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편 소설) 가래떡 날에 모인 사람들

원평재 2012. 11. 8. 13:42

 

 

(단편 소설)  가래떡 날에 모인 사람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중부 고등학교는 나중에 그 마을이 성남시의 일부가 되면서 남한산성

아래에 있다고 산성 고등학교로 개명이 되었다. 성남시라는 급조된 도시 속에서 중부라는

이름이 위치상의 불일치 혹은 모호성을 초래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개명 후의 산성 고등학교 문예반 출신들은 조금 과장법을 쓰자면 한국 문단의 한

문맥을 형성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젊은층에서 중견까지가 그러하였다. 그 정확한 이유나

원인은 없거나, 모른다는 말이 정답, 혹은 모범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듣기 좋은 말로 남한산성의 정기---, 운운하는 이야기도 적지않았지만 원 농촌 동네의

순수함에다가 청계천변에서 쫓겨온 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이중나선 구조같이 교직되어서

이루어진 이해하기 어렵지않은 불가사의는 아니었을는지.    

 

문예반 사정은 대략 그러하였고 학교 자체도 한동안 명문교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오래 지속된 고교 비평준화 지역의 특성을 십분 향유하였달까,

급조되고 허술하기 이를데 없는 도시이다 보니 교육시설인들 제대로 되었을리 없는 시점에서

다른 데 보다 설립 역사도 오래되고 교지도 넓고 위치도 좋고 우선 제대로 된 교실과 책상이

갖추어진 학교, 기본적으로 학교다운 학교가 되다보니 경쟁률이 꽤 치열하였던 것이다.

명문이 달리 명문인가, 우선 인재가 몰린 덕분이었으며 훌륭한 선생님들도 새로 보충이 되었다. 

물론 열악하고 빈곤한 지역 배경 때문에 항상 눈물겨운 지경에서 그 한계는 노출되고야 말기도 

했지만.

 

우리가 졸업할 즈음에도 이른바 스카이 대학교의 단과대학 수석입학을 하는 친구들이

심심찮게 언론을 장식하여 모교를 빛냈다. 거기 더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은 했으나

등록금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연들을 우리학교 졸업생들은 연례행사로 만들어 내어서

모교를 세상에 더욱 알렸다. 

아, 신춘문예가 발표되는 새해가 되면 전국적으로 꼭 한두명 우리 동문들이 이름을

얹었고 당선소감에는 어떤 빌미로라도 산성 고등학교라는 이름을 슬쩍 끼워넣었다.  

1971년도의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이 나라의 국기를 흔들 정도의 파문을 일으킨

전후 사정도 있어서 우리학교의 동정은 이래저래 툭하면 언론의 주목과 특별한 관심을

자아내었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는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나고 몇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막 사춘기에 접어 들어섰을 때 터진 이 참혹한 일들은 우리의 감성을 흔들고 뇌리에 박혀서

학생 글짓기 대회 등에  오래동안 빠지지 않는 주제가 되었고 가난한 이곳 고교생들이

더욱 문예반에 집착하는 요인이 되었다.

바로 우리 때에도 학교 특별활동반에는 여러 분야가 있었지만 좀 깨어있다는 녀석들은

문예반을 기웃거렸고 그건 모두 당연한 일로 여겼다. 인원이 넘어서 우리 학년에서는

열한명을 국어 성적순으로 끊었다는 것도 우쭐댈만한 에피소드에 속하였다.

선배들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문학의 밤을 개최하고 시화전도 열었다.

다만 삼학년이 되어도 다른 선후배들과는 달리 "정신을 못차린" 우리 동기들은 그런 활동을

계속하였고 시화전의 그림은 당시 학도 호국단 대항 사생대회에 경기도내 일등을 도맡았던 

같은 학년 O가 맡아서 해주었다. 그도 물론 시를 잘 썼는데 특별활동은 미술반이었다.   

우리가 이른바 "정신을 못차린" 데에는 당시 문단에 이름을 한창 떨치시던 시인 P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그분이 여러해 문예반을 맡으신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대학 입학 원서를 쓸 때에는 하나도 문학 쪽을 지망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적 사정을 포함하여 원인은 복잡하였겠지만 아마도 P선생님이 그해 가을에 갑자기

돌아가신 탓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평소 건강하지 못한 기색은 보였으나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리라고는 교무실의 선생님들도 짐작조차 못하였다고 한다.

부음이 전해지던 날, 문예반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생전 처음 선생님의 댁, 꼬방 동네의

돼지우리보다 못한 방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발인 때에는 병원 영안실로 옮겨지셨지만 첫 상황은 그렇게 댁에 홀로 누워계셨다.

