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어떤 주말의 강남역

원평재 2011. 2. 14. 01:26

토요일 오후, 도서 출판 관련으로 강남역에 갔다가 집이
있는 쪽의 직행 버스를 타러 가는데 뉴욕 제과 옆 건물의
보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요란한 사이키델릭 음향까지 일대를 덮어서 문득 월드컵
때의 열기가 생각났다.

뒷쪽에서 흘깃거리며 보니까, 키가 농구선수 같은
네 아가씨가 에레끼 콘서트,
아니 일렉트로닉 콘서트를 대로상에서 벌이고 있었다.
연주곡은 제목이 "Bond Bond"였다.

늘씬한 몸매를 원색의 꼭맞는 가죽 옷에 파묻고 겨우 배꼽만
도심에 노출한 네 아가씨가 결사적으로 연주하는 악기는
전자 바이얼린, 전자 첼로, 그리고 전자 피아노였다.
전자 첼로?
내가 잘못보지 않았나?
아니 틀림없었다.
첼로나 콘트라베이스가 바이얼린이나 비올라와 구별되는 점은
크기 보다는 활의 파지 방식이다.
후자는 활 잡은 손이 아래로 향하지만 전자는 그 손이 몸
쪽이다.
전자 첼로라서 몸통이 크지않고 날렵하기는 바이얼린 보다도
더했다.

도심의 주말 오후에 홀연 나타난 이 네 마녀 미녀들은 무얼
노리고 있는걸까?
그녀들의 뒤쪽을 보니 "카푸치니"라는 카페가 입을 쩍 벌리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이제 카페라면 옛날 식의 술집인지 스타벅스 같은 대형
커피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분간이고 뭐고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이곳이 어디인가.
내가 어이 이 강남 성지의 젊은 물을 흐려놓겠는가.

과연 젊은이들은 소지한 폰디카로 연주 장면을 찍어대고 있었다.
내 휴대폰에는 그런 문화시설이 있을리 없지만 있다손 치더라도
초점을 맞출 용기가 있었으랴.
이제 벌써 3부가 끝났는지 4부를 기약하며 도심의 네 마녀가
판촉성 선물을 뿌릴즈음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침 내가 가야할 곳의 직행 버스가 와서 나는 훌쩍 올라탔다.
차가 양재 역을 지날 때이던가 잠자고 있던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에 스타벅스에서 만났던 출판사의 젊은 여사장이었다.

며칠 전에 그 때까지는 이름도 몰랐던 그녀로 부터 전화가
왔었다.

"나폴레옹의 경영학"이라는 책을 하나 내는데 "한불 협회"의
회장이자 어떤 대학의 프랑스학과 겸임 교수인 내가 서문을
써주어야겠다는 요청이었다.
책의 내용은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삼국지 경영학"이었다.
목소리가 촉촉하였다.
이런걸 유혹적 목소리라고 하나---.

요즈음 대학에는 프랑스학과가 인기가 없어서 사라지고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반백년을 산 이후에 겨우 겸임 교수로
대학엘 들어간 것도 이런 시대 사조와 무관치 않다.
늦게나마 운이 트였달까---.

말하자면 정식 교수를 채용하지 않고 직업있는 사람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겸임 교수 제도로 마지막까지 버티자는
대학의 궁여지책이었다.
연구실도 따로 있을리 만무였다.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은 물론 "한불 협회"를 통하여서 온
것이었다.
"한불 협회"는 거창하게 보이지만 주로 여류 화가들이
회장을 맡아해온 소극적 모임이었는데,
프랑스 쪽과 비즈니스를 하는 내가 한 번 판을 벌여보고자
회장에 나서서 거뜬히 회장직을 맡았으나,
결국 나도 큰 일은 못 이루고 이런 서문이나 쓰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자족하고 말았다.



"김 사장! 여사장이 출판업 하기란 참 힘들텐데 데리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나요?"
내가 전화통에다 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내 처지는 광화문 "이마 빌딩"에 사무실이 있는 나홀로
사장이었고 다섯명의 나같은 처지의 사장이  그 곳에서
사무실을 공유하면서 여비서를 한사람 쓰고 있었다.
그래도 사무 자동화가 되어 있어서 큰 불편은 없었다.

