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溫故而知新의 하룻길

원평재 2009. 1. 2. 17:47

 

 

고향을 찾는 마음이 환희인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우수어린 여정만은 아니고 무어라고 할까, 항상 만감의 교차입니다.

물론 자주 찾는 길목도 아니지만---.

 

오랜만에 고향,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 모교를 찾았습니다.

새벽 7시 KTX로 달려갔다가 역시 저녁 5시 KTX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방문기"라기 보다는 방문 기록 사진으로 정리하여 올려놓습니다.

 

 

 방문자의 마음처럼 고향의 아침은 잿빛 겨울 하늘입니다.

젊은 날에 이 곳을 찾았을 때에는 이보다도 더 어둡고 낮고 우울한 하늘이었습니다.

 

 

 

 어느새 모교의 정문 앞에 이런 오벨리스크가 서 있습니다.

진리 긍지 봉사를 외치고 가르치는군요---.

 멋부리지 않고 서있는 낮은 교문은 예전 모습같습니다. 친근하고 차라리 든든합니다.

 

  학교 앞 풍경은 어디나 해학으로 의표를 찌르는군요---.

학교 다닐 때에는 대학 신문사의 기자 노릇을 했는데

"지성의 외곽지대"라는 기획 특집을 했습니다.

캠퍼스를 나온 학생들의 발걸음을 좇아서 술집부터 당구장, 음악 감상실,

영화관 등등을 찾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대학인들은 우울한 회색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 싶습니다. 

 

 

 

모교 대학 캠퍼스를 정말 오랜만에 찾을 기회가 생기자 대뜸 우리 학보사가 있었던

학생 회관 건물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기억속에 아직도 생생한 그 건물과 라일락 나무는 온데간데 없고

전기 제어 컴퓨터 학부와 반도체 융합 연구소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내 기억의 저편을 몰아내고 이제 만만치 않은 규모의 액화 질소탱크가 있을 뿐입니다.

 

 겨울 방학에 들어간 캠퍼스의 이른 아침에는 인영이 간데 없고 내가 들고온 가방과 추억을 고르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그네의 외로운 그림자만 연못가에 보입니다.

저 연못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본관이 보이니 그 옛날 계철순 총장님과 새뮤얼 D. 버거 대사의 방문 좌담을 취재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찾아와 붙여봅니다.

 이 곳도 이제 국제화 캠퍼스입니다.

저 아래 불교의 탑신과 그 전래를 생각하며 그들을 보았습니다.

 

 

 

 

 겨울 아침 9시 30분 경, 까치들이 손님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다.

 

 왼쪽으로 조금 보이는 "해시계"의 밑에는 "백년 후의 후배들에게"라는 명제로

"타임 캡슐"을 묻을 기획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듣기 힘든 참신한 기획이었는데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타임 캡슐에 저장할 자료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안과 기획을 맡았던 그 학생 기자 동기는 그후 중앙 일간지의 편집 기자로 근무하다가

일찍 고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모처럼 모교에 발길을 하게된 동기는 이 곳 대학 중앙 도서관 행사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로 크게 지은 도서관 5층에 기증 도서 보관 및 열람실을 만들었는데,

그 기증자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기념식에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쁜 모교 방문의 발걸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약 4500여권에 달하는

한때는 내 몸의 분신이기나 한 것 처럼 애지중지했던 내 장서를 아낌없이 이 곳에 기증하고

이제는 항상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한 터입니다.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효성대학 김동소 명예교수, 계명대 김영일 교수, 도서관장 남교수,

서수생 경북대 명예교수와 부인이십니다.

 

 

 

 

 

 노동일 경북대 총장께서 축사를 하였습니다.

 

 백강 서수생 교수께서 노구를 이끌고 나오셔서 축하패와 기증자 연구 공간을 대학에서 마련해 준 데 대하여

대표로 감사의 인사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담으로 백강 선생께서는 노동일 총장을 사위로 두셨습니다.

그리고 단한번도 총장의 연구실을 방문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여담의 경지를 넘는듯 합니다.

 

 열뫼 김동소 교수가 맨 먼저 감사패를 받습니다.

7000여권의 도서 기증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만주, 몽고어, 연구 서적및 기타

세계 문자학 관련의 희귀 도서를 포함한 공적도 높이 평가를 받습니다.

매년 기증을 계속하는 품새로는 곧 오거서 만권당(五車書 萬券堂)을 이룰 것 같습니다.

 

 

 

 식이 끝나고 전자 도서관을 구경하였습니다.

나도 한때 근무하던 대학의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전자 도서관을 마련하였기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오찬이 끝난 후에 의기투합한 몇사람은 고서실을 방문하였습니다.

참으로 희귀한 고서전적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현토 삼국지는 한문삼국지에 토를 단 책입니다.

 북제는 도서관장의 아호로서 방대한 기증본과 인쇄도구 등, 희귀 자료를 특별히 모아둔 곳이었습니다.

책 모양이 작고 접는 식이어서 컨닝 페이퍼라고 연구가들이 부르는

이 자료는 옛날 선비들이 휴대하며 익히는 일종의 페이퍼 백 같은 책이라고 합니다.다. 

 

 

 

 

일제 강점기의 어떤 병원에서 나온 진료부입니다.

낙태와 신경쇠약이라는 글자가 선명합니다.

 

  

학봉 선생 29세에 퇴계 선생이 글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서 임란 때의 여러가지 일화가

엇갈리고 있음에도 선생의 위인됨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제 친구가 가꾸는 학봉 선생 종택이 크게 있는데 이 서찰을 알고 있는지 한번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 사임당의 친필 휘호입니다.

 

 

 

 

 

 기증 문고실에 있는 기증자 연구 공간에서 내 친구가 연구와 집필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연구 성과를 재임중에도 수행하였지만 이제 이 곳에서 불후의 연구와 저작이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이 곳을 이용하지 못함을 참으로 다행으로 여기는

나의 심정입니다.

 

 옛날 옛적에 고등학교 문예지에 발표했던 내 습작 단편을 친구가 복사하여

헤어질 때의 선물로 주었습니다.다.

 이름 모르는 나라에서 온 연구자와 학생들을 보며 여기 내 고향을 떠나는 순간의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아래는 오찬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인물 사진 촬영에 대략 기겁을 하는 모양과 달리 이 선량한 연변 동포들은 포즈까지 취하여 주었습니다.

연구 논문을 엑셀로 투사할 때 마지막 화면에 기분 전환을 담듯이 그렇게 한 컷 넣었습니다. 

 

 

 

 아래 감사패는 도서의 기증과 함께 얻은 내 마음의 열락에 더하여

덤으로 얻은 또하나의 기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