정경은 한마디로 참람 그대로였다. 

 

도시 전체가 가난하였으니 학생들 모두가 어렵게 살았지만 어느날 존경해 마지않던 시인

선생님이 그렇게 참혹하게 사시다가 가시는 모습이 거울이 되어 우리는 또스토 에프스키가,

푸쉬킨이, 에드가 앨런 포우가, 보들레르가, 아 그리고 이땅의 김유정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에 생각이 미치고 가슴이 떨렸다. 교사는 이 동네에서도 부자에

속하였을 텐데 무슨 일을 도모하시다 가셨는지 시인은 이렇게 가난하였다.

우리는 모두 문학을 버리기로 하였다. 겁이나서 그랬다고 비웃어도 좋다. 가난이 어떤 것인

아는가.

우리는 월급까지 주는 이류대학 장학생으로 많이갔다. 문과로 일부를 뽑는 육사로도 갔다. 

또 어쨌건 입학만 하면 금방 고시공부를 시작하여 팔자를 고칠수도 있는 법대로, 그리고

매우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입주 아르바이트를 염두에 두고 의대나 치대로도 갔다.

문예반에 이과 전공도 있었으나 대략 의학 쪽이었고 공대는, 아 두명이나 공대로도 갔다.  

상대와 사범대학도 있었다. 그런 동네에서도 부동산 소개로 갑자기 돈을 번 아버지 덕분에

음대를 간 돌발 상황도 있긴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국문과나 인문대학 같은 데로는 가지 않았다.

재수를 하느라고 한해 늦게 대학에 들어온 친구까지 합하여 열두명이 대학로나 신촌,

왕십리 등에서 다시 모였으나 아무도 시인이나 소설가를 입 밖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 버는 이야기랄까, 그 방면의 정보같은 것을 교환하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암울했던 70년대 말과 80년대 서울의 봄 때에도 소신과 신념으로 개인

플레이의 저항을 했는지는 몰라도 단체행동으로 나간적은 전혀 없었다.

체 게바라도 부유한 가정에서 처음 의학도의 길로 나갔었지, 아마.

좀 불경스럽지만 부처님께서도 원래는---.

 

나중에 누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흩어진건 젊은날 뮤즈의 신에게 헌신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려서 서로 보기가 부끄러웠던 탓이라고도 하였다. 

일정부분은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림 그리던 친구 O가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난 사건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가 대학생활 두어해만에 자살을 한 이후, 열 한명의 친구들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아, 그해 겨울 유작전이 있었지. 아직 아무도 넉넉지 않았을 텐데 당시의

능력으로는 꽤 부담스러운 돈들을 아무 군말없이 내고 모아서 작은 공간을 빌려 유작전을

열었던, 그 눈 많던 겨울 이후부터 그들은 결코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지 삼십여년---.

 

서너해 전부터 이들은 다시 슬금슬금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곧 자식들을 결혼시키려니까 품앗이를 강구하는구나.

누가 자조적으로 말하고 아무도 반론치 않는 가운데 이제 조금 여유있는 모습으로 무리들은

얼굴들을 보기 시작하였다.

"환갑을 바라보잖아",

누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직은 먼 미래를 구상하는 표정도 지었으나 하여간 은퇴니

명퇴니를 내 세운 친구들도 있었으니 벌써 목이 달아난 경우들도 생긴 모양같았다.

인생살이는 이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다.

 

그래서 서너해 전, 단풍이 드는 계절의 주말에 부부가 함께 모이는 총회 비슷한 것이 열리더니

그렇게 몇년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느슨한 연결이 짜임새를 갖추던 작년 어느날, 누가 손을

번쩍들고 제안을 하였다.

"우리의 이 모임, 이름을 뭘루할까?"

"아이고, 또 산성이란 말 넣을래? 지겹다, 이제. 그럼 청록파라고 할까? 폐허나 백조, 아니면

장미촌이 좋겠어? 그저 무명처럼 우리 모임이라고 하자. 우리 모임!"

그동안 압구정 동에서 성형외과로 돈을 긁었다던가 하는 S 원장이 느긋하게 설득력을 발휘

하였다.

"거참 탁월한 발상이네. 그게 좋겠다. 그리고 회장에는 S 원장님이 고생 좀하고."

LA에서 모처럼 온 친구가 센스있게 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회장께서는 총무 한명 천천히 지명하시고 그보다 우리 내년에는 부인들과도 함께 모임을

계속하겠지만 우리끼리도 따로 한 번 모여보자. 주말을 잡아 일박이일로 놀아보자구요, 꼭!"

