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별전 소양강 처녀

원평재 2014. 3. 28. 16:16

 

 

 

 

 

 

 

 

(단편 소설) 

별전 소양강 처녀

                                                                                                                                                                

국제 펜 대회가 경주에서 끝나고 나니 해외 거주 문우들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입국 할 때는

따로따로 인천공항을 통하여 들어와서 KTX나 셔틀버스를 타고 바로 경주로 내려가느라고

경황들이 없었다. 이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는 밀린 연락들의 난무였다. 내 친구, 상미의

표현으로는 "난리 브루스"였는데 좀 점잖게 고쳐 봐도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넌 왜 안 내려왔니?"

대학 다니며 수필 몇 편으로 등단을 하면서 생긴 문우회가 나중에 단체로 가입을 할 때 내 이름

석 자도 올리고 연회비도 빠지지 않은 펜클럽 조직이었다. 아마도 국제 펜 대회를 유치했을

때의 회원 확장 기회였던가 싶다. 하지만 문단과 마찬가지로 거기도 이럭저럭 거리를 두고

살아 온 터였다.

"시집 간 딸, 해산날이 오늘 내일하고 있어."

내가 살짝 거짓말을 하였다. 오래 불임이던 딸이 인공수정에 성공했다는 말을 몇 달 전에 듣고

확인했으니 큰 거짓말은 아니고 살짝 거짓말 정도라고나 할까. 사실은 그런데 가봐야 청중

으로서의 역할에도 별로 자신이 없고 또 안재혁이 온다는 소식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네 딸 정혜가 애를? 축하, 축하야! 그건 그렇고 재혁이가 널 찾더라. 참가자 명단에서."

"어찌 그리 잘 아니?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니?"

"응, 관계가 깊어. 내가 네 친구라서. 호호호."

상미가 호들갑이었다.

"재혁이와는 그때 대학 다닐 때 문우 회에서 글공부 같이 한 인연 밖에는 없어. 너도 함께 잘

알잖아."

"그래도 재혁이는 영희 너를 더 좋아했잖아."

"그때 김영희 좋아하지 않은 남학생 있었으면 나오라고 해 봐, 호호호."

안재혁은 그때 소설을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억은 희미하지만 습작들이 아주 좋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았으면 이 땅에서 문학 활동이 요란할 뻔도 하였는데 그리로 가서는

그로서리 스토어를 크게 하면서 돈을 잘 번다고 가끔 소문이 풍편에 날아왔다. 그는 이민을

가기 전에, 내가 열 살도 더 많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일찍 한다니까 공연히 막판에 열불을

내었달까.

나는 부모님이 정해준 순서를 따랐다. 여자대학 공주과가 내 전공이었으니 유학생활을 오래

하다가 들어와서 대학에 자리를 잡은 지금의 남편과 덜컥 결혼을 한 죄밖에는 다른 게 없었다.

사람 사는 게 뭐 다 그렇지 어찌 소설에서처럼, 아침 드라마처럼 그렇게 정말 드라마틱한

경우가 얼마나 될까. 어려운 시절 겪어내고 권태기도 극복하고 아이들 시집, 장개 보내고

불임의 딸이 인공수정으로 쌍둥이가 배속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이렇게 사는 것만도 또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재혁이 걔가 사실은 나 말고 실제로 가슴앓이를 한 케이스가 있었어. ROTC 훈련 마치고

소위로 춘천에서 근무를 했잖아. 언젠가 진짜 그때의 드라마를 단편 소설로 쓴 걸 내가 어떤

문예지에서 봤는데 그래도 내용을 많이 감추고 있더라."

"그래? 난 캐나다에 살아서 통 몰랐네. 재혁이는 미국으로 이민가고도 소설을 썼구나. 난 걔가

둔이나 많이 벌고 그저 잡문이나 교민신문에 끄적대다가 이번 국제대회에 얼굴을 내미는 줄

알았지. 나처럼 말이야. 장개도 잘 들었다지?"

상미가 말하였다. 거의 수다 수준이나 나는 기꺼이 접수하였다. 얼마만인가 말이다.

"너 ‘장개’니 ‘둔’이라고 하는걸 보니 가회동 사투리가 아직도 그대로네?"

