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캐나다 문학 기행

미 동부 문인들과의 여정

원평재 2011. 2. 14. 12:55

 

미동부 한국 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카나다와 북미의 단풍 관광에

4일간 참여하여 다녀왔다.

 

 

(레이크 조지의 단풍 유람선 이름은 '모히칸' 입니다. '라스트 모히칸'의

모히칸 족이 살던 곳이 이 곳 카나다와의 접경지대입니다.)

 

가을비가  며칠째 계속되는 중이었고 또 카나다까지 국경을 넘는

일정에다가 여러해 전에 그 쪽으로 여행을 한 경험도 있고 하여서

사실상 떠나는 날까지도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다.

 

하지만 동부 문인협회 회원에 준하는 혜택을 임혜기 회장이

부여해주며 권유하여서, 나와 특히 집 사람은 다소 어정쩡하게

나선 일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참 잘한 일이었다.

 

 

 

 

 

비록 비는 나흘간의 여정 중에서 사흘을 내리 줄기차게 내렸으나

저명한 평론가 김종회 교수의 문학 강연은 우중 가을 여행을 더욱

운치있게 가꾸었고 뉴 햄셔, 버몬트, 카나다의 몬트리얼(몽 레알),

퀘백(께백), 코네티커트의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트웨인 기념관'

탐방 등은 나에게 오래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고

미 동부 문인일행에게도 인각 되었을 것이다.

 

 

 

 

(코네티커트 주의 하트포드에 있는 마크 트웨인 생전의 집, 부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연도 복잡합니다. 45분마다 한번씩 가이드가 설명하는 투어가

오후 네시까지 있습니다.)

 

 

출발하는 날 새벽에도 비는 내리고 TV에서는 뉴 햄셔에 물난리가

나서 사람과 집들의 피해가 많다고 속보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갈 차는 플러싱에서 먼저 사람들을 태우고 뉴저지

쪽에서는 8시에 포트리, 한일관 앞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어서

나가보니 버스가 한시간이나 늦게 도착한다는 것이다.

모두 러시아워의 비 탓이었다.

 

어쨌든 기다린 끝에 리무진은 도착하였고 서른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마침내 차가 하이웨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하여도 분위기는 크게 뜨지

않았다.

 

김종회 교수가 예술과 외설의 경계선을 줄타기하며 일반 문학 강의를

시작하여도 처음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고지식한 분들은

이거 진한 내용이 너무 나가는게 아닌가하고 다소 시무룩하기도

하였다.

 

레이크 조지 호수에서 두 시간 이상 유람선을 타며 단풍을 즐긴 후에는

적어도 단풍 여행에 관한한은 손해 볼 일이 없구나 하는 확신들이

생기는 분위기였다.

 

 

 

 

 

점심을 중국식 부페 식당에서 나누고 오후에 다시 리무진이 달리며

'문학 강연' 쪽과 '한국 영화 관람' 쪽의 의사를 묻는 가이드츼 말에

일행들은 '영화' 쪽을 택하는 것이었다.

 

제목은 '간 큰 가족들'이었다. 

자다깨다 삼류 영화를 보고나니 카나다 국경을 넘어 차는 몬트리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김 교수의 저 명강의의 진수를 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일행들을 '세상에 간 큰 가족들'이라고 우스게로 놀렸다.

그러자 이른 여행에 아침을 설쳐서 영화나 가볍게 보며 잠을 좀 자고

싶었다고 누가 이유를 대었다.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였다.

 

물론 김 교수의 열강은 다음날 부터 동부 문인들을 완전히 휘어 잡았고

나도 심취하였다.

해박하되 얕지않고 절제하되 상세하였고 겸손하되 카리스마가 있었다.

 

외설을 가장하여 청중을 끌되 끝내 문학혼으로 경건하였고

그가 외워서 사자후로 뿜어낸 단시와 장편의 시들도 여러편이었으니

그의 기억력은 가히 천재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김 교수는 지금 쯤 귀국 비행기를 타고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기회가

있으면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도 강의를 경청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레이크 조지에는 섬이 1600개나 있다고 하였다.

이 곳에서 영국은 인디언과 합친 프랑스 군대를 궤멸시키고 퀘백을

위시하여 카나다 전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다.

 

 

 

 

 

호수변은 아름다웠고 섬들은 기묘한 풍광으로 사람을 사로잡았고

단풍들은 여행객들의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농사 짓고 가축을 키우는 쪽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은 그래서

식민지에서 군대에 동원할 사람들이 많았으며 계속 줄기차게 땅이

많이 필요하였고,

수렵 위주의 프랑스는 인디언들과의 제휴 쪽을 택하였는데

결국은 수적 열세로 영국에게 무릅을 꿇고 만다.

 

 

 

(아름다운 몬트리얼 거리와 올드 퀘벡을 소개할 그림은 다음번에 많이

싣습니다. 영어권 내에서 프랑스어 간판들을 보게되니 연변 자치주에서

우리말 글들을 발견했을 때의 감회가 솟았습니다.)

 

프랑스의 자존심은 지금 퀘벡에서 겨우 유지되고 있으나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난 학기에 중국 연변에서 보내며

우리 동포들의 애환을 접한 내 개인적 체험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몽 로얄 정상에 우뚝 선 성 요셉 대성당, 빠리의 몽마르트르 중간에  있는

성당과 비슷한 인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