여비서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능통하고 컴퓨터도 자유자재인
미모의 노처녀인데 아무리 봐도 시집을가면 불행해질 것만
같은 수많은 이 시대의 전문 여성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이런 느낌을 말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공적인 업무 이외에 비서와의 접촉은 금기시 되어있었다.
인력 회사에서 말하자면 "아웃 소싱"한 계약 관계임으로
비서가 퇴직할 때에도 퇴직금 부담으로 부터 5인의 사장은
자유로운데,
만약 개인적 접촉이 생기면 고용관계에 혼선이 오고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겻가지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여간 첫 통화에서 출판사의 여사장은 나의 소리 큰 질문에
계속 촉촉한 음정으로 답을 하였었다.
"저는 혼자 뛰고 있어요"

맙소사, 기획에서 편집과 교열까지 혼자라---.

"아, 위대하군요. 천재는 항상 혼자랍니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은 2두 마차 성격이 아니라 단기필마형이라고 했어요."
내가 다시 소리쳐 위로하였다.

"그래도 저는 앞으로 김영사의 여사장님, 박사장처럼
큰 출판사를 기획하여 운영하고 싶은데요---."
그녀는 흐느끼듯 항변하였었다.
하여간 그녀와의 만남은 그런 절차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날 장소가 강남으로 된 것은 그녀의 사무실이 강남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퇴근길의 친절을 베푼 때문이었다.
미리와서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은 좀 파리하였다.
말하자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나 꼭끼는 청바지를 입은 다리는 튼튼하게 보였고 프릴이
잔뜩 달린 로마네스크 형식의 블라우스 위에 거만하게 걸쳐져
있는 가죽 덧옷은 이 처녀 사장의 꿈이 예사롭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몇권의 기출 서적과 교열을 본 두꺼운 초고가
처음 만나는 그녀를 대뜸 알아보게 하였다.

가죽 옷과 청바지 속의 여체를 탐닉하다니,
남자들의 시선이란---.
요즈음 페미니스트 여류들이 들고 나오는게 바로 이 시선이라는
문제였다.
고전이라고 학교에서 읽으라는 책 치고 여자를 남성의 시각으로
묘사하지 않은게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의 음흉한 시각이 몸을 훑어
간다는 것이다.

여류작가들이야 언제 남자들의 몸을 먹음직스럽다고 쓴적이
있느냐.
그러나 남성들이 여자들의 몸을 보는 시각과 시선을 따져보자,
우선 남성들은 여체에 대한 묘사부터가 벌써 탐욕으로 시작
했으니
오늘날 자연환경에 대한 수탈의 역사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 되었고
마침내 환경 문제를 유발시켜서 인류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당사자들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그런데 내가 왜 갑자기 남성 폄하의 그런 생각에 상도했을까.
터질듯한 몸매는 적당한 부분마다 표나게 졸라매어 내 시선을
잡았으나,
감출길 없이 파리하고 피곤한 그녀의 안색과
생머리 작은 머리통을 보고 그런 생각이 났을까.

내 시선이 오랜 방황 끝에 그녀의 굳은살이 박힌 검지
손가락에서 겨우 둥지를 틀자 그녀가 조금 더듬거리며 말했다.
섹시한 더듬거림---.

"아직 가제본도 만들지 못했어요. 내주중에 나오면 제가 다시
찾아 뵐려고요---."
"아니, 그 때 봐도 되는데 이 거추장스런 초고는 왜 들고
나왔오. 그리고 저 무거운 출판물까지---."
"제가 엉터리가 아니란걸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김사장, 여자라고 무시하는건 아니고 출판도 대박이 있긴
하지만 강남처럼 비싼 곳에 무슨 사무실이오?"
"아, 저희 종친회를 빌려쓰고 있지요. 그 쪽 일도 좀 봐주고요.
마포의 출판단지 있는 쪽은 주눅이 들죠. 앞으로 파주 쪽에
헤일리 마을이 생기면 싼 사무실이 많이 나온다니까---.
그전에 대박을 터뜨리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요만---."

우리는 인터넷 문화가 만든 출판업계의 단기적 불황과 장기적
처방에 대하여 근심과 희망을 나누며 짧지만 의미로운 오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서문을 써주기로 흔쾌하게 승락하고 내용을 서로 정리한
후에 채근하듯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는듯 하였다.

주말의 오후,
나이 보다 10년은 젊은걸로 자부 내지 착각하고 사는 내가
너무 일찍 자리를 털었나---.