"캐나다 이민 보따리 신세니까 옛날이 굳었어."

다 흩어지고 삭아버린 줄 알았던 문우회가 다시 뭉쳤다. 놀라웠다. 나이 탓도 있겠지. 식은

열정을 지피는 감상의 불쏘시게, 그게 문학 행사가 아닐까. 글로 한때 바람났던 사람들에겐

말이다. 진짜 글로 생명을 건 사람들이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 재혁이 그 녀석이 ROTC

통역장교가 되어 춘천에서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키스 정도는 했을 것이다.

나 시집가기 전에 첫 키스의 추억이라도 남기고 가지 그냥 훌쩍 춘천 여자를 버리고 내빼서

상미 말마따나 객지에서 둔이나 벌어먹고---, 나쁜 놈. 상미는 북촌 가회동 쪽이었고 나는

서촌 옥인동 쪽이었다.

재혁이는 충청북도의 음성근방, 일죽? 이죽? 아, 삼죽이라고 하였다.

다시 뭉쳤으나 일정들이 바쁘니 짧은 문학기행, 하루 정도의 여행이나 하자. 캐나다에서 온

상미가 주선을 하여서 정한 데가 남춘천 못 미쳐 김유정 문학촌이었다. 청량리에서 특급을

타야 된다는 재혁이의 주장은 혹시 김유정 역에 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박한수 시조시인의

이의제기로 상봉역 보통 열차로 바뀐 모양이었다. 일곱이 모였는데 여자는 나와 상미 둘이었다.

 

오랜 만이긴 하여도 서울의 허우대 멀쩡한 남자들 이야기는 그만두고 재혁이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자.

한마디로 많이 변하였다. 원래 그는 주장이 안으로 강하기도 했으나 말 수 적고 음전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 많아졌고 특히 영어를 많이 섞어 써서 처음에는 인격을 깎아먹었다. 상미가

지적을 하자 그는 한 번도 영어를 더 쓰지 않았다. WC나 토일렛도 쓰지 않고 변소라고 하였다.

"얘, 숭해. 화장실이라고 해."

상미가 지적했으나 그는 변소라는 말을 세 번인가 더했다.

"저 녀석, 당이 생겼나? 당뇨 말이야."

의사하는 강정훈이 그가 변소로 간 사이에 말하였다. 처음 재혁이는 나에게 "우리 오랜만인데

허그 하자"라고 말하며 전철역에서 잠시 나를 어깨위로 껴안았다. 그날 밤 헤어질 때는 "우리

다시 껴안자." 라고 작별 의례를 제안해서 분위기를 데웠다. 모국어가 얼마나 좋은가. 그가 내

등어리를 잠시 쓰다듬으며 손가락이 스치우던 기억까지 생생 난다. 쓰다듬는 건 남녀칠세 허그

규정에선 반칙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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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 은행에서 빚을 내고 할부로 비행기 표를 사서 왔지만~~~."

이런 말로 그는 항상 서두를 장식하며 그날의 비용을 모두 댔다. 아니 닭갈비와 수육이 주요

메뉴였던 그날은 아무것도 아니고 떠나기 전날, 시간 되는대로 너 댓 명이 다시 만났을 때에도

크게 쏘았다. 유명한 이름의 호텔이 남산 말고 강남 대치동에도 있는 줄을 재혁이 때문에

알았다.

로비나 데스크가 호텔 꼭대기 층에 있고 일층에는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입만 벌리고 있어서

또한 정녕 놀랐다.

빚을 내어 왔다는 사람이 6성 호텔에서 잔다고 하면서 거기 지하에 있는 바아로 문우들을 초치

하여 첫날 이른 저녁시간에는 비싼 칵테일로, 밤이 깊어지면서는 와인이 곁들인 정찬으로

우리를 영접하였다. 그 다음날 저녁은 근처의 무역회관 꼭대기에서 우리를 대접하였다. 이건

물론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의 이야기이고 춘천 이야기가 빠졌다.