모두들 와하며 소리를 치고 박수도 터져나왔다.

 

"바가지 뒤집어 썼네, 여러분! 하여간 취임 결재는 마누라한테 받아야겠지만 일단 사회는

좀 볼께. 내년 모임이라, 그럼 날짜는 그날로 해야겠지?"

누가 들으면 뜬금없다싶을 말을 회장이 꺼냈다. 

모두들 두말없이 찬성이었다. 

"그래, 내가 생각이 있어서 빚을 내어 비행기표 할부로 사서 왔는데, 내년  그날에 모이자는

제안을 하러 큰 맘 먹고 온거야. 내년 그날이면 그 일이 있고 꼭 사십년이 되는 날인데 마침

일요일이야."

계속 LA 친구였다. 

"작심을 했구려. 장소는 대략? 그쪽으로 해야겠지?"

회장이 또 좌중을 훑었다.

"아, 그래 당연하지. 내가 그쪽에 연고가 좀 있어. 알아서 다 준비를 해 놓을께. 입만 갖고

모이자."

교통상해 보험사 전용병원의 사무장으로 있다는 B가 모두의 마음을 편하게 하며 자칭 총무,

아니 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런 요식행위와 과정을 밟아서 마침내 금년 "가래떡 날"에 열한명이 남한산성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가래떡 날, 그날은 바로 11월 11일이었다. 시중에서는 빼빼로 날로도 불리더니 이제는 민족의 떡,

가래떡 날로 고정이 되었다던가.

  

한때 시나 산문이나 그림 분야에서 인생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던 딜레탄트들, 예술지향의

청춘들이 그런 영역과는 전혀 별도의 일을 하며 밥 먹고 잘 살아가는 모습들이 장하기도

하고 징하기도 하였다.

최근 몇해의 모임은 해외파까지 넣어서도 거의 빠지는 경우가 없을 정도인 것이 정말

자식 결혼식 품앗이 발상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래도 무언가 심상치는 않았다.

물론 오랜만에 문학적으로 말해서 뮤즈의 신에게 올렸던 청년시절의 서약을 헌신짝처럼

버린 배신자들이 마지막 회개의 의식을 치루는듯 한 비장함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래도 무슨 공공연한 비밀이 내재해 있지않고서야 이런 집착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이날의 일정은 LA에서 온 L이 묵고 있는 시내의 어떤 호텔 커피숍에서 일차 회동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서 남한산성의 음식점에서 보내준 중형 밴을 타고 가서 산성이

내다보이는 명당 터의 안방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른바 "우리 모임"은 본격화 되었다.

식당과 노래방과 마침내 잠까지 잘 수 있는 전천후 객주가 거기 있었다.

장소 마련은 "중부 응급 센터"라는 그만그만한 보험사 전용 병원의 사무장으로 있는 B가

맡겠다고 일년 전에 벌써 약속을 하더니 과연 그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야, 모든게 전천후네?"

모두 탄성을 발했다.

순수 한옥으로 지은 큰 대궐의 마당에는 유럽식 성채도 있고 불탑도 있었다.

"이건 뭐 드라큘라 성 같네."

누가 초를 쳤다.  

"그러지 말어. 우리 병원이 부탁해서 세워준거야. 여기는 주로 중부 고속을 달리는 운송회사의

사고 처리 상무들 데리고 고스톱 치는 곳이야. 우연의 일치지만 우리가 찾던 장소하고도

맞물리잖아. 대형 사고의 경우, 피해자 대표들과 회동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그래서 서양

교회처럼 생긴 성채도 있고 불탑도 있지. 심리전이야, 하하하."

문예반 시절 각종 행사에서 준비위원장 감투를 스스로 쓰고 즐기던 B, 이제는 우리 모임의

사무총장으로 돌아와서 다시 보여주는 실력이었다.  

 

"이게 닭백숙 아닌가?!"

누가 탄성을 지르자 B가 볼 맨 소리를 했다.

"닭이 아니고 오골계로 특별 주문한거야."

"오골계 뿐이야?"

LA에서 온 L이 눈치 없이 채근하였다.

"내가 미치네. 고향 찾은 녀석 멱살잡이도 못하겠고---. 염소 중탕에 돼지 목살, 갈매기 살,

쇠고기 치맛살, 하여간 지지고 복고 구울 건 다 나온다."

"술은 예정대로 충분히 준비되었을 것이고?"

