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버그의 사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뉴욕에서 8시간 거리)

원평재 2011. 2. 20. 05:57

 

이곳 피츠버그로 온지도 어언 2주간에 가까운데 눈이 내리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서 이곳이 워낙 그런 곳인가 했더니 이곳 사람들 말로는 자기들도 정말 초유의

사태라고 합니다.

 

오늘도 밤새 눈이 내린 끝에 일부 학교는 휴교라고 하더니 저녁 무렵부터는 마침내

내일은 모든 학교가 쉬고 병원도 쉬고 회사도 쉬고 항공기도 일부 결항이라는 공지문이

모든 미디어에 뜨면서 모든게 정체되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다보니 설국을 만끽할 엄두는 나지않고 황당스러운 느낌입니다.

아래에 양력 설날맞이 리포트를 만들다가 티비에서 Antarctic Blast라는 제목으로 동부 전체의

폭설 리포트를 하고 있어서 조금 맥이 빠지는가 싶기도 합니다.

 

 

 뉴저지에서 큰 아들네가 세배를 하러 정초에 피츠버그로 내려왔다.

부부가 손자 둘을 데리고 8시간을 드라이브하여 왔으니

겉으로는 무리하였다고 나무라면서도 반가운 내색을 감출수 없었다.

그쪽에도 눈이 많이 내렸으나 이어 비가 와서 눈도 많이 녹고, 더 내리지는

않았는데 이번에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눈발을 맞았다고 한다.

아들네와 딸네 두 가정이 풀 멤버로 모여서 오랜만에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더한

family reunion이 되었다.

 

밤 늦게 도착한 아들네는 다음날 새벽 세배를 마치고 아침은 떡국, 이른 점심으로는

만두와 재어온 갈비를 먹고 뉴욕 쪽으로 떠났다.

나와 집사람도 고생을 각오하고 포드 밴에 편승하여 아홉시간 가량 걸려서

뉴저지의 아들 집에 도착하였다.

 

저녁 식사는 포트리 한인 동네로 찾아가서 순두부를 먹었다.

값이 꽤 올라서 9불이 되었으나 돌솥에 해주는 밥과 김치가 여간 맛있지 않았다.

이 곳도 경기가 시원치 않았으나 되는 집은 늦은 밤까지도 북적거렸다.

오랜만에 교포 신문도 여러가지로 집어갖고 오니 오래전에 떠난

객주 거리를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밥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모두 연변 말을 쓰는 품이 전과 다름 없었는데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그때 꽤 많았더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은 얼마나 더 늘었을까,

생각같아서는 북에서도 좀 많이 건너와서 미국 속의 동포마을이 계속

번창했으면 싶지만 이런 중에도 내편 네편, 지역성이 굳을까봐 공연한 걱정이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슬슬 집앞의 허드슨 강변으로 나가서 건너편 맨해튼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랜만에 보는 건너편 마천루들의 표정은 미국 경제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든

일단 의구하였다.

 

  

 

  

 

 

 

 

다음날은 회계사 사무실에  들러 밀린 일을 마치고

이어 전부터 거래하던 은행에 들러서 "PNC"로 주거래 은행을 바꾸었다.

몇푼 되지않는 생활비 이야기이다.

"PNC"라고 펜실베니아 은행으로 계좌이체를 한 것이다.

이전 은행의 머니마켓에 넣어두었던 얼마 안되는 액수는 클로징을 하고

이제는 첵으로 써버릴 수 있도록 하였다.

 

PNC 쪽으로 옮기는 이유가 피츠버그로 이사를 가기 때문이라고

미안해서 적당히 말했더니 

뉴욕에 사시다가 그곳에 가서 무슨 재미로 지내시려냐고 창구의 은행원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그 말에 쇼크를 먹어서 뉴저지의 친구들 중 한사람에게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친구는 당장에 얼굴을 보자고 하면서 전부터 알고있던 네 커플을 소집하여

다섯 커플 열명이 "미나도"에서 저녁을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모두 학창으로는 인연이 없고 오래 이곳에 사는 내 친구 부부의 정선된 교유 리스트에

올라있는 분들인데 두어해 전에 소개를 받은 바 있었다.   

 

 

  

 

 면면들이 모두 지혜와 치열함을 갖고서 뉴욕과 맨해튼에서 성공한 분들인데

그런 배경 보다는 예술의 경지, 특히 음악과 미술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그 진정한 의미의 파악에 모두 일가견을 갖고 나누는 은근한 대화의 세계가

일품이어서 우리는 모두 해피하였다.

 

이날은 특별히 내 친구가 오래 살던 집에 증축한 음악 감상실을 마침내 방문하는

역사적인(!) 밤이 되기도 하였다.

다른 분들은 물론 새집 방문을 벌써 하였지만.