춘천행 전철은 주말이긴 하였지만 복잡하였다. 박한수 말로는 평일도 그렇다고 한다.. 모두

지공세대 그러니까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는 세대 때문이라고 나라의 장래와 국가 재정을

근심하는 대화가 오고가다 금방 김유정 역에 도착하였다. 문우 중의 하나가 마침 강원대학교

에서 민속학 관련의 교수를 하고 있어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예전 문학동인들 중에서 춘천과

관련 있는 사람이 또 하나 더 있는 걸 몰랐던 셈이다.

문학 기행을 이리로 오게 된 동기가 꼭 안재혁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생각을 하니 웬일인지

적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름이, 이름이 현길언?

현 교수는 내게 허그 하자는 말은 않고 씩 웃더니 상미에게만 악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안재혁

이를 한대 두드려 팼다.

"야, 임마. 내가 너 상 받게 해 주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주위에서 욕만 먹었어."

"무슨 상? 언제?"

재혁이가 진정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참, 이렇다니까. 여기 춘천에 예맥 예술제가 매년 가을에 열리고 예맥 문예상이라는 게

있잖아."

"그래? 그런데 예맥은 또 뭐야?"

"기가 막혀서 원. 여기가 예와 맥의 땅이잖아. 옥저, 여진, 숙진, 북방 기마민족 그런 것도 몰라?

미국 가더니 사람 버렸네. 지금도 강남에 예맥 화랑이 있더군. 이곳 출신이 주인이라고 하지

아마."

현 교수에 따르면 지방자치제 이후에 지역 문화행사가 경쟁적으로 생겼는데 이곳은 예맥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행사의 장르별 최고상으로 "예맥 대상"

을 제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맥 땅"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지금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절반에 가까운 현실에서 너무 배타적이 되어간다고 하여, 취지를 "예스러움의 맥을 잇는 행사"

로 조정하고 새로 "예그린 상"도 대상 다음으로 추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안재혁이

쓴 단편이 문학방면의 물망에 올랐다는 사연이었다.

"내 작품이 무슨 자격으로?"

"내가 문학은 잘 모르지만 옛날 춘천에서의 연애 이야기를 썼더구만. 군복 입었을 때 이야기."

"나이 들어서 젊은 날의 꿈과 끼가 발동하여 국내 문예지에 단편을 올린 적이 있지. 한 30년 전

이야기를 재구성했는데. 아하, 그래서 예그린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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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현 교수의 노력도 헛되이 다 된 일이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는데, 심사

위원 중의 한 사람이 결사적으로 막더라는 것이다.

"뭐하는 사람인데? 또 교수야?"

재혁이 물었다.

"아니야, 재정적으로 뒤를 좀 대는 사람 같던데 잘 모르는 사람이야. 혹시 자네 단편에 나오는

인물과 무슨 인연이 닿는 건 아닐까? 나쁜 쪽으로 말이야."

그가 말하면서 문예지를 한권 꺼내서 돌렸다.

아하, 그렇구나. 내게 무언가 짐작이 갔다. 아닐지도 몰랐지만. 내가 그 단편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안재혁이 슬쩍 출판사를 시켜서 내게 보냈던지, 아마도 그렇게 작위적으로 보낸 건

아닐 거야. 자기 이야기를 쓴 건데. 아니야, 맞을지도. 자기 이야기를 순치하고 많이 고치고

감추었으니 내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뜻에서라면---. 내 마음은 갑자기 불확실성으로

흔들렸다.

아무튼 우리는 김유정 촌에서 해설사의 이야기도 듣고 의미 있는 한 나절을 보냈다. 다음

기회가 닿는다면 그때는 미리 맞추어서 실레마을도 돌고 하루 종일하는 문학코스를 잡으리라,

모두들 입을 모았다. 현 교수는 이곳 촌장이자 소설가 전상국 강원대 은퇴 교수를 갑작스런

일로 모시지 못하게 되어서 내내 미안해했다.

일행은 김유정 촌을 둘러보고 춘천 최고의 막국수 집에서 막국수도 먹고 닭갈비도 뜯고 동동주

도 마시며 문우의 정을 만끽하였다. 그런 연후에 소양강에서는 소양강 처녀 동상도 만나보고

막국수 집에서 내 준 봉고차를 타고 겨울연가의 준석이네 집에도 잠시 다녀왔다. 모두 영상으로

만 보았던 곳이라 감회는 새로웠다.