주량이 말술인 회장이 확인 투로 물었다. 그는 의사로 성공한 이후가 되어서야 시조시인으로

등단을 하였고 기왕 적신 몸, 한국 펜클럽 이사로도 활동과 활약을 하고 있었다.

"자, 우리 나이가 이제 술을 끊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인 때에 들어서긴 했지만 오늘은

옛날 가락으로 흠씬 취해보자. 민속주, 맥주, 와인이 부지기수이고 L군이 LA에서 들어 올

갖고 온 꼬냑이 또 한 병."

준비 위원장 B의 노래 투 답변이었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 나오는 외나무다리 실버선장의

노래 가락 같은 어조였다. 익살로 그가 다리까지 절룩거렸다.

"그리고 럼주가 또 한 병, 이런 노래가 나오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인가하는

해적 이야기가 생각나네."

치과 의사하는 또 다른 B가 말했다.

지금 먹고사는 일은 무엇으로 하건 모두 산성고등학교 문예반의 자격이 있음을 내비치었다.

 

"난 이제 술 끊었다---."

음악 대학의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최근의 종합 건강 진단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다.

무리들은 그가 엄살을 부린다고 뒤집어 씌었다.

"화투 드릴까요, 카드 드릴까요?"

주모가 슬쩍 끼어들었다. 화장 끼가 보시시한 중년이었다.

"이 분들은 사고 담당 상무들과 격이 달라요. 모두 사회 명사들이고 내 부랄 친구들이거든.

그러니까 고도리는 치우고 음식 준비 되는대로 빨리 들여오지. 그리고 맡겨 논 복분자술부터

먼저 갖고 와요."

B가 주모의 젖무덤 쪽을 무덤덤히 더듬으며 더듬더듬 술을 찾았다.

"자아, 이제 몇 머리나 오셨나? 나중에 두 머리가 좀 늦게 오기로 했지?"

회장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별 하나 달고 예편한 장군과 강원도로 수금하러간 C, 둘을 제외하고 아홉 명이 모두 모였다.

"열 한명이 모이기도 참 힘 드네---."

회장이 막 들어온 빨간 복분자를 회원들에게 돌리며 탄식하였다.

"미안, 미안---,"

이러면서 예비역 장군이 그 순간에 들어왔다.

"내 욕 많이 했지?"

"그래. 온 상에 침이 튀었다."

 

이제 수금하러 동해안 쪽으로 갔다는 보험사의 점장, C만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장군의 선창으로 ‘육사’식 건배를 힘차게 외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육사식이란 "건배, 건배, 건배" 이렇게 세 번 외치는 것이어서 무리들은 "산성, 산성, 산성"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다만 소리는 컸으나 말들은 별로 없었다. 무언가 느낌 다른 사연이

계속 자리에 내재해 있었다.

 

"열한명이 다 모이면 큰 건배 제의를 하려고 했는데 C가 아직도 오질 않네. 오늘이 빼빼로

날인데---.“

회장이 가라앉은 분위기의 책임을 C에게 돌리며 중얼거렸다.

“가래떡 날!”

누가 얼른 수정하였다.

“그래, 그래. 뭐 날짜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하여간 11월 11일이란 말이지. 그리고 우리

모임의 인원도 11명이고."

회장이 개식사에 가름하는듯한 말을 좌중에 흘렸다.

 

"열하나가 아니지. 사실은 열두 명이었잖아."

은행원 하다가 명퇴하고 나온 T가 깐깐한 소리를 냈다.

"그래 자살한 O를 넣어서 원래는 열둘이었지. 다들 말하기 싫어하지만 말은 바른 말이지,

우린 열둘이었어. 화가 지망의 O를 빼면 안 되지."

경영학과를 나와서 IT관련 회사에 재무 담당으로 다니다가 전자 대리점을 하나 따내어

퇴직한 내가 마침내 할 말은 다하자는 투로 톤을 좀 높였다.

그러자 LA에서 온 L도 바통을 받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사실 오늘은 O가 자살한지 40년이 되는 날이잖아. 그래서 그의 기일에

우리가 함께 모이자는 뜻에서 내가 지난해에 날짜 박아서 우리 모임을 주장했던 거야.

내가 나성에서 사니까 제일 먼 데 살잖아. 그러니까 특별 모임을 보채기도 제일 맘 편하고

해서---."

 

"제기랄!, O가 자살한건 너 때문이었잖아. 그래서 네가 오늘 모임을 서둔 걸로 나는 이해

하는데!"

은행원이 또 깐깐한 소리를 냈다.

"뭐야? 이 자식!"

