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팩션 출판 기념회

원평재 2011. 2. 13. 23:24

"팩션 창작집 출판 기념회"의
초대장을 대학에 있는 친구로 부터 받았을 때에는 무슨 의류 패션
행사인줄 알았다.

이 친구가 국문학을 했는데 무슨 패션 행사인가---, 내가 아무리
외국 공관에만 25년간 돌다가 갑자기 대기 발령을 받고 귀국해서
국내 정세나 동기들의 변화에 문외한 일지라도 국문학자가 패션
디자이너로 둔갑할 만큼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았을텐데---.

정말 20여년만에 내가 그의 연구실로 전화를 했더니 마침 통화가
되었다.
우리 둘은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막역지교이면서도 때로는 험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소규모 중소 도시였지만 하여간 지방 명문 중고등을 다닐때는 학교
내에서는 성적으로, 밖에서는 여학생들의 인기면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 나는 외교학과에, 그는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대학교는 같았으나 서로 노는 물은 달라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의 사이는 밀월과 공존과 보완의 시대로 들어
섰으며 한동안 술친구로 젊음을 만끽하다가 나는 고시 공부로,
그는 대학원 진학 준비로 각자 자기의 갈길로 들어섰다.

내가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국 공관을 돌아다닐 때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에 시간강사로 돌아 다녔고 선배 교수의 "가방모찌" 신세라는
푸념을 어느 때이던가 시골 동기들이 벌인 나의 환송 파티에서
털어놓은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경쟁의 눈길을 던질 여유조차 없이 앞만보고
열심히 살았으며 결혼에 즈음해서는 그렇게 경합을 벌이던 소도시의
여성 팬들을 제치고 모두 서울 마누라를 얻었으니 안팎으로 연결될
고리는 모두 끊어진 셈이었다.

이제 우리는 갑년을 눈 앞에 두고 다시 만날 참이었다.
나는 백수의 신세였으나 아쉬울 것은 없었고 그는 아직도 정년이 몇년
남은 노교수였다.

"요즈음 출판 기념회 하는 놈이 어디있나? 만년에 정치판에 나가서
늙은 마누라 고생시킬 꿍꿍이라도 있는 참이야?"
전화통에 대고 내가 기선을 제했다.
"날 촌놈 취급말어. 나도 죽겠다. 제자들의 어쩔 수 없는 강청과
강요에 못이겨 한 30명만 엄선했는데 넌 내 영원한 맞수라서 내가
뽑아준거야. 자세한건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가 멍군을 쳤다.

우리는 기념회 두시간전에 개최장소인 H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일찍 나와봐야할 입장이었고 나는 그날 두가지 약속이 겹쳐서
인사만하고 자리를 옮겨야할 처지였다.
로비에서 반백의 머리털로 우리는 얼싸 안았다.

"이게 무슨 촌놈 짓이야? 그리고 팩션은 또 무슨 소리야? 패션 쇼
하는거 아니야?" 나의 공세.
"이놈아 팩션도 모르고 무슨 대사 노릇하고 다녔어. 요즈음 문화와
예술 모르고서 무슨 국위선양이야." 그의 역공.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시대는 정보화의 시대라서 옛날같이 지식이나
정보가 몇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공유되고 있어서
문학의 세계에도 큰 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실을 너무 많이 알고 있거나 알고 있는걸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의 대부분은 가공된 것일 수 있는데 대중은 그런 부분을
모르거나 눈을 감고자 하고---.

또한 너무나 엽기적인 사실 혹은 현실이 눈앞에 영상으로 시시각각
전개되어서 이제는 픽션, 즉 허구에는 눈하나 깜짝하지않고 오히려
외면을 한다고---.
"소설"이니 "픽션"이니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문학 장르의 팔자가
급전직하해버렸다.
이제 그렇지 않아도 영상매체가 기승을 부리는 판에 마침내 사람들의
의식까지 냉엄하게 돌아섰으니 허구를 리얼리즘, 즉 진실이니 사실주의
니 하고 팔아먹던 소설가가 이제는 주린배를 움켜쥐다 마침내 씨가
마를 판이 되었다.
"소설 문학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여기에 탈출구로 등장한 것이 사실 즉 fact와 허구 즉 fiction을 결합
시킨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였다.
사실을 깔고 허구로 가공한 정도는 되어야 눈길이라도 줄것이 아닌
가---.
그러다 보니 기술적으로는 주인공이나 나레이터가 1인칭 즉 "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자네 주변인이나 사건을 막 써 먹는거야?"
내가 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물었다.
"아니지. 사실은 모두가 가짜인데 일부 진짜인척 해놓는거지."
"그럼 옛날 글쟁이들 소설과 무엇이 달라?"
"옛날 소설이 정보를 가르치는 식으로 쓰여졌다면 팩션은 우리 시대의
공유된 정보를 확실한 사실로 바닥에 깔고 사건이나 인물을 설정하는
거야. 옛날 소설에서는 대통령을 다룰 때에도 가공의 인물이거나
가명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주인공이 역사적으로 실재한 대통령을
경무대나 청와대 어느 방에서 실재로 만나는 것 처럼 써먹는거야.
영화에서도 팩션 장르가 많아.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은 실재로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고 대통령은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가
진행되지. 이건 고도의 전자 기술로 가능해졌고---. 어떻게 죽은
대통령과 살아있는 영화 배우가 악수를 할수 있겠어---, 그게 가능케
하는게 요즈음의 테크놀로지야."