재혁이는 봉고 속에서 여기 서부 시장은 어디메뇨? 춘천역에 있던 미군부대, 페티 페이지 아니

캠프 페이지는 완전히 빠졌네! 의암호는 어디로 가요? 감탄사인지 독백인지를 내뱉었으나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 음성이 탄식성이라는 것은 아마도 나만 의식했으리라.

현교수가 돌린 책은 장소를 옮아가며 일행의 손을 탔고 내 손에는 맨 나중에 돌아왔다. 내가 그

책을 갖고 가겠다고 하여서 그렇게 된 순서이기는 하였다. 내가 이미 그 책을 읽었노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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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거의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다소 근심스러운 얼굴로 마누라의 야밤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래서 문제야."

"왜 도망 간줄 알았어요? 호호호. 별보고 들어온 건 결혼 후 거의 처음입니다. 별 보러 나가서

외박을 하신 건 당신 독점이었구요."

남편은 이제 정년을 바라보지만 천체 물리학자로 이름이 좀 있는 사람이다. 국제 케플러

학회의 평생이사로 새별이나 운석의 이름을 짓는 일에도 꼭 확인 사인을 해주어야 국제적

공인이 되는 그런 위치에는 도달한 사람이었다. 남편 덕택에 “도플러 효과”라는 어휘 정도는

들어 알게 된 내 삶의 내력이기도 하고. 내가 나만의 작은 독서 방으로 들어가며 쇼울더백에서

그 문예지를 꺼내었다

"아이구, 국물이 다 묻고 헤진 책이 예전 문학 동지의 작품집인가 보네?"

남편이 오랜만에 할머니 다 된 내게 관심을 표하여서 속으로는 기쁨, 겉으로는 표정을 관리

하였다.

"왜 아니래요? 명작을 돌려보다가 내 손에서 멈추었어요"

"보아하니 고추장에 새우젓 흔적까지, 문사들이란, 하하하."

"그러지 마세요. 닭갈비의 고장이라서 그랬어요. 허벌한 망원경으로 몇 백 광년을 내다보는

분이 아녀자의 손아귀 책에 묻은 고춧가루를 어이 관심하시며~~~."

"앉아서 삼천리~~~."

남편이 말하였다.

"서서 구만리."

내가 화답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를 보충해서 글을 늘리려고 해요. 여보."

"어?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작가가 그런 식으로 큰 틀 속에 여러 이야기를 이어나가서 그걸 액자 소설 형식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아예 몇 사람이 차례를 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도 해요."

"그게 무슨 창작이오?"

"그렇지만은 않지요. 당신 논문 하나 작성하는 데에도 여러분이 함께 일하고 연구하여 교신

저자로 이름을 넣고 공동연구자 이름도 여럿 넣찮아요. 그런 개념과 유사하달까."

나는 내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안재혁 작가가 쓴 단편을 펴고 다시 꼼꼼히 읽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한창 나이 때에 쓴 것 같아서 치기가 들어있기도 하였으나 그건 순수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좋게 보면 정겨웠으나 전체적으로는 슬펐다. 특히 작중의 여성 인물, 연이로

부터는 감정이입이 되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이야기를 접목하기보다 따로 그저 병렬

해 보이는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큰 제목은 평이하게 “소양강 처녀”라고 새로 지어냈으나

액자 속의 이야기는 재혁이가 처음 쓴 그대로 "두 바이올린 이야기"라고 그냥 살렸다. 물론

그가 쓴 부분도 꽤 많이 고쳤다.

이제 새 시대의 총아인 전자 책 방식이 생각나서 배경 음악도 염두에 두어보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넣을지 멘델스존의 현악이 들어가야 할지는 종내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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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이올린 협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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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력으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다. 춘천 서부시장의 허름한

목조 가옥 2층에 한자로는 심혼"深魂", 우리말로 "시몬" 다실이 있었다. 지난 세기의 표현이니

좀 촌스럽긴 하지만 순정한 뜻이 담긴 정서가 뭉게구름처럼 다시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군단 사령부가 있는 “샘밭”으로 브리핑을 하러 출장을 갈 때나, 브리핑 일이 끝나 내가 배속된

부대로 돌아 갈 때나, 주말의 서울행 기차 혹은 직행 버스를 탈 때에도 서부시장 정류장은 꼭

거쳐 가야 할 환승장이었다. 그때는 영화 "터미널 스테이션(Terminal Station)"을 감동 깊게

본 뒤끝이어서 우리 부대의 학군단 출신 소위들은 곧잘 그 환승장을 그렇게 영어로 불렀으나,

지금 세상을 둘러본 안목으로 이야기한다면 뉴욕의 센트럴 스테이션 같은 역할과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인근에는 미군부대 캠프 페이지가 있었고 왠지 어두운 분위기, 그리고 모든 것의 집산장---.