 

골프 연습장을 둘 만큼 후원이 넓은 내 친구는 그런 면적 보다도 음향기기의 설치와

연주곡의 수집에 놀라운 정성을 보여서 그 방면에도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 그는 브람스의 바이어린 협주곡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려고 벼르는 참이었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 이야기는 차라리 진부하여서 화제에 오르다 말았고

프랑소와즈 사강이 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그 영화,

좀 촌스럽게 일본 번역을 따온 "비수(悲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배경이 된 음악은 교향곡 1번 4악장(?)이던가 교향곡 3번이던가 였으나

우리는 브람스가 쓴 유일한 바이얼린 협주곡으로 이 밤을 즐기고자 하였다.

 

 

 

 

 

우리는우선 집 주인의 음악 감상실 증축에 관한 이야기를 거실에서 영상자료와 함께

재미있게 들었다.

이어서 동기회 사이트에 매우 진지한 친구가 올린 기독교에 대한 애증과

고뇌에 찬 글도 읽어 보았다.

동기회 사이트는 물론 나와 내 친구인 집주인만 해당되는 곳이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모두 그 애증의 글에 공감하면서도

믿음이란 "믿습니다"의 경지가 아니겠느냐고 정리하면서

일단 저 endless debate에서 빨리 빠져나오려고 하였다.

   

 

 

이층으로 장을 옮기면서 우리는 대망의 브람스를 만나기 전에 우선 아카펠라 곡으로

"Amazing Grace"를 감동 깊게 먼저 들었다.

그 순서는 아마도 집주인, 내 친구가 조금전에 소개했던 글을 일종의 blasphemy,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새로 마음 편히 갖으시라는

"은혜"의 순서 같기도 하였다.

우리는 먼저 읽은 맑은 글이나 나중에 들은 역시 맑은 아카펠라 곡이나 모두

"놀라운 은혜"에 다름없다는 순정한 마음으로 브람스를 만났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한창 때의 얼굴로 지휘를 하고 있으니 베를린 필과 유태인 이슈가

매우 극적인 때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문제 보다도 사람은 저렇게 힌창 때가 역시 좋은가싶다.

 

 바이얼린 연주는 이자크 펄먼이었다.

정경화의 컬렉션이 더 좋다는 개인적 취향은 있었으나 오늘 주인께서 고른 DVD도 단연코

감동이었다. 

핀커스 주커만을 포함하여 음악계에도 유태인 로비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의문에

그렇지 않다는 근거있는 반론이 나왔고 비올라의 핀키가 쓰는 과리나리는 dark sound라는

말도 나왔다.

자정이 넘어서야 모임은 끝났다.

 

나와 집사람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맨해튼에 있는 그레이 하운드를 타러 나왔다.

 

 

인터넷 예매를 한 티킷에는 승차 한시간 전까지 나오라고 되어있어서 두시간 전에 나왔더니

가다가 먹을 도시락을 하나 사고도 시간이 남아서 얼른 42번가, 타임즈 스퀘어로

사진을 찍으러 나왔다.

이른 아침 추위가 여간 아니어서 조금 사진을 찍다가 얼른 들어왔다.

5년전 초겨울, 이곳 티킷 박스에 오페라인지 뮤지컬인지 좌우간 싼 티킷을 구하러

나왔다가 배앓이를 하고 결국 담석 수술까지 했던 기억이 나서 얼른

그레이하운드 대합실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뉴요커들의 아침 표정은 씩씩하게 보였다.

 

 

 

 

 

    

 

 

 

피츠버그로 내려오는 겨울 길은 멀고 지루하였다. 

뉴아크, 이스턴을 거친 버스는 알렌타운에서도 한 20분 가량을 섰다.

전에 전혀 알지못했던 이곳도 꽤 큰 중소 도시로 우리나라의 시골 읍 같은 분위기가 있어

인상적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시골 매표소 같은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이런 키를 내주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물건이었다.

문을 잠그고 사진부터 찍었다.

 

  

 

 

Catch 22~~~!

모퉁이를 도는데 이런 간판이 보인다.

"Catch 22"라고 하면 조셉 헬러라고 하는 미국 작가가 이차대전 후에 쓴 부조리 소설의 제목이다.

"제 22 규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공군 폭격기 조종사의 이야기는

블랙 유머로 가득해서 빠져나갈수 없는 인간 조건을 나타내는 추상명사로 승화되기도 했다.

이 미국의 시골 바닥에서 소외와 부조리의 담론을 접하다니---,

그래서 아래에 보이는 시골청년들의 모습이 더욱 절절해 보이기도 하였다.

  

 

  

개그린 버스, 그레이 하운드는 펜실베니아의 주도 해리스버그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30분 동안 정차했는데 피츠버그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만 했다.

느슨하게 온 버스와 달리 새 버스는 승객이 꽉찼다.

모두 피츠버그 행이었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다시 피츠버그로 돌아왔다.

눈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