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눈내리던 날의 절집 풍경

원평재 2009. 1. 28. 17:26

신도시에서 산지도 10년이 넘었다.

강남을 다 버리고 온 것은 아니어서 서울 산다는 말이 입에 붙었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분당 사람이다.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도 귀에 간지럽게 들렸으나 최근 몇년 사이에 강남

불패를 구가하는 함성 때문에 그 말도 빛이 바랬다.

일찌기 신도시로 오는 기회를 놓치고 쳐진 친구들이 이제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기 어려워 표정 관리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복덕방 같은 소리는 치우고 분당 사는 진짜 재미는 길만 건너면 산이있고

산자락 마다 아름다운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동기들 숫자만 분당 메트로폴리탄 에어리어에 50명이 넘게 살고 있다면 누가

곧이 들을까---.

 

분당 살다가 수지 맞춘다고 죽전과 수지로 약간 내려간 친구들, <生居龍仁>이라고 말을 바꿔서

아주 용인과 신갈, 구갈, 구성으로 더 내려간 친구들---,

얼룩소처럼 학교를 섞어서 나온 내 계산법으로 따지면 80명도 더 된다.

 

이 사람들이 또 외롭다고 주일마다 산행을, 그리고 한달에 한번씩은 회식자리를 분당 인근에서

갖는다.

 

 

 

 

두달에 한번 부부가 모이는 날이라도 되면 온전히 시골 장날, 거룩하게 표현하면 축제의 저녁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끌벅적하던 기백들도 세월이 가면서 많이 사라지고 힘도 빠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제는 떼거리로 만나는 풍속도 대신, 두세명씩 조용조용 만나는 목소리가

시세를 탄다.

모두 자연스러운 삶의 변천 과정이다.

엊그제는 세모에 눈이 내려서 마음이 스산하던 차에 평소 목소리 차분하고 글맛나게 글을 쓰는

친구가 차나 한잔 하자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언듯 세사람이 되어서 찻집 순례를 두군데나 하게 되었는데,

세상에!

전에 자주 다니던 등산 길 옆,

조금 떨어져 있어서 무심하게 지났던 절집 안에 전통 찻집이 있는게 아닌가.

이런 곳에 무슨 손님이 있으랴 싶은 마음으로 들어가보니 자리가 반이나

차있었다.

 

 

중년의 남녀가 함께 앉아 있으면 우선 그들을 보는 이쪽의 시선이나

이쪽으로 취하는 그들의 자세가 모두 어색하게 되어버린 것이 이 시대의 특성이긴 하다.

우리는 남정네만 셋이어서 아주 떳떳 당당하였고 일찍 그 안에 들어와 있던

남녀 쌍쌍들은 모두 송구한 표정들이었다.

 

그런 중에도 눈빛이 서늘하여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연상케하는 얼굴도 있어서

생등걸을 때는 찻집은 불길 만큼이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차차 찻집의 내부에 안경 낀 내 약시가 익숙하면서 보니 서늘한 눈빛은 다름아니라

이름 모를 그녀의 안정감 없이 허둥대고 두리번 거리는 눈동자가 연출해낸 착시현상이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 세월이 가면>

 

 

 

 

 

 

한편, 찻집 중앙에서 지붕을 뚫고 나간 이름 모를 교목은 이 곳의 역사성을 웅변하는듯 하였다.

역사성이라, 너무 거창하다면 만남과 이별과 또 재회의 증언목이라고 해두자.

 

"저기 저 나무는 찻집안의 온도와 지붕 밖의 온도차로 곧장 고사할듯도 싶은데---?"

우리가 걱정을 하였더니 키가 관목 수준으로 낮은, 그러나 분위기 만만찮은 아주머니가 모르는 소리

말라고 손을 내젓는다.

"걱정마세요, 끄떡없이 잘자라요."

"저렇게 큰데 또 자라요? 얼마나 되었어요?"

"이 찻집을 지은지만도 15년이 되었지요."

 

 

우리가 배낭에 생수한통과 헌신문지만 넣고 산길을 다녔지 길가에 이런 역사가 존재하고

성장하는줄을 정말 몰랐구나.

한때 우리는 너무 씩씩하여서 그랬을 것이고 이제 와서야 주변도 둘러볼 줄 알게 되었고

저 키큰 교목수에 놀라워하고 관목 아주머니도 눈여겨 보게 되었나보다.

 

찻집 오너가 누군지는 몰라도 그의 솜씨가 아기자기하여서 도예를 구운 솜씨가 예사롭지 않고

수묵채색화도 수준을 넘고 있었다.

 

 

 

 

 

 

 

 

 

 

 

 

 

 

 

 

  

 

다만 주인의 솜씨와 전시욕이 조금 지나쳐서 실내장식이 너무 촘촘하다는 아쉬움도 있었으나

맹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친 이 경내에서 인간의 재주가 조금 넘치는 맛을 보이면 어떠랴.

더우기 실비로 판매도 한다는 바에야---.

다 아름답게 보아주자.

 

우리는 이름도 낯선 전통차를 음미하며 넉넉한 평가를 빠르게 내렸다.

그리고 남녀 쌍쌍들이 보내는 송구한 눈빛을 배웅 인사삼아 등걸 난로에서 구워지는 알밤도

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집의 뒷편은 절집이었다.

천도제를 하며 유품을 태우는 곳도 시커먼 굴뚝과 함게 서있었으나 여기에 담지는 않는다.

도시의 개명한 불자들이 가까운 절집을 이용하는 징표이자 이승을 떠나는 영혼들의 마지막

작별의 터였다.

 

 

 

 

 

 

 

 

 

 

 

어둠이 걱정스러워서 내려오는 발길을 재촉하는데 문득 길의 중간에 절 이름을 크게 쓰고서

밝혀둔 우리의 맹세같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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