그런 곳, 그런 환경 속에 고전 음악 다실 "시몬"이 존재한다는 것은 좀 기이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이든 중년 부인이 젊을 때 고전음악을 좋아해서 판을

모으다가 생활에도 보탤 겸, 자기 집 2층에서 음악 다실의 문을 그때 마침 열었다는 우연한

일과 또 바로 그때 쏟아져 들어온 젊은 장교들의 지적 목마름이라는 필연이 묶어져서, 그곳은

군복 입은 초급장교들의 사랑방이라는 필연적 장소가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순수한 역할도 컸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소위 계급장을 단 "전우"

한 명과 버스를 기다리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은 차라리 버스표를 물리고 싶을 지경의 동화나라

고성 같았다. 첫눈에 벌써. 무심코 시간이 조금 남아있어서 두 젊은이가 삐거덕 거리는 계단을

바삐 올라간 공간에서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얼린 협주곡 D장조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슬피

울음을 참는 듯 흐느끼더니, 이윽고 복받치는 감정을 터뜨리고 있었다.

디스크자키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짙은 머릿결과 가끔 밖을 내다보는 꿈꾸는 듯한 눈매만 겨우 보일 뿐, 그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잠깐이나마 화가 프리다 칼로의 모습을 연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보면. 연주가 아직도 조금 남았을 때쯤 버스 시간표는 거의 출발 시점을 알리고

있었다. 서둘러 우리는 다시 계단을 삐걱거리며 내려왔다.

한편 이 때는 이미 다른 경로로 군복을 입고 장교가 된 두어 해 학교 선배이자 나중에는 막역한

친구가 된 A가 춘천에 먼저 와 있었다. 다음날 아침 군용전화로 나는 목소리에 단내음을

풍기며 그에게 시몬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그 곳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주말에

만날 약속을 그리로 하였다. 나 보다 그냥 나이로도 두어 살 많았던 그는 정신연령은 훨씬 더

조숙하였다. 그 때 나에게 대한 A의 역할은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의 싱클레어에 대한

막스 데미안과 같았다고나 할까.

"아니, 자넨 항상 한발 빠르네---"

내가 데미안에게 말했다.

"그래도 여기 시몬 사람들은 곧 자넬 더 좋아하게 될 걸---"

데미안이 예측하였다.

그의 예측은 결국 2/3쯤 맞았다.

"심혼 다실"의 소유자인 중년 부인과 그 남편이 되는 고급장교는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돈을 만지는 그 집 딸 정희, 부인의 남동생으로 지배인 겸 화가인 L형, 그리고

부인의 여동생으로 디스크자키를 맡은 연이 등이 나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내 성격이 별로

붙임성은 없어도 거기 군인도시 분위기에서 이방인처럼 처신하는 자세가 차라리 모두에게

부담 없이 전달되었나. 모두가 코를 박고 있는 현장에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떠나

가리라---.

사실 이런 태도는 군인으로서의 기본자세는 아니었다.

어쩌면 적당히 군복의 제약으로부터 일탈해 보고 싶으면서도 방법이 미숙한 내가 이 시몬

다실에서 주연급의 하나로 행세하게 된 것은 순전히 데미안의 역할과 공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도 할 수 있었겠다. 인기는 공유되는 속성이 아님을 진작부터 투철하게 깨닫고 있는

현명한 데미안이 왜 나를 자신의 영역으로 위험하게 끌어들였을까---.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으나 데미안과 L형은 무슨 이권거래도 있는듯했다. 그때만 하여도

군수품이 시중에서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데미안은 군수품을 관리하는 장교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래서 L형만은 데미안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면 예측은 2/3가 맞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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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서부시장의 시몬 다실은 젊은 딜레탄트 장교들의 성원에 힘을 입었달 까, 하여간

호황을 누리다가 마침내 춘천의 중심부로 진출하면서 이름을 "보리수"로 바꾸었다.