LA가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맞잖아, 윤자를 네가 꼬셨으니 O가 약 먹었지!"

두 사람이 멱살잡이를 할 판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내 탓이었을 거야. 우리가 그때 종로 3가의 창녀 촌엘 다녔는데 O와 내가

그러니까 성병에 걸렸던 것 같아. 나는 인턴 하는 선배한테서 약과 주사를 맞고 나았는데

O에게는 제대로 약과 주사를 주지 못했거든. 약속을 해놓고도---. 모르긴 해도 이 순진한

화가가 고통이 심했을 거야. 다 내 탓이야."

회장인 성형외과 의사가 시원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탄식처럼 말을 던졌다.

순간, 싸움 직전의 분위기는 중재자의 충격적인 말 때문에 갑자기 아연해졌고 이어 모두

한없이 진솔해졌다.

 

"아니야, 내 탓이야."

예비역 장군이 단호하게 치고 들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고생스런 육사의 영내 생활을 하다가 외출을 나와서 보니까 성남의 우리집은

나아진게 없고. 하릴없이 O가 아이들 그림 가르치는데를 찾아 가보니까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세수도 안하고 무질서하게 화실에서 딩굴며 멋대로 붓을 놀리더라고. 내가 화가

나서 이게 무슨 그림이냐고---, 네가 무슨 반 고호냐. 이 쓰레기 같은 그림을 갖고서---,

하긴 고호도 겨우 동생 테오가 동정삼아 그림을 몰래 사주었다고 하더라만! 그렇게 윽박

질렀지. 잠시 미쳤었나 봐. 내가 세상살이에 대한 억울함과 홧김에 약간 머리가 돌아버려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친구를 매몰차게 몰아세우니까 맘 약한 그 녀석이 깡 소주를

들이키고는 울었어. 지금까지 가슴이 떨리고 찢어지게 아픈 절대비밀이었다만---."

장군이 다른 술은 다 재치고 소주를 큰 컵으로 자작하여 마셨다.

 

"아니야, 내 영향이 컸어. 내가 재수를 하여 공대 전자과를 들어갔잖아. 재수 시절에는

그 녀석의 화실에 자주 드나들며 술도 마시고 했는데 운이 좋아서 공대 전체 수석입학을

하며 장학금도 받고, 신문에도 났지. O는 그 전 해에 미대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서 사실

이류인 후기대학의 응용 미술과를 들어가고 나자 자조가 심했어. 그림이야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 규모의 학도 예술제를 휩쓸며 벌써 천재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잖아. 내가 한해 늦게

들어간 주제에 톱을 했다고 우쭐하여 만날 때마다 무명 대학 O카소라고 아픈 데를 찔렀지.

잘 참고 웃더라만 만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두어 해를 넘기니까 참기 힘들어했어. 그러고

보니 내가 서서히 죽인 것 같애."

평소 섬유과를 나왔다고 "공돌이 걸레과 출신"을 자칭하는 친구가 말을 마치고나서 동동주를

대접에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자칭이 그렇다면 친구를 그런 식으로 놀릴 자격이 정녕

충만한대도 탄식은 길었다.

 

"모르는 소리 말어. 내 죄야. 내가 치대 선배들에게서 수면제를 얻어다가 여자애들을

꼬셔서 O의 화실로 데려갔지. 예나 지금이나 생각하면 끔찍한 범죄 수준이지만 수면제로

한두 번 재미를 봤는데, 기집애 하나가 문제를 삼고 나서 그 화실로 경찰이 들락거렸지.

O가 내 죄를 감싸고 혼자서 책임을 지느라고 한동안 머리를 싸맸어. 자기가 불면증 때문에 

수면제를 타놓았는데 놀러온 여자가 마셨다고 했지. 알고보니 섹스 부분은 그 기집애가

선수였더구만. 괜히 수면제를 탔잖아. 하지만 그 바람에 이 친구가 고생도 많았고 나중에

자살 목적으로 수면제를 약방에서 조금씩 구하여 모으는 방법도 나로부터 동기유발이 된

같아. 이걸 누구에게 고백하겠어. O는 영원히 입을 다물었지---."

치과 의사가 맥주에 폭탄주 뇌관을 장치하여 "노털카"로 마시면서 "흑!"하는 소리를 냈으나

흐느낌인지 원샷에 수반하는 소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O가 약을 구하러 다닐 때에 나도 약간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 그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거나 주위에 알리거나 했어야 되었는데, 방관한 죄책감이 내게 있어. 좀 큰 돈을 빌려

달라고 했는데 내가 돈이 없어서 조금만 준 것도 내내 맘에 걸려. 주지 말았거나 많이 주거나

했어야 되었는데 싶어서---."

