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등단한 친구를 찾아서

원평재 2012. 3. 22. 10:47

 

얼마전 고국에서 시인으로 등단한 학우를 뉴욕주 북부, 포킵시(Poughkeepsie)

자택에서 만났다.

포킵시는 맨해튼에서 두시간이 조금 못미치는 곳으로 허드슨 강 상류에 있는 아담한 도시이다.

친구의 집은 그곳에서 차로 대략 20분쯤 더 들어간다.

포킵시 근처에는 모홍크라는 절경이 있어서 여러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친구의 집으로는 이번이 세번째인가 싶다.

 

 

포킵시는 인디언 말로 "우뿌끼 이피 싱"에서 "푸킵 싱" 마침내 "포킵시"로 발음이 변천해 왔는데

"갈대밭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 혹은 "폭포"라는 뜻이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내용 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긴 기차역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다.

Poughkeesie~~~. 

 

이 친구 집으로의 첫 방문과 두번째 방문은 모두 맨해튼의 유니언 역에서 기차(메트로 노쓰)를

타고 허드슨 강변을 아슬아슬하게 내다보며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씩 하였다.

 

세번째는 뉴저지의 친구 둘과 그 가족들까지 어울려 여름 어느날 밴을 타고가서 그의 안내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저택과 부호 밴더빌트의 사저 (모두 박물관으로 변신), 그리고 모홍크

유원지 등을 찾아다니며 보냈는데, 그때 함께 간 친구 중의 하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포킵시 기차역

 

 

아침에 집을 나설때는 안개가 시야를 가릴 지경이었다.

꼭대기 마다 웅크리고 있는 저 구식 물통들이

무슨 의미소 역할을 하는듯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인과 포킵시에서 만난건 이번이 네번째인가 보다.

뉴저지에서는 한두번 더 만난적이 있다.

그래도 오년만이라니 세월이 무상하다.

 

한국에서 등단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만나자는 그와의 약속대로

이번에는 기차가 아니고 승용차로 드라이브하여 달려갔다.

통행료가 최근에 또 큰 폭으로 올라 더욱 악명 높은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며  

12불을 건넸다.

매일 맨해튼으로 통근하는 사람들의 통행료 절약 방법은 거의 레전드나 무용담

수준이 되어있다.

 

 

효자보다 더 낫다는 GPS의 안내로 다리를 건너 복잡한 맨해튼과 브롱스를 빠져나오니

지체하지 않고 친구의 집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오늘은 한국에서의 행사에 참석지 못하여서 미안했던 마음 가운데 조촐한 축하 오찬이라도

마련하고 싶었다. 

 

우리는 얼싸안았다.

오년의 세월이 그 서슬에 펄쩍 물러나면서 주름살을 흔적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얼굴이 나보다는 훨씬 깨끗하였다.

부인도 여전한 모습이었다.

 

"뭘 그렇게 빨리다녀왔어? 일주일도 안 있었지?"

"아니야, 열흘간이었어. 그런데 처음 나흘간은 잠실의 부흥회에 새벽까지 다니느라

일절 연락을 끊었지."

 

듣고보니 의대를 나온 어떤 동기와 평소 연락이 있던차, 이번 어떤 개척교회의 

부흥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그로부터 받았는데 은혜롭게도 날짜가 엇비슷,

두가지 행사가 연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동기는 닥터이면서 지금은 목회자이다.

공대를 나온 이 시인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다시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바 있다.

신인상 수상식이 있던 곳은 또 마침 강남 삼성병원 건너편이어서 잠시 또다른 동기의

작고하신 자당 영전에 상문할 기회도 마련되더라고 한다. 

 

우리는 전과 달리 문학 이야기는 접어두고 세상 이야기나 나누었다.

수상 기념패가 있어서 사진 한 컷하였고 또 내가 갖고간 문학회의 문예지를

전해 주는 것으로 대략 통과의례를 마쳤다.

전에 그가 전화로 이쪽 저쪽 문예지에 낸 시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하고 이어 근처에 있는 워킹 브리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

오늘의 전체 일정이었다.

요즈음은 하루에 꼭 한가지 이상의 작정은 말아야한다.

하루 전날까지 봄비가 굼질거리고 아침까지 안개가 자욱하더니 우리가 나들이를

할 때 쯤에는 구름한 점 없는 화창한 봄날씨가 전개 되는게 아닌가.

 

"친구가 좋은 날씨를 몰고 왔어."

그가 내게 덕담을 건넸다.

"아니지, 성 목사의 기도 덕분일쎄."

토요일 하루 낮이 참으로 은혜 가운데에 흘러갔다.

 

 멀리 "포킵시 다리"(혹은 루즈벨트 다리, 미드 허드슨 다리)와 "보행자 다리"가 보이는

전망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나누었다.

 허드슨 강변을 지나는 기차가 화차를 100량 쯤 달고 느릿느릿 지나갔다.

 

 

마침 오늘이 세인트 패트릭 데이라서 나는 아일랜드 식의 콘비프 요리를 시켰고,

시인은 웰빙 메뉴를 선택하였다.

 

 

옛 철길을 고쳐서 보행자 다리로 만든 허드슨 워크웨이로 올라갔다.

오랜 공사 끝에 몇년전에 완공 되었다고 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겨울에는 폐쇄된다고 한다.  

보행자 다리에서 루즈벨트 다리를 건너다 보며 한 컷하였다.

 

 

다리 아래 사람들은 부담이 되리라.

철길 때가 차라리 좋았던지---.

 

 

 

400년 전 쯤 식민지 시대에 헨리 허드슨의 이름을 따서 강 이름이 생겼다~.

철길에서 보행자 길로 바뀌는 과정 등이 설명문으로 붙어있다.

 

초기 철로길을 완공하던 장면도~~~.

 

다리 난간에 붙은 금빛 마크는 돈을 낸 기증자들의 신상명세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40분 가량 걸려서 다리를 일단 건넜다.

왕복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한나절을 보내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동구 밖에 허름한 농가 창고가 보여서 한 컷하였다.

우리가 만든 기억과 추억의 창고가 이러하려나.

석양을 받은 그림자가 길다.

 

 

사족;

친구의 신인상 수상을 축하하는 동기생 카페 메시지 중에는

"우리 나이에 신인상? 하여간 축하!"라는 순정한 문장도 있었다.

 

내가 무언으로 그 말을 꺼냈다.

그러자 "포킵시의 현자"인 이 시인은

"아직도 너무 빨라!"

라고 반짝이는 지혜의 눈빛으로 답하였다.

 

물론 이 무언과 묵언의 대화는 내가 지어낸 부분이다.

우리 학창의 등단 문인들이 기라성같지만 쇠하는 기억으로 거명했다가

큰일 날 것 같아서 모두 지웠다.

 

사실 문단 뿐 아니라 사회평론의 대가들, 의창醫窓의 대저술가들

아, 사회학司會學의 무형문화재들은 또 어이할꼬?

모두 신인같은 건강과 긴장을 유지하여서 미더운 마음이다.

 

리포터는 곧 도미니카와 하이티로 건너갑니다.

도미니카 한인 문인협회의 초청입니다.

현지 유소년 글짓기 대회의 심사와 총평을 멀리서 지난 3년 동안 맡아왔는데

이번에는 시상식 행사에 초청이 되었습니다.

금년에는 47편이라는 기록적 응모가 있었지요.

이곳에서 매우 많은 교민들이 탄탄한 커뮤니티를 이루게 된 배경과

모습은 방문 후에 리포트할 사연입니다.

대사관에서도 만찬이 있습니다.

이제 한 보름간 휴가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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