개명의 내력은 모른다. 아니 듣고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 식구들에게는 모두 겨울

나그네 같은 분위기가 있긴 하였다. 또 그때만 하여도 춘천은 겨울 나그네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군인들이 그 대표선수들이었다. 하여간 개업 떡을 얻어먹을 때

쯤에는 신임소위들도 고참이 되어갔고 마침내 나도 제대 날짜를 꼽게 되었다.

제대가 겨우 한 달이나 남았을까.

디스크자키, 연이가 저녁 초대를 하여서 지금으로 치면 퓨전 경양식점에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얼음이 녹고 있는 춘천의 초봄 저녁을 즐기며 무작정 의암 댐 쪽을 걸었다.

제대날짜는 그 계절의 어느 때쯤이었다. 군용트럭이 전조등을 올리며 옆으로 질주해갔다.

가끔 차에 탄 군복으로부터의 야유도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내가 돌아가자고 했고 아쉬운 듯 디스크자키는 말을 따랐다.

소심함이 젊은 날의 내 주특기였나 보다. 적어도 호연지기는 아니었다. 독신 장교숙소로 돌아

가자면 늦은 시간이라 위병소 통과 등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그녀의 집이 있는 서부시장까지

숙녀를 모시는 신사도를 나는 지켰다. 거의 그녀의 집에 다다랐을까, 갑자기 카투사 복장의

사병이 그 집의 대문에서 튀어나오더니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디스크자키를 끌다시피 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런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리고, 무언가 말리는 소리 속에 가족들이 분명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럼 이제 내가 있을 분위기나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곧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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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데미안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그는 이미 월남 파병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녀와 춘천 출신의 그 카투사 병사는 어릴 때부터 친했는데 한동안 서로에게 메몰 되어

지내더니 요즈음은 거리감인지 괴리감인지 하여간 문제가 생긴 것 같더라. 지난여름에는

소양강에서 여자는 비키니를 입고 남자는 라이카 카메라 들고 촬영 해프닝을 벌이며 난리를

쳐서 사람들을 모으더니---, 지금은 분명 둘 사이에 사고가 났어, 사고가---.

그의 말이었다.

데미안의 얼굴은 시종 우울하였다. 끝에 가서는 분개한 어조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제야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다.

맞다!

데미안은 그녀를 놓친 것이 분하였다기 보다 그 동안 보아왔던 그녀의 그런 모양과 행동이

분한 듯 했다. 아니 그 말이 그 말인가---. 나와 그녀가 밤중에 가던 의암 댐 인근에는 그녀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거기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카투사가

그녀를 때렸다고 했다.

"때린 건 말이 안 되지만 열 받을 일은 했네!"

단호한 나의 반응이 당시에는 당당하고도 결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두 철이 덜든

시절의 턱없는 자기본위, 세상에 분명 존재하는 가련한 마음 같은 것을 모르던 오만방자한

시절의 철없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단호한 나의 태도에 데미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눈치 하나는 빨라서---. 하지만 가련한 여자 하나를 구제하라는 건 아니야. 될 일도 아니고

---."

"지금 말은 친구간이라도 좀 주제넘게 들리네. 그만두자. 그녀가 날 속이거나 이용하려던 것은

절대 아니었을 거야."

그래 내 생각이 맞았을 것이다.

춘천은 군인도시 답게 항상 젊은 남자가 잉여되는 곳이다. 아니 흘러넘친다는 표현이 더 정확

하고 솔직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에게는 최근 이런저런 남자관계가 복잡하게 생겼고

아마도 디스크자키의 성품으로는 갈피를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학군 장교단 중의 하나가 일을 벌였나. 특히 소위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관계의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디스크자키의 꿈꾸는 듯 한 눈매를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때 한참 유행한

노래, 잡히지 않는 것을 꿈꾸는 내용의 "스페니쉬 아이즈"에 꼭 맞는 그런 눈매를 그녀는 소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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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색슨 계통의 "아름다운 브라운 아이즈"에 나오는 그 영리한 눈매와는 거리가 한참 있는

그런 분위기의 소유자가 연이였다. 어쨌든, 내가 그런 그녀의 눈매를 좋아한 것이 사실이자

진심이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머물 수 없는 때였다. 멋진 신세계를 꿈꾸고 노리다가 그쪽

비행기를 못타면 하다못해 그때 막 터진 아라비아 열사의 신기루라도 잡아야할 형편이 당시

우리 젊은이들의 팔자였다.