대기업에서 숫자 놀음을 하면서도 인문적인 데에 끊임없이 타고난 관심을 갖고, 문학은

버렸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글을 써야지 하면서 지내다가 겨우 전자 대리점의 "최고 경영자(?)"로 

낙착된 나도 그간에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응어리를 그렇게 속 시원히 내뱉었다.

 

"아니야, 내 죄가 더 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M이 말했다.

"그 때 내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해병대 입대를 했잖아. 고달픈 훈련생활의 하루가 끝나면

플래시를 몰래 켜고 침상에서 내 비관적 명상록을 그에게 써 보냈거든. 마치 또스토에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처럼---. 프리드리히 니체와 실존주의 비관론자들의 이야기들이 내 주된

메뉴였지. 갈겨 쓴 그 우수와 오뇌의 글에 그는 거의 매 편지마다 답장을 쓰고 매주 모아서

보냈어. 내가 그의 자살 반경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들 생각하고 심지어는 내가 옆에 있었

더라면 그가 그런 극단의 일을 결행치는 않았으리라고들 하지만 사실 나는 바로 그의 옆에 그런

식으로 붙어 있었던 거야. 비밀스럽게도 말이야."

M도 말을 마치고 앞에 있는 양푼이에 되는 데로 양주를 자작하여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 친구를 죽인 건 여기 바수니스트인 바로 나요, 나!"

음대 교수였다.

"내가 문학한답시고 맨 날 여고생들 꽁무니만 좇아 다니다가 고3이 되어서야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한 바순을 시작해서 대학에 거뜬히 들어갔잖아. 다들 가난한 동네에도

부자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이지. 성남의 꼬방 동네에서 경매로 나온 부동산을 은행 빚으로 

과감하게 여러채 헐값에 사들여 대박을 터뜨리신 돈 많은 아버지 덕을 입은거지. 내가 한 학기 

내내 바순 레슨을 대학 교수에게서 받았잖아. 1차에 떨어진 O가 특히 나를 찾아와서 엉엉

울더라고. 감성 여린 그가 잘 울었잖아. 저기 앉아있는 저 공돌이는 이미 재수한다며 낄낄대고

당구장엘 다녔는데 말이야. 그런 일들이 쇼크가 아니었을까?"

"놀고 있네 임마, O의 여동생 욕보인 이야기는 왜 빼먹냐? 그게 문제의 핵심인데."

회장이 윽박질렀다.

"제발 좀 그건 빼 줘, 깊은 건 사실 아니었어. O의 여동생 정순이 하고의 이야기에는 정말

오해가 많아. 그리고 나와 표나게 돌아다녔을 때는 우리와 연년생인 그 애도 같이 대학 들어

온 후의 이야기니까 성인으로서 모두 자신의 책임 아래 일어난 상황이었고."

바수니스트가 쩔쩔 매었다.

"임마, 너도 딸 키우면서 요즈음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는지---. 누가 깊고 얕은 줄을 줄자로

재어 보고 말들을 하겠어? 조심들을 했어야지. 여동생에 대한 오빠 사랑, 육친의 안타까움을

네가, 아니 우리 모두가 어찌 그때 그렇게 무심했나---."

"그래, 내가 평지풍파를 일으킨 그 친구 여동생 관련으로 그가 그렇게 극단으로 나갈 줄은

정말 몰랐어. 모두가 다 내 탓이오. 메아꿀바, 내 큰 탓이오. 내가 이탈리아 가서도 내내 속죄

하며 공부했어."

 

 

밖이 왁자지껄 하더니 마침내 C가 곱게 나이 든 어떤 중년 부인과 함께 나타났다.

그가 늦어서 미안하다는 소릴 질렀으나 우리의 시선은 모두 곱게 생긴 중년 부인에게로 향해

있었다.

“내가 이 여자 데리고 오느라고 좀 늦었다. 중간에 술도 한잔 같이 걸쳤고.”

얌전하던 C는 법대를 나와서 고시에 몇 번 떨어지더니 보험 회사로 들어갔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하긴 엘리트의 탈을 벗고 인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O를 죽였어. 그때 내가 고시는 자꾸 떨어지고 해서 자진 입대를 했는데 배속 받은 데가

1111 야전 공병단이었어. 소위 닐리리 야공단이었지. 법대 다니다 왔으니 현장은 아니고

수발계 행정요원이었으나 야공단 군기가 좀 쎄냐 말이야. 맨날 빳다야. 그래서 나도 O와

편지께나 교환했는데 이건 언제나 비관론자들의 유서 같은 것이었지. 그 때 O는 여기 있는

윤자 씨하고 청춘사업도 잘 진전되지 않고 해서 여러모로 마음 고생이 많았지 싶어."

