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캐나다 문학 기행

아름다운 결혼식, 슬픈 삽화

원평재 2008. 6. 25. 02:55

 

조카의 결혼식은 화려하였다.

하바드 교정, 메모리얼 교회에서 지난 21일 금요일 오후, 예정대로 한 시간의 예식

예행연습을 먼저 하였고 그날 저녁에는 보스톤 다운타운에서 전야제를 가졌다.

  

 

 이튿날인 토요일 오후에는 세상 여러 곳에서 온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정식으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내 동생네는 미시간에서 왔고 사돈댁네는 서울에서 왔으며, 또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미국의 여러 곳과 스페인, 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에서 왔다.

 

   

 

 

하바드 대학 학부를 나오고 리서치 메디컬로 유명한 의대에서 MD, Ph.D.를

마친 조카는 지금 하바드 의대에서 레지던트로 수련 중이다.

고등학교 졸업 때는 미시간 대표로 백악관 장학생의 대열에도 들어갔다.

 

결혼식 날에는 원래 남녀 들러리를 친한 친구로 각각 다섯명씩이나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작 22일의 결혼식장에서는 신랑, 신부의 여동생, 남동생으로

두명씩만 세웠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가슴아픈 사연이었다.

 

오늘의 커플을 만들어준 신랑의 하바드 시절 룸 메이트가 얼마전에 뺑소니

차에 치어 숨진 것이다.

맨해튼에서 밤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국계의 전도 유망한 그 청년은 뉴욕에서 일하던 차세대의 리더였으며

막 신혼 생활에 재미를 붙이던 참이었다.

 

(매듀 홀의 입구에 있는 이 방에서 조카와 그 청년은 룸 메이트로 지냈다고 한다.

귀가가 늦은 학생들이 이 창문에서 SOS를 많이쳤다고---.) 

 

작고한 청년의 슬픔에 잠긴 신부는 내 며느리와도 뉴욕과 마닐라에서 학교를

같이 다니며 친교가 있던 사이였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사연이 안타깝고도 슬프지 않은 경우가 있으랴만

이 청년의 경우도 너무나 아깝고 허무하고 또 허무하였다.

내 조카 청년이 자신의 결혼식장에 화려하게 들러리를 여럿 세울 수 없는

사연이 바로 그러하였다.

내 조카의 하바드 베스트 프렌드와 또 지금 함께 근무하는 하바드 의과대학의

동료들은 모두 이 축복된 결혼식장에 참석하였으나 세상을 떠난 그 청년과

홀로된 부인은 이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인생살이의 한 은유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다.

 

슬픈 사연을 뒤로 하고 결혼식은 빛나게 진행되었다.

예식을 집전한 사제는 여성이었다.

현재 하바드 교목 중의 한분이 바로 이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시대의 한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기에 별로

신기할 일은 아니었으나 아직 내 눈에는 익숙지 않은 광경이었다.

 

하바드 구내는 지금 여름방학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옆의  MIT와 하루 차이로 졸업식 시즌일 것이다.

내 큰 아들이 바로 여기에서 여러해 전에 졸업식을 가졌는데 바로

이 때였다.

몹시 더웠던 기억이 난다.

그 졸업식이 진행되던 광장 옆에 내 조카가 결혼식을 올리는 메모리얼

처치가 있는줄은 촌 사람인 내가 미쳐 몰랐었다.

 

   

 

 

  

  

지금 이 곳이 붐비는 또하나의 이유는 입학시즌이자 서머스쿨이 시작

하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바드 학부의 기숙사에 아들과 딸을 내려놓고 떠나는 학부형들은

이제 정말 자식들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물론 하이 틴 때 쯤, 똑똑한 아이들이 기숙학교나 프렙 스쿨에 들어갈

때부터 일차로 이별은 시작되지만 그때는 아직도 부모가 돈을 대고 격려와

간섭과 잔소리도 좀 할 수가 있는 시절이다.

이제 대학에 들어가면 청년이 된 자식들은 대체로 장학금과 론으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고 부모로 부터의 독립이 시작되는 것이다.

