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석모도에서 생긴일

원평재 2006. 10. 29. 20:59
"빈포"라는 가상의 도시를 남해안에 설정하고, 서울에 온 빈포 초등학교

출신들이 벌이는 인간 드라머를 연작으로 쓰고 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처럼 단편이 묶어져서 하나의 연작 장편이 되도록 꾸미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연작을 다 읽지 않아도 한편 한편이 모두 독립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앞 글에 익숙지 않았다하더라도 읽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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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은 한잔도 안하고, 니 머 빌고 있노?"

박종말이 보문사에서 장명숙에게 심통을 부리는 소리였다.

강화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건너간 페리는 삼켰던 버스를 도루 석포부두에

토해 놓았고 버스 속에서 바다를 구경한 빈포 초등학교 동기들은 그냥

앉은채로 또 달려서 마침내 보문사에 도착하였다.

아, 모두 버스에 탄채로 바다를 건넌 것은 아니었다.

부지런한 일부는 뱃전으로 나가서 따라오는 갈매기떼들에게 과자

부스러기도 던져주며 사진도 찍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국내 3대 관음대찰이라는 보문사 입구로 달려와서

몇몇은 자연암반 속에 신묘하게 들어찬 불상 앞에서 소원을 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변에 난립한 음식점에서 우선 유명한 "강화 인삼

동동주"로 목을 추기고 있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취기가 돈 박종말이가 

장명숙이 빌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심통을 부리는 것이었다.

역시 이 때에도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 절집 위쪽으로 450계단을 더

디뎌서 미륵불이 음각된 눈썹바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하였다.

이 사람들도 가을 더위에 목이 말라 내려온 다음에 인삼 동동주를 

벌컥벌컥 마신 것은 물론이었다.

 

 

합장을 하는 매무새며 날렵하게 절을 하는 모양새, 또 절을 한 다음에는

손바닥을 하늘로 뒤집는 앙천의 자세 등등을 보면 장명숙이 보통의

불자가 아님은 분명하였다.

"니가 가만히 봉께로 절에 다니느라고 동기회에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구나. 내가 여반 총무하면서 참으로 유감이 많았데이.

금년에는 우짠 일로 동기회 연회비도 한푼 안내고---.

니가 앞으로 총무해봐라. 그래서 내가 얼메나 고생했는지를 한번

알아 보거라."

 

박종말은 이준호가 오지 않아서 생긴 부아를 장명숙에게 퍼붓더니

이제는 숫째 그간 밀린 감정까지 모두 넣어서 주사를 부리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장명숙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게 또 박종말의 부아를 더욱 돋구는 모양이었다.

"니가 사람을 무시하는구나. 우리 서방이 나이가 많아서 사내 구실을

못하는데 너는 동갑내기하고 살아서 재미보느라 동기회에는 관심도

없다 이거지?

그런데 이번에 석모도에는 왜 왔노?"

 


 

동기들이 그녀를 열심히 말렸으나 박종말은 "에라 모르겠다. 취한 김에!"

라는 심사인지 스스로 망신을 떨고 있었다.

어쨌거나 눈썹바위까지 올라갔던 일행이 내려오자 그들은 가까운

연안에 줄지어 서 있는 횟집 중,

미리 예약이 된 꽤 큰 곳으로 이동을 하여 자리를 잡았다.

앞쪽으로는 썰물로 멀리 밀려나간 바다와 연안과의 사이에 진흙뻘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바다 구경 외에 또하나의 구경꺼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빈포 초등학교 동기회에서는 봄 가을로 야유회를 떠나는데 금년

가을에는 강화군 석모도로 방향을 잡았다.

단풍철 까지 기다렸다가 설악산으로 가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여반

동기들이 아무래도 1박이라는 데에 저항을 느껴서 매년 하던데로

당일치기 일정을 잡는 수 밖에 없었다.

신발을 컨테이너로 수출입하는 박청수 사장이 회장을 맡아하는 운영진

에서는 지원금 관계도 있고 하여서 1박을 꼭 하자는 특별한 주문이

있을리 없었고  박종말  총무도 빈포에서 한때의 애인이자 지금은

시들해 하는 이준호 법무사로 부터 빈포에서 이번에는 올라오지 못한다는

전갈을 받고는 1박을 고집하지 않았다.

남반 총무를 하면서 사실상 남녀 총괄 총무를 하던 김완기가 죽고난

이후에는 새로 후임을 뽑지 않고 그냥 여반 총무의 박종말이가 총괄을

맡고 있었다. 

 

장명숙은 평소 말수가 없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전형이었다.

초등학교 동기회에 한번도 안나왔다는건 박종말의 과장이고 드문드문

얼굴을 비치기는 했으나 말과 동작이 없으니 이래저래 비협조적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 셈이었다.

이날 그 횟집의 노래방 기계만 잘 돌아갔으면 별 일이 없이 가을 모임은

그냥 잘 지나갔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날 그집의 노래방 기계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술이 과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말수가 헤퍼지고 평소의 감정들이 계속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였다.

박종말이는 좌충우돌 여러사람을 다치게 하였으나 특히 장명숙에게

과했다.