 

"내가 왜 그 양반의 자살에 책임이 있어요? 난 아무 책임 없어요."

그 사이 나이와 세월이 선물한 살집을 온몸에 고루 배분하였으나 아직도 고운 데가 남아았는 

부인의 목소리가 좀 앙칼지게 들려서 어울리지는 않았다.

"답답해서 못 살겠어요. 그 때도 모두들 내 책임이라고 윽박질러서 정말 저도 죽고 싶었어요.

저기 저 양반이 L씨 맞죠. 저 분 때문에 또 공연히 오해가 부풀어졌지요. 나와 저 양반이 따로

또 바람을 피웠다나 어쨌다나---. 삼각관계가 되었다고. 그 후에 저는 어쩌다 돈 많은 집의

재취 댁으로 시집은 갔는데 멀쩡한 처녀가 왜 재취 댁으로 갔느냐 말이죠. 모두 소문 때문

이었어요. 하긴 그 남편도 또 일찍 죽더라고요."

"그래서 돈 많은 과수댁으로 평생 잘 지내고 있지 않소. 멋쟁이들의 몸 보시도 즐기고---."

C가 자꾸 이죽거렸다.

"이 양반이 도중에 낮술은 했지만 말이 정말 과하시네. 내가 40년 만에 그 억울한 소리, 책임,

책임 하는 말에 대하여 한번 따져보자고 이 양반을 따라서 오긴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난

나갈래요."

윤자라는 여인이 발딱 일어섰다. 요즘 유행하는 란제리 룩의 고급 명품으로 몸을 감았는데

살이 자꾸 비져나오는 폐단은 있었지만 말을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아직도 어지간히 섹시한

여자였다.

 

"아하. 이 귀부인이 낯이 익다 했더니 그 때 그 여대생이네. 앉으세요. 제가 의학 박사니까

서로 알아두면 노후에 나쁘진 않을 겁니다. 건강 백세에 도움 드릴게요. 그냥 앉아 계세요.

낮술은 지애비도 모른다잖소."

역시 회장이었다.

그가 윤자라는 여인을 은근한 말과 손길로 자리에 도루 앉혔다.

"오늘은 모두 O군이 이 남한산성의 저 성곽 위에서 세코날 서른네 알을 털어 넣고 저쪽

단애로 떨어져 세상 밖으로 사라진지 40년이 되는 날이지요. 이날에 우리 모임의 동지들이

모두 모여서 그의 죽음이 모두 자기 채금이라고 고백 성사를 보고 있는 셈인데 이제

유일하게 자기 채금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마침내 나타난 것이외다."

"맞아요! 제 채금이 절대로 아니에요."

얼떨결에 윤자라는 여인도 회장의 의미심장한 덫에 걸린 셈이랄까, 채금이라는 표현을 따라

해서 일순 방안에는 웃는 소리들이 신음처럼 나왔고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사실 저는 그림을 보는 건 좋아했지만 어렵게시리 무슨 질감이니 마찌에르니, 또 뭐라더라

그래 후기 인상파니 기하학적 분해니 하는 소리는 골치만 아팠어요. 지금 이런 말을 쓰는

것도 그때 들은 말들이 아니라구요. 나중에 심심해서 백화점 주부 교양 교실 같은 데에

다니며 귀동냥한 거라구요. 하여간 그 때 나는 O씨의 접근과 집착을 너무나 부담스레

느낄 뿐이었어요."

"당신 같은 그래, 자칭 불학무식한 여자를 현학의 극치를 달린 화가 지망생이 왜 좋아

했을까?"

혀가 벌써 꼬부라진 C가 또 분위기를 위기로 몰고 갈 태세였다.

"이 양반이 또---. 그래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 청년이 날 좋아한 건 내 몸매가 좋았기 때문

이었을 거요. 아니 오해하지들 말아요. 나를, 내 몸매를 모델로서 좋아했다는 말이지요. 내

손목 한번 만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화실 속에 함께 오래 있었지만---. 그리고 모두 들어

두세요. C점장 이 양반은 정말 나빠요. 아무리 내가 돈이 많고 그래서 보험 설계의 표적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옛날에 좋아했던 여자를 꼬셔서 관계를 맺어요? 내가 나중에 알고 돈을

몽땅 다 빼버렸더니 몸 보시 어쩌구 하면서 망신을 주는 겁니다. 하지만 어림없어요. 내가

한두 번 몸을 섞었다고 꿀릴 여자인줄 아시나요? 당신이야말로 내 앞에서 꿇어앉기도 하고

오지투체도 하고, 종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잖아요."