그런 운명 속에는 그녀와 관련된 어떤 가능성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앞으로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난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갖고 있으리라. 인연이란 어찌 이다지도

까다롭단 말이냐. 제대용 더플 백의 목울 조이며 나는 "보리수"로 전화를 했다.

좀 거창한 표현을 써보자면 그녀와 최후의 만찬을 갖자는 제의였다. 반대를 못하는 수줍은

목소리가 무척 반기며 제안을 수락하였다. 만날 장소는 우선 "보리수"로 하였다.

음악 찻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이

무겁고도 안타깝게 흘러나왔다. 이것은 공식이었다. 나는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암울했던 일생과 더불어 어둡고 깊은 음악세계 속으로 침잠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당연한 말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은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룰을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느라 항상 꿈꾸는 눈매를 탕진하고 있었다.

이윽고 차이코프스키가 끝나고 멘델스존의 감성적인 바이얼린 협주곡이 흘러나오면서 그녀가

디스크자키 룸에서 나왔다. 전에도 내가 찻집으로 들어오면 항상 그런 순서였다.

짙게 화장을 했으나 탁자 건너편에 앉은 그녀의 왼쪽 눈 아래가 아직도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자를 때리다니 그놈도 틀린 놈이군---, 후려치는 시늉만으로도 안되는데---, 둘 사이는

끝장이 나는 것이 좋을 성 싶었다.

"좋아하시는 차이코프스키를 다 들으셨으니 이제 나가시죠"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나가요. 상관없지만 사실 더 좋아하는 건 이제 나오네요. 차이코프스키가 좋은 건 사실

이지만 멘델스존이 나에겐 더 어울려요---. 차이코프스키의 세계 보다는 저 멘델스존의 달콤

하고 낭만적 분위기를 주욱 좋아했지요, 단조에서 나오는 애상이 가슴을 쳐도 치유 회복의

힘을 느껴요. 멜로디도 쉽게 한 번에 다 외울 수 있어서 나 같은 속물은 우쭐할 수도 있고---.

물론 단조가 갖고 있는 애조를 나 같은 에피큐리앙이 좋아한다는 게 모순 같지만 그런

인간들이 대략 낭만주의자이니까요. 그 자들은 너무 치열한건 감당하기 곤란하지요. 그래서

차이코프스키로 내 영혼을 세수하고나서 멘델스존으로 화장을 한달까요. 건방진 말로 들리면

용서해요."

내 말에 속일 줄 모르는 그녀의 눈매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여서 말을

이엇다.

"그래서 연이에게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왜 꼭 차이코프스키 다음에 멘델스존을 틀어

주었는지를---. 물론 내 설익은 음악 감상법, 아니 내 마음 자체를 처음부터 꿰는 줄 알고

항상 고마워는 했지만요. 하여간 내 나름의 오묘한 감정 이동 부분을 어떻게 그렇게 꿰었는지를

---. 내가 아무에게도 이런 내 미숙한 음악 이야기를 안했거든요. 비겁하다는 반응은 기본

이려니와, 심각한 것을 쉽게 해결하고 벗어나려는 인간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고 비난받을

우려도 많잖아요. 그래서 아무에게도---."