 

'눈물'을 '비겁'과 등가처리하는 미국인들이지만 이 때만은 중년의 주름진

얼굴에 인색하나마 눈물 한방울 흘리고 총총히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제 세상은 변하여서 중년의 백인들만 눈물 한방울 흘리고 가는게

아니라 인도의 '사리', 중동의 '히잡'을 둘러쓴 모정들도 자부심과 아쉬움의

작별을 고하고, 목소리 큰 우리나라 부모들도 교정이 떠나갈듯이 격려의

목소리와 파안대소를 남기며 이 곳을 떠난다.

언필칭 미국에서 세계 최대의 유학생수를 자랑하는 '아~, 대한민국'이

아닌가 말이다.

새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돈이 많기 때문일까, 그들은 다만 하바드 동상의 왼쪽 발을 만지고 또 만져서

또다른 피붙이가 이 대학에 들어오도록 기원을 할 따름이다.

최근에 부쩍 는 중국 사람들도 이 풍속도를 부쩍 따르는 모습이다.

 

 

 

나도 한동안 '하바드 크림슨' 색갈로 VERITAS(진리)라는 글자가 선명한

스포츠 웨어를 입고 돌아다녀 본 기억이 있다.

어설픈 자식 자랑이었다.

'하바드 크림슨'은 '퍼플'로도 불리고 '카디널 레드'라고도 하지만

'크림슨'이 맞다.

서울 대학교의 로고는 VERITAS에다 욕심을 내서 LUXMEA를 덧붙였다.

'진리'에 '광명'의 뜻이 덧붙었는데 잘못 읽어서 VERILUX TASMEA로

읽은적도 있다.

 

 

지금도 옛날 대학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시절로부터 한치도 더 성장

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혐의를 덮어 쓸 수도 있다.

다만 대학에서 곧 은퇴하는 나같은 사람의 넋두리라면 조금 양해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대학 이야기'가 아니라 '대학 시절 이야기'라면 괜찮지 않겠는가.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샜다.

 

예식의 처음은 신랑, 신부 어머니가 작은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부터이고,

그리고 끝은 신랑과 신부가 그 촛불로 가운데에 있는 왕촛대에 불을 함께

점화하고 퇴장의 마치에 발을 맞추면 된다.

 

이 폐막의 순간에 교목께서는 조금 당황하였는지 왕촛대 점화의 순서를 잠시

빼먹을 뻔 하였다.

신랑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제수의 순간적 지적으로 그 순서는 복원되었고

장내에는 안도와 여유의 웃음이 일렁거렸다.

 

식이 끝나고 주빈과 하객들은 세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로드 아일랜드 주의

뉴포트에 있는 Goat Island까지 두시간을 달려가서 피로연을 크고 성대하게

가졌다.

이벤트로 말하자면 너무나 아름다운 섬에서 벌어진 너무나 아름다운 행사

였지만,

젊은이들이 새 출발을 하는 결혼 예식의 본질은 아니기에 여기에 다시 글로

묘사하지 않고 사진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이 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참으로

다행으로 느껴진다.

 

 

보스톤과 케임브리지를 넘나드는 비행정이 있어서 결혼 축하 비행으로

명명하였다.

 

 

 드디어 로드 아일랜드 주의 뉴포트에 도착하였다.

 

 가운데에 서 있는 마이클은 키가 서발장대인데 이미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연방은 아니고)인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의 부인이 이화여대를 세운 아펜젤러 가문의 '3대 손'이라고 강조,

또 강조하였다.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대서양의 낙조가 아름다웠다.

 경북고 47회인 내 동생은 경북 의대를 나왔다.

 

 뒤로 보이는 다리는 물론 뉴포트 브리지라고 하였다.

 

 

 

 

 

 조카의 동기들과 함께---.

 

 

 

 

 

 

 

 

 

 오른 쪽 둘은 내 질녀와 조카사위인데 둘다 미시간 의대를 나와서 지금 신시내티 대학 병원에서

수련 중이다. 질녀도 오빠 따라 학부는 하바드를 나왔다.

  

 

 

 

  

  

 보스톤으로 돌아와서 뉴욕행 버스를 타러갔다.

Megabus.com에서 미리 예약하면 편도에 1불(10불이 아니고), 돌아올 때는 5불에 올 수 있다.

물론 그걸 타고 왕복하였다.

내가 자랑하였더니 신시내티에서 온 조카 사위는 비행기를 10불에 타고 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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