"사실을 잘못 써먹다가 고소 당하겠다."
내가 순간적인 생각으로 반응을 보였더니 그의 얼굴이 좀 어두워졌다.

"팩션이 아니라 픽션일 때에도 작가들은 그런 일을 많이 겪었지.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쓰고 나서 당시 파리에 와있던
미국의 젊은 작가 지먕생들, 소위 국적 이탈자들로 부터 맹공을 받았고
특히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같은 작가는 권총을 들고 쫓아다녔대요.
비겁한 유태인으로 자신을 그 스토리에 투영했다는거지. 헤밍웨이로서야
억울하게 질겁을 한 사건이었지만---. 토마스 울프도 고향 이야기를
바닥에 깔고 허구를 그렸으나 고향 동네 사람들은 그를 경원하였지.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라는 장편은 그런 배경이야. 예전에
연속 TV 드라머로 나온 '페이턴' 플레이스라는 외화도 여주인공이자
작가가 그런 난처한 입장에 빠지더군. 난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건
이번 책에서 모두 빼버렸어."

"자네가 젊은 날의 창작의욕을 만년에 다시 불태우는건 이해가
가지만 무슨 실질적 이득이라도 있나. 이런 글이 베스트 셀러 되긴
힘들 것이고. 베스트 셀러야 여자의 몸틈새 떨림, 그런게 자주 등장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하하."

"예끼! 아니 예끼가 아니군, 우리나라 작가이면서 필명을 마르시아스
심이라고 하는 작가가 쓴 '떨림'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작가의 변이야
따로 있지만, 하여간 제목처럼 여자의 떨림을 무수히 그린건데 책이
많이 나갔어. 나야 베스트 셀러될 능력도 의지도 없고 다만 청년 때의
꿈의 실현과 아울러, 하여간 창작집이 나오면 우리같은 대학 교수는
업적 평가에서 100% 점수를 따지. 논문도 이제는 참신하게 쓸 능력이
소진되었고---, 이건 히히히하고 웃어야겠다."
내 친구는 실제로 히히히하고 웃었다.

우리 둘이 말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차츰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내 친구,
P교수의 얼굴도 손님들에게 근엄했다가 공손해졌다가 변화무쌍한 표정
관리를 시작하였다.

꽃다발 든 예쁜 젊은 여성들도 눈에 들어왔다.
'서른명만 초대했다더니 저 예쁜 여자들은 무어야?"
내가 좀 힐난쪼로 말했다.
"아, 대학원생들인데 초대장 없이 다들 모이기로 했나봐. 밥도 준비
안했어---. 자넨 바쁘다니까 이거나 받아가게."
내 친구가 책을 주는게 아니라 예쁜 투명 케이스에 담긴 DVD 롬을 건넸다.

"이게 뭐야? 책은 안줘?"
"이게 바로 e-북이야. 전자책이지. 이걸 컴퓨터나 요즘 나오기 시작
하는 e-book reader라는 기구에 넣으면 글과 함께 그림이나 동영상
그리고 음악도 함께 나오는거야. 글이 시원찮으니까 그림이나 음악
이라도 즐기시라는 머릿말로 내숭도 좀 떨었다만 하여간 재미는 훨씬
더할거야. 그리고 참, 누드 사진과 그림도 예술을 빙자하여 많이 넣어
뒀다. 모찰트도 나오고 내가 좋아하는 페이지라는 여가수도 출렁출렁
춤추고 노래하지."

"페티 페이지가 언제적 가수인데---."
"아이구 이 밥통. 페이지는 우리나라 여가수야. 페티 페이지도 참
나오긴 하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얼마전만해도 700메가 바이트의 CD에 동영상으로
노래한곡 밖에 못실었는데 이제는 DVD롬에 영화 한편이 들어가니
창작집 한권에 영상과 음악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차피 요즈음은 책이 많이 나가기 어려워졌어. 그래서 전자책을
만들면 각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세개씩은 사 주거든.
학생들은 이걸 다운로드 받거나 그냥 도서관에서 접속하여 읽어보지.
출판사나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의 출판비는 건지는거야.
빈 DVD롬 값도 아주 싸졌고."

"책이 아닌 이런걸로도 업적 평가에서 100%인가 뭔가하는 인정을 해
주나?"
"이 사람아. 이런거라니. 이게 바로 전자책이고 당연히 인정해주지."

이제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영원한 맞수" 어쩌구 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도 팩션인가 뭔가 하는걸 한번 써볼까---.
내가 카이로에 있을 때에 고국에서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지.
마침 그 때 우리는 무슨 축하공연을 준비했던 때였는데 갑자기
취소하라는 전문이 왔었지.
그런지 며칠만에는 다시 성대하게 하라는 전문이 왔었지.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격동의 시절을 한번 그려봐?
아니야, 지금도 나는 그때의 일을 정리하기 힘들어.
교수하는 이 녀석도 고민이 많겠구나,
난 그저 입다물고 있자---.

나는 그날 다른데에서 술을 많이 했다.
그리고 e-book인지 뭔지하는 것도 어디선가 잊고 말았다.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팩션) 모란-동백 & 하이디  (0) 2013.10.10
어떤 주말의 강남역  (0) 2011.02.14
대설 주의보  (0) 2011.02.13
이혼 세태 2  (0) 2011.02.13
기러기 가족 (3-3)  (0) 2011.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