일어나며 나는 최근에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펴낸 반자서전 비슷한 것을 여사장에게 건넸다.
이제 반백년을 넘기는 나이에 무언가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평범한 사람의 반생기를 최근에
펴냈던 것이다.

제목은 "몽불랑에 세우다!"였다.

젊은날에 운이 좋아서 기회를 잡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서
소르본느가 있는 빠리의 "생 제르멩 데 뿌레"거리를 누빈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하여간 무언가를 세우는 척하며 살아온 반생이었다.

제목을 무어라고 할까,
고매하고 명상적인걸로 할까.
그러나 나는 장똘뱅이가 아닌가. 공연히 손가락질 받지.
그런 어느날 삼각지에 있는 국방회관에서 ROTC 모임이
있었는데 건배 제의가 걸작이었다.

"세우자!"
라는 선창에
"빳빳이!"
라는 화답을 하는 새 버전이었다.

그래, 몽불랑에 무언가를 세운 것으로 하자.
무얼 세웠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문법이 안 맞잖아?
그건 청년 장교를 지냈던 사람들도 목적어를 생략했잖아.
국방회관 같은 거룩한 곳에서도.
그리고 프랑스어에 자동사나 재귀 목적어 같은게 있잖아.
그러니 적당히 넘어가자고---.

시제는?
"빠세 꼼뽀제" 같은거야, 과거도 아니고 우리말엔
없는거---.

이렇게 하여 나의 위대한 반생기와 그걸 그린 책 이름이
나온 것이다.
불명료한 어법으로---.

그리고 표지에는 그런 표가 나지 않게 조심했지만
첫 페이지에 곧장 나의 뻥친 성공기와 화려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그런 치사한 책이었다.
비매품은 아니었지만 내 주위에는 무료로 일부 돌리기도한
책이었다.

출판사의 여 사장을 만나기 전에 이 책을 갖고 갈까말까,
내 생각은 반반이었다.

전화상으로 벌써 촉촉한 목소리를 구사하는 출판사의
젊은 여사장에게 내가 반백년을 넘긴 사람이라고 선전을 하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일 더미에 쌓인 그녀의 피곤한 모습을 직접 보면서,
그리고 주말 약속의 이른 종언에 어두운 얼굴을 한 그녀를
느끼면서,
나는 주저함이 없이 졸작임을 전제하고 책을 건넸다.
한마디 위로사에 가름하는 기분으로---.

하지만 막상 책을 건네는 그 순간에는 공연히 젊을 때
가까웠던 친구와 절교하던 순간이 생각났다.
"난 너를 다시 보진 못할꺼야!"

그녀는 종친회, 아니 사무실이 있다는 쪽으로 갔고,
나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6번 출구로 나왔다.
그리고 배꼽이 예쁜 네명의 사이키델릭 마녀, 아니
미녀를 만난 것이다.
이들도 "바네사 메이"나 "유진 박"이 될려다 만
꿈많던 사람들이리라.

조금전의 작은 사건(?)들을 반추하며 정신이 빠졌던
나는 버스 속에서 휴대폰의 전화를 놓칠뻔 했다.

윗 주머니의 휴대폰이 거의 마지막 경련을 일으킬 때쯤
나는 황급히 실고추만한 안테나를 잡아채내며 재빨리
폴더를 재쳤다.

"사장님, 아니 교수님!"
출판사의 여사장이 촉촉했던 아까와는 달리 조금 마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가제본을 등기 속달로 보내면 안될까요. 직접 찾아뵙기엔
제가 워낙 바빠서요."

아까 다시 찾아뵙겠다던 정중한 약속과는 조금 차이가 나는
수정 제안이었다.

바야흐로 반생기, "몽불랑에 세우다!"가 그 부정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인가?
아니야,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말자.

나는 시집간 딸에게 말하듯 전화통에 대고 다음과 같이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김사장, 그러지 마시고 택배로 보내세요. 그게 돈은 좀 더
들지만 빠르고 안전해요."

김영사를 꿈꾸는 그 여사장이 나의 서문을 받기 위하여
가제본을 과연 택배로나마 보낼 것인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팩션이 진정한 사이버 문학
작품이라면 여기에서 두개 이상의 결론을 콘텐츠로
깔아두어야 하리라.

가제본을 보낸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로---.
독자들이 클릭하여 선택하고 원하는 결론으로 가도록.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클릭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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