끙!하는 소리들이 방안 이구석 저구석에서 길게 혹은 짧게 나왔다. 정말 그녀가 쓴 사자성어는

그렇게 쓰고 보니 또 괜찮은 조합같기도 했다. 남녀간에 의기가 투합하는 순간이라면 정말

그렇게 온 몸을 날리지 못할 바도 없는 것이다.

문자까지 쓴 윤자는 나폴레옹이 그려진 술병에서 갈색 액체를 부드럽게 끄집어내어 그윽하고

우아하게 한잔 마시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죄책감들 갖지 마세요. 그 양반이 자살한건 오로지 거 뭣이냐, 그래 갈렴상의 문제

였어요."

갈렴이라니?

오라, 아니 옳아, 관념상의 문제였다는 것이구나.

역시 지혜로운 미인이구나.

우리가 뭐 문자나 정확히 많이 안다는 게 무슨 말라죽을 지식 작태인가.

저 직관!

 

"그 분이 돌아가신 건 철학적인 죽음이란 말입니다. 생각이 참 깊었어요. 인생은 허무라고도

자주 말했어요. 듣자하니 모두들 가해자인양 자책하시지만 따지고 보면 피해자도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래야 그 분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지요. 제 말이 말이 됩니까? 아니, 말이

되지요? 오랜만에 뵈니 얼굴 기억은 다들 삼삼하지만 반갑고 참 좋네요."

타고난 관능미의 여인은 옛 사람들에게 말의 끝 부분으로 가며 보기에 따라서는 교태를 약간

부렸고 남한산성의 밤은 깊어갔다.

 

"가래떡을 좀 구워봤어요. 배들 고프시죠?"

자다가 나왔는지 원래 젖가슴이 커서 그런지 앞 매무새가 부실한 주모가 가래떡을 구워서

고소하고 먹음직한 냄새를 풍기며 들여왔다.

"오늘이 가래떡 날이라서요."

그녀가 전부터 알고있었다는 듯이 말은 했으나 일행의 말을 듣고 부산하게 준비했는지도

몰랐다. 가래떡이야 이제 떡복기 시대가 도래한 이후, 전천후 민족의 떡이니까.

"아이구, 벌써 자정을 넘기니 가래떡 날은 가고 속절없이 12일 일쎄. 그래도 산성 여사장이

센스가 있네."

B가 또 손을 뻗쳤다.

"에이 참, 손님들 계신데."

그녀가 B만 빼고 모두 손님이라는 것을 무심결에 확인시키며 후다닥 공격성 손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술이 떡이되어 잠깐 코를 골던 C점장이 눈을 뜨더니 벌떡 일어나서 천연덕스럽게도

흐르는 분위기를 탔다. 

"어, 12일이 맞네. 저기 벽 시계봐. 딱 12일을 가리키잖아."

임기응변인지 술떡 탓인지 불안정하게 서서 비틀거리며 그가 외쳤다.

"그런데, 어어 저기 O가 들어오고 있네. 그래서 사람도 열두명을 채웠어, 어어어."

그가 비틀거리며 손짓을 하는데를 보니 마침 윤자 여인이 화장실에 갔다가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밤 날씨가 추운지 머리를 스카프로 뒤집어 쓰고 들어와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C는 비틀비틀 계속 어어어 소리를 지르더니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처음 장난으로 치부하던 분위기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의사인 회장이 달려들어서 옷의

단추를 풀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빨리 차를 대기하라고 시켰다.

"아니야, 내가 상대하는 회사들의 앰뷸런스가 바로 산성 안에 대기하고 있어. 우리 중부병원

으로 가자. 당직이 또 상시 대기 상태야."

B가 소릴질렀다.

"그래, 승용차보다 앰뷸런스가 제일이야. 어서 연락해."

주모의 센스인지 벌써 앰뷸런스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가래떡 날"에 시작된 

고백성사의 시간은 다음날 새벽으로 이어지며 모두에게 용서와 면죄의 계기가 될 모양

같았다.

 

<활자책 관계상 며칠 올렸다가 내립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80매)

 

 

 

 

 

 

이웃 마을 늦가을 풍경 올려봅니다.

세한송백의 정경을 찾는 중입니다.

페이지  ...  벙어리 바이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