는 아직도 심신이 건강한 친구 "빌 고튼"을 만나서 정신적으로 위안을 받고 함께

송어낙시를 하면서 육체적으로도 꽤 많이 회복된다.
그러나 시인 엘리엇이 비슷한 시대에 당대를 빗대어서 "황무지"로 보면서 같은 제목의 시를 쓰고

그 속에서는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생식 불능에 바지자 동물의 피를 남근에 바름으로써 생식기능이

회복 되었지만, 그것은 시적 상징의 세계이고 현실은 동떨어진 상황일 뿐이다.

성 페르민 축제, 즉 투우 축제가 열리는 팜플로나에서 브렛은 멋진 젊은 투우사 로메로를 유혹하여

즐겁고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Pedro Romero was great!"이라는 묘사는 "wonderful"의 차원을 넘어서 의미심장하다.
여기에 로버트 콘이 나타나서 브렛에 대한 기득권을 천박하게 들먹이며 좌충우돌하다가 로메로를

두들겨 패서 초죽음을 만든다.
마침내 빛나던 축제도 끝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공황감 뿐이다.
브렛은 일찌감치 로메로와 함께 마드리드로 내뺐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일상으로 돌아가야할 때가 되었다.
브렛은 젊은 투우사를 더이상 타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가 떠나도록 풀어주고 제이크에게

빨리 돈을 갖고 와서 자신도 구해달라고 전문을 친다.
제이크는 돈을 치루고 두 사람은 마드리드의 호텔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기차 역으로 향했다.

브렛이 말했다.
"오, 제이크. 우리가 함께 지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제이크의 대답은 가정법 과거, 즉 현재 사실의 반대에 해당된다.
그에게 있어서의 현상타개책은 가정법의 범주내에서일 뿐이다.

소설은 이 가정법의 대화로 끝이난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가 발표되자 유럽의 문학계는 들끓었다.
첫번째 반응은 엘리엇의 "황무지"에 버금가는 산문작품이라는 칭찬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과 자신을 착각한 본국이탈자들이 작가를 혼내주겠다고 쫓아다닌 일이었다.
이 두번째 반응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한 해프닝에 다름아니었으나 누가 누굴

탓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작가는 시대정신을 좇거나 이끌어 나아가고 그 속에 사람들은 자신의 속성을 이입해 볼

수 있으나, 등장인물과 자신을 곧바로 이중인화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데자뷔, 즉 기시감(旣示感)은 문학의 기교이기도 하지않은가---.
그러나, 그러나 누가 누굴 탓하랴---.

이제 작품을 분석해 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구약 전도서에 나오는 일절이다.
또한 제목 다음의 소위 제사(題詞) 부분에는 전도서의 허무의 구절을 제시해 놓았다.
구약 전도서에는 허무(vanity)라는 어휘가 36번 정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바로 허무를 강조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사실 당시 서구의 분위기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어떤 종교의 경전이라도 허무를 강조하고 그것으로 시종하는 것은 말이되지 않는다.
더우기 전도서에서는 재물과 부귀와 명예와 심지어 학문도 허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전할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에 내재한 허무를 깊이 상고하여서,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의 서두에서도 말하였듯이 이제 우리에게도 월드 컵이라고하는 민족적 대 축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하고 있다.
4강에서의 장렬한 패배의 시점부터 허무와 공황감은 우리의 가슴에 물밀듯 밀려들지 모른다.
정치적으로도 대통령의 아들 둘이 영어의 몸이 되었고 집권당은 지금 참담한 패배의 늪에

빠져있다.
이러한 선택을 한 국민들의 가슴은 이 보다 더 참혹스럽다.
경제도 우리나름의 반짝 경기는 몰라도, 월 스트리트에서 들려오는 불확실한 나팔소리는 점점

크게 닥아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작품을 상기해 보는 것은 꼭 불온한 정황에 따른 불안한 비명인 것 만은

아니다.
7월에 들어서면 스페인에서는 앞에서 말한 "성 페르민"축제, 즉 투우 축제가 열린다.
투우경기라면 "bull"이 날뛰는 마당이고 증시에서는 "bull market"이라고 하면 활황증시를

나타낸다(반대는 bear market).

힘이 솟을 때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탕진하지 말고 잘 모아서 이어 닥칠지 모르는 공황감에

대비해야 할 일이겠다.
내일도 "해는 또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