내가 분위기를 누그리며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소 더듬거리며 답변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심혼에 들어오셨을 때 차이코프스키를 틀고 있었는데, 미소 지으며 연주를 손으로 따라

하시길래 참 좋아하시는 줄로 알았죠. 장조이면서도 우울한 그 분위기는 일찍 엄마를 여읜 제

운명 같아서 제가 제일 좋아 하거든요. 힘차게 슬퍼요. 치열하게 처절해요. 그런데 그 뒷면이

멘델스존이잖아요. 그래서 앞면이 끝나면 습관적으로 그냥 뒷면을 걸었었지요---. 저는 사실

멘델스존은 겁이나요. 제 눈이 이렇게 둥글게 크지요. 달콤한 애수, 애조라면 제 눈빛, 눈의

모양과 같아요. 그래서 겁이나요. 벗어나야 된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습관적으로 판을

걸었지요. 달리 다른 LP 재킷 벗기기도 참 성가셔요. 제가 그래요."

아, 습관적---,

무슨 거창한 의미를 찾을 힘도 여유도 나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고단한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작은 습관과 오해, 오독과 환청으로 인하여 생각지도 않은 파국으로 달릴 수도 있겠구나.

강산이 두 번 변한 후에 나는 그녀를 다시 볼 기회가 한번 있었다. "세계 한상 대회"라고

해마다 한번씩 해외의 기업인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

그로서리 스토어하면서 돈을 조금 만지는 내가 무슨 한상 대회에 참석을 하랴. 그런데 그때는

집안에 큰 일이 있었다. 백부가 돌아가시고 종답에 관한 상속문제가 있어서 만사 제하고 일시

귀국을 하였던 것이다. 몇 푼 손에 쥐는 과정에서 치사한 일들이 많았으나 일단 그 일은 끝이

났고 나는 그녀를 수소문하였다.

그녀는 다시 춘천에 있었다. 여전히 음악을 틀기도 하면서 작은 생맥주 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의 온 몸에는 피곤이 서려 있었다. 표면상 지지 않으려는 가식이 겁 많던 때보다 오히려

더욱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의 겸손 속에 숨어서 준동하는 꾀 많은 오만을 지그시 누르는 그녀

최후의 무기는 시간의 풍상을 겪고도 풍화되지 않고 엄존해 있었다.

바로 스패니쉬 아이즈!

현실에서 그녀가 반복한 실패 이야기는 주변에서도 몇 차례 들었으나 꿈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만상을 좌시하는 스페인풍의 퉁망울 눈매, 그건 그때 소양호에 우뚝 솟아있는 소양강 처녀의

눈매와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 눈매가 나를 압도하며 조용히 내면에서 또 다른 자아가 되어

 타이르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말은 별로 나누지 않고 소양강을 한참 걸었다. 예전과

달랐다면 거기 소양강 처녀의 입상이 우뚝 서 있었다. 소양강 처녀는 우리의 앞에서, 이윽고

뒤에서 우리의 발길에 그윽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연이 대신에 이렇게 말하였다.

"임마! 시 건방 떨지 마라! 정직한 이 눈매, 소양강 처녀의 눈매를 네 꾀가 이길 수 있어? 또

이기면 뭘 해!"

나는 쫓기듯 춘천을 떠나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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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예지의 작품 끝에는 (끝)이 아니라 그 잡지의 로고가 찍혀있었다. 한 꼭지가 끝났다는

표시였다.

나는 "쫓기듯 춘천을 떠나왔다"를 "춘천에서 쫓겨났다"라고 붉은 볼펜으로 굵게 고쳤다.

아니 사실은 위 본문에서도 많은 부분을 고쳤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도 재혁이가 반성하는 부분이 주로 그러하였다. 그것은 시쳇말로

물 먹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격을 살려주는 입장에서 그러하였다.

그가 나중에라도 읽어보면 그는 기쁘게 긍정하리라.

그리고 강변의 소양강 처녀 입상은 어쩌면 연이를 모델로 하지나 않았을까, 닭갈비집의 주인은

소양강 처녀가 지금도 강 건너 어디 메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살고 있다 하였다.

그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처녀 뱃사공 사연도 전설이 아니고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입상의 모델은 어쩌면 연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재혁이가 그 옛날 추억의

이야기를 이렇게 다소 개인사가 강한 글로 썼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그린 상은 문학

부문에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불가능하게 만든 데에는 사람들을, 특히 남자들을 끈

저 연이의 눈망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끝)

 

 

 

 

                        

 

멘젤스존 바이얼린 협주곡

													 http://cafe.daum.net/ccritic/BqIc/2214 							 

							 											 													 

																	 
차이콥스키 바이얼린 협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