 

"야, 명숙아, 너 동갑내기 남편을 니가 먼저 몸으로 꼬셨다면서?"

"종말아, 우리보다 돈 먼저 벌기 시작한 니 서방, 할배 영감을 니가 먼저

몸을 던져 꼬셨다는 소문이 빈포에 좌악 퍼져있다는건 모르지?"

전어 회에 빨간색갈 복분자 술을 강제로 받아마신 명숙이는 아까의

그녀가 아니었다.

"이 가시나가 어디다 헛소리하노!"

박종말이 섬찟 놀라며 반격을 시도하였다.

"술에 절었어도 내 말이 귀에는 들어오는구나. 정신차려라!"

장명숙이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가시나가 생전에 야유회는 안오던게 왜 와가지고 말대꾸야!"
그러면서 박종말이 들고 있던 술잔을 술이 든채로 장명숙에게 집어

던졌다.

 

장명숙이 용케 그것을 피하면서 초고추장 접시를 엉겹결에 날렸다.

술이 취한 박종말이는 그걸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맞았다.

장명숙은 일을 저지른 다음 얼른 일어나더니 진흙 갯벌로 도망을

가는건지 하여간 바닷가로 달려갔다.

박종말이도 비틀거리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장명숙은 진흙탕의 한가운데로 가더니 펄썩 주저앉으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그녀를 좇아가던 박종말이는 마음이 앞서서 잡는 시늉을 하며 허우적

거리다가 그만 얼굴을 진흙탕에 박고 말았다.

이전투구라했지만, 그래도 두사람은 막상 진흙탕에서 몸 싸움은 하지않고

악다구니만 벌였다.

 

"종말아, 이 가시나야. 내가 지금 여기와서 부처님께 빈 것은 우리 딸에게

붙어있는 진흙 귀신 좀 떼달라칸거다.

진흙귀신 말이다.

니처럼 한가롭게 마음 변한 옛 애인 준호나 찾고 내 사랑 돌리도 하며

심통부리는, 그런게 아이다 말이다.

우리 딸이 유치원 교사 아이가.

재작년도 서해 수련원에 불이 나서 아이들이 타죽었던 사건이 터졌을 때에

거기 따라간 보육 교사 중의 한사람이었단 말이다.

그때 그 사건 이후에 우리 딸년은 혼이 반쯤 빠지고 정신이 나갔는데 우째우째

하여서 다시 인천의 어떤 유치원에 취직이 되었다 아이가---."

 

 


 

두사람을 떼 놓으려고 달려간 동기들은 엉거주춤 장명숙의 넋두리를 들으며

빙 둘러 서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딸이 다시 취직이 되어 교사로 나가게 된 인천의 

유치원에서는 지난 여름에 이곳 석모도 진흙 해변으로 하계 수련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머드 팩"인가 뭔가하는게 신문에도 나고 시중의 인기를 끌자

그런 곳을 한번 보여달라고 떼쓰는 말들이 유치원생들로 부터 나온

모양이었고 이걸 들은 학부형들이 정식으로 유치원에 요청을 하여 이리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학습자 요청의 현장 자연학습 행사였다.

 

그런데 수련회를 나오기 며칠 전에 이 진흙 갯벌에서 참사가 있었다고

한다.

진흙 갯벌에는 갯고랑, 혹은 줄여서 갯골이라고 하는 진흙늪이 있어서 

한번 발이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곳이 있는 모양인데 어린 아이들이

무려 여섯명이나 거기 빠져들어가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제 인천의 그 유치원에도 비상이 걸렸다.

우선 가느냐 마느냐가 첫째 과제였다.

유치원에서는 당연히 가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의 등쌀에

학부형들이 견디지 못하고 압력을 가하여서 출발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다고 한다.

다만 출입금지 구역은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등의 철저한 사전 교육이

실시되었고 인원 파악을 쉽게 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가정이라면 하나씩은

반드시 있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오게 하였다.

인파 중에서도 일단 그 유치원의 표시를 명확히 하고 또 위험지역으로

가는 것도 쉽게 눈에 띄게 하자는 묘안이었다고 한다.

 

"극성들이네. 유치원 아이들이 무슨 머드 팩에 관심이냐? 걱정이 되어

죽겠다."

장명숙이 정말 걱정이 되어서 석모도로 간 딸에게 그날 낮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엄마,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알아요? 오다가 성삼면 매음리라는

곳을 통과하는데 매음 보건 진료소 간판이 보이니까 아이 하나가

'응, 저기는 성병 치료하는 곳이야' 이런 소리를 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이 정도이니 차라리 아무 걱정말어요."

그녀의 딸이 휴대폰으로 그렇게 답을 하며 걱정말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진흙 갯벌에 풀어놓자마자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붉은악마'는 '진흙악마'가 되어서 자기네 유치원생들의

표시나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진흙을 쳐바른 아이들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아도 누가 누군지 분간키도 어렵더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기 위하여 호르라기로 불러보았자 전달도 되지

않았고 제대로 모일 상황아니었다.

장명숙의 딸은 서서히 속이 뒤집어지기 시작하였다.

 

갯고랑, 그러니까 진흙 늪 쪽으로는 접근 금지 줄이 쳐져 있었으나

개구장이들이 아주 가까이 까지 접근을 하는데, 어느 유치원 아이인지

어느 초등 학교에서 왔는지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오후 일찍 철수를 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불러모으니

장명숙의 딸이 맡은 반에서 세명이 보이지를 않더란다.




 

이제 장명숙의 딸은 가슴이 울렁거리다 못하여 마침내 머리가 터지는듯

하여서 대절 버스에 들어눕고 말았다.

부족한 샤워 시설을 1인당 천원씩이나 내고 사용케 했는데도 따로

수도 꼭지가 밖으로 달린데에 가서 무료로 몸을 씻고 나머지 세명이

나타난 것은 유치원생들이 모두 모인 30분 후였다.

 

장명숙의 딸은 이때쯤 완전히 실성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석포 부두에서 강화의 외포리로 나오는 페리를 탈때 쯤 그 유치원 교사는

바다로 자꾸 뛰어내리겠다고 해서 유치원 원장이 그녀와 자신을 줄로

묶은채 보호를 했다고 한다.

 

"명숙아 미안하데이.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래 지금은 딸아이가 잘

출근하나?"

박종말이 머리를 조아리는 시늉을 하며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이 가시나야. 그랬으면 내가 여기에서 불공을 드리겠나. 그 애가

정신병원에 통원치료를 받으며 집에서 쉬는데 툭하면 크루즈 타고

지중해에 가서 뛰어내리겠단다. 내가 그래서 여기 관음사에 짬만 나면

왔다간다.

여기에서 진흙 귀신이 붙은 것 같아서 말이다. 또 보문사가 기도 효험이

좋단다.

이번에도 동기회에서 마침 이리로 온다고 하여 따라왔다가 이 모양이

되었네.

넘사시럽고 우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딸이 실성한건 절대 아이다. 사실은 이러다가 혼사길

막힐까봐 겁이난다."

평소 말이 없던 장명숙의 긴 이야기가 끝났으나 사실은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많은듯 하였다.

 

"자, 야들아 물때다, 어서 나가자, 그리고 두사람은 감기 들지 않도록

빨리가서 씻고 오너라. 진흙 들어간데는 다 잘 씻거레이. 강화 나가면

내가 새 속옷 사줄께."

박청수 동기회장이 우스게를 섞어서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머드 팩도 하고 속옷도 생기고 두 사람은 땡잡았다. 부럽다."

누가 덕담성 우스게를 하였으나 아무도 웃지를 못하였다.

양명숙이 또 서럽게 울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명숙아, 딸이 유치원 교사 자격증은 있겠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있나?"

박청수가 양명숙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신학대학에서 유아교육학과를 다니면서 사회복지학을 복수전공으로

해서 이급 자격증을 따고 졸업했는데 지금은 일급 시험에도 붙었다

아이가."

양명숙이 울음을 그치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아니 신학대학 나온 애를 부처님 앞에서 빌면 되나?"

진흙을 얼굴에 잔뜩 쳐바른 박종말이 대화에 뛰어들었다.

역시 박종말이었다.

 

"딸은 교회에 다니지만 나는 불자 아이가. 무슨 상관이고?"

장명숙이 박종말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그래 맞다. 다 정성이다. 오늘 눈썹 바위 올라가며 보니 돌무더기가

있더라. 그 힘든 길을 올라가면서도 정성으로 돌을 들고 올라가

쌓은 돌탑이더라.

그게 종교심이지 특정 종교에 국한되거나 우상 숭배 같은건 아닐꺼야.

내가 지금 양로원을 하나 할까한단다.

고아원이 요즈음 아이가 없어서 매물로 나온게 하나 있는데 내가

돈벌이가 아니라 사회 봉사 차원에서 인수하여 사회 복지 법인을 새로

구성하고 양로원을 추가로 하나 낼려고 해.

천국으로의 소망과 기대를 건 그런 이름도 지금 하나 궁리중이다."

"빈포에 짓나?"

누가 물었다.

"미안하지만 거기는 사람이 자꾸 줄어들고 또 누가 거기까지 노년에

가려고 하겠나?

서울 근교인데 다만 빈포 사람들에게는 특별 대우를 할 계획이다.

경제력이 없는 우리 이웃들은 다 무료로 받겠다는 것이지."

"아, 그러면 우리 할배 영감 일착으로 신청합니데이."

박종말이 또 치고 나갔고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박여사네 처럼 돈 있는 사람은 조금 내야지. 그리고 영감님을 고려장

하듯이 갔다 버리면 되겠나, 하하하. 하여간 신청은 받은걸로 합니다.

그리고 명숙아, 내가 니 딸을 한번 볼께. 이런 사업 계획을 알려주면

아마도 증세가 퍼뜩 나을끼다. 일을 같이 할 욕심으로라도---."

 

장명숙이 진흙묻은 두팔로 박청수를 껴안는 시늉을하였다.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을 낮이 짧았다.

벌써 서해의 낙조가 불타고 있었다.

 


 

 

(이번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