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편 연재) 우울증 시대의 증언 5 (삼청동 밀원에서의 만남) 따로 읽어도 되는 단편

원평재 2013. 7. 15. 03:06

 

 

 

 

 

 

 

우울증 시대의 증언 5 (삼청동 "밀원"에서의 만남)

 

"얘, 너 한식 먹을래---, 일식? 양식은 맨날 거기서 먹을거고? 아, LA 있으면 여기보다 더

맛있는 한식을 먹겠구나. 그럼 뭘로할래?"

나희은이는 두뇌 회전이 빨라서 그런지 말씨도 빨랐다 느렸다 템포 조절이 자유자재였던

기억이 난다. 그게 또 많이 부럽기도 했고 그래서 혼자 흉내도 내보다가 이내 그만 두었지만.

중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표정도 열두가지 였을까, 그러나 항상 발랄, 명랑하였지, 하다못해

시험 공부 걱정이라도 있었을텐데 그녀에 대한 기억과 추억에는 근심의 분야가 없다.

고등학교 때 방학이 되면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서 가끔 내려와 만난 기억도 난다.

그때도 서울 이야기를 장황하지 않게 절제된 표현으로  모두 다 해준 생각이 난다. 젠체하지

않으면서도 모두 부러워하게 만드는 문학소녀, 그게 방금 들은 그녀의 전화 목소리 속에도

그대로 모두 들어있는듯, 시간의 흐름을 잊게하였다.

"라멘, 아니 라면이면 필요충분 조건이야~."

내가 웃으며 답을 하다가 얼른 어조를 바꾸었다.

"지금 먹는게 문제니? 얼굴 확인하고 밀린 퍼즐이나 맞추며 수다나 떨고 싶어."

 

노벨상을 다투는 사람들이 분투노력하는 연구소, 아니 인류의 보다나은 내일을 위하여 몸을

던진 공간이라면 거룩하거나 혹은 음습 퀘퀘한 냄새가 나야하고 묵언수행하는 "호모-바퀴벌레"

라는 선입견이 그럴사하지만 연구원들의 일상이야 항상 유머 속에 반바지와 샌들이 아닌가.

길고도 먼 길을 노잣돈도 충분치 않은 속에서 걸어가자면 여장이 가벼워야하고 그러자면 입도

가벼운게 지혜이지, 머리만 해도 무거운데.

"강 박사, 아니 덕희야. 그래서 내가 물어보는거야. 메뉴만 정해지면 거기 맞추어 그런 장소가

다 물색이 되어있어. 하여간 거기 호텔에서는 좀 멀어서 미안하지만 삼청동으로 모실께. 시댁

차를 보낼테니 그냥 모른척 움직이기만 해. 내일이면 토요일이라서 내가 직접 갈텐데 오늘

오전까지 특진이 잡혀있네. 얼른 마치고 나갈테니 늦은 점심 먹으며 밀린 이야기는 그때하자."

희은이는 도곡동 무슨 아파트에 사는데 주말이면 성북동 시가에 들어가서 시부모와 지낸다고

했다. 일찍 돌아가신 내 친정 아버지와도 교유가 두터웠으니 잘 모시라고 했다는 시아버지의

당부를 보충하였다. 말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어른들 차를 얻어타고 움직이는걸

불편해 할까봐 배려를 하는 마음이 읽혀졌다. 이 친구가 변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희은이네는 친정이 병원을 했는데 시댁도 병원을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고향 덕택인지 두 집안이 정치권의 실세들과 인연을 맺어서 전국구 국회의원도 하고

짧게나마 어느쪽인가는 장관도 하였다는 이야기도 풍편에 들려왔었다. 모두 고국을 들락이며

조그만 사업을 하는 내 오빠를 통한 사발통문이었을 것이다.

 

정오 가까이 차가 왔는데 검정색 제네시스 였다. LA에서도 매스컴에 선전을 많이하여서

한국산이라는 걸 금방 알아보았다. 예전 한국에 살때 애국하는 한가지로 국산차 애용이 들어

있었고 외제차는 드물기도 했지만 매국의 반열에 올라가는 듯하던 대학가의 분위기가 생각

났다. 젊잖은 나이의 기사가 시동을 거는데 키를 꽂지않고 버튼만 누르는 전자 감응 방식을

사용하는게 인상적이었다. 오토 마니아인 조나단의 차도 그러하였다.

한강을 건너면서는 고국의 발전상을 다시한번 느꼈지만 그보다는 교통지옥이라던 오빠의

말을 실감하였다. LA에도 물론 트래픽이 없는건 아니지만 러쉬아워와 주말의 특정 시간대

정도이지. 아니다, 내가 지금 무얼하고있나. 두나라의 교통사정을 맞 비교하다니. 과연

조국은 컸구나 싶을 따름이다.

제네시스가 나를 데려간 곳은 경복궁을 지나서 도로 표지판으로 짐작이 간 삼청동의 어떤

골목 속 한옥이었다. "밀원"이라는 간판이 숨고싶다는 듯이 작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닥터 강!"

변치않은 희은이의 목소리가  뒤쫓아왔다. 종업원이 그녀가 타고온 그 이름도 선명한 소나타

승용차를 파킹하는 장면이 그 뒤로 보였다.

"희은이구나!"

나도 외치다시피 반가움에 몸을 떨며 뒤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주름이 많고 머리칼도 은발이

섞인 희은이가 거기 서있었다. 살도 조금 붙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하이 파이브를

했다. 껴안지는 않았다. 내일 차옥이하고는 껴안을듯 했다.

"김 원장하고는 어제 만났다며? 민지 말이야."

"그래, 같이 만나도 좋았을걸. 아니 따로이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내가 어제 좀 바빴어. 대학에서 감투도 하나 썼고."

"그게 뭔데?"

"연구처장인가 뭔가인데 그일이 요즘 대학 평가 제도 때문에 장난이 아니야."

"살아가기가 점점 더 팍팍하지? 우리 희망과는 달리---."

"그게 다 미국 때문이야, 호호호."

아담한 온돌 방에서 우리가 다리를 뻗자 자연스레 지체가 섞이고 감상도 섞였다.

"정치하는 어른들이 이 집의 이런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찾았나봐. 이제는 그런 풍류도

사라졌다는구나. 우리 시어른께서 말씀하시던걸 흘려들었어. 요새는 우리 민간인들 차지야."

그녀가 담담히 말을 하는데 기품이 있는 초로의 귀부인이 메뉴를 들고 들어왔다.

다시한번 노벨상 비슷한 이야기가 상위로 구르며 내 소개가 있었고 귀부인은 크게 영광된

모습을 보인 후에 한정식 아이템을 설명하였다. 내가 표정에 힘을 빼고 있으려니 나는 빼고

두사람이 의견의 일치를 보며 귀부인은 조용히 나갔다.

"얘, 정말 간단한걸로 시켰지? 들어오다 보니까 십오만원 짜리도 있더라."

내가 진정 근심하였다.

"여긴 젊잖은 분들도 두당 이라고 하는데, 그래 일인분에 오만원짜리로 시켰으니 안심해. 

두당 삼십만원짜리도 있어, 호호호."

"그런건 랍스터에 와인 한잔이 따라나오겠다."

"여긴 요새 막걸리 한병이 테이블 와인 한병 값이더라. 와인 한잔 할까?"

"같은 값이면 막걸리로 하자, 호호호."

 

많은 가짓수의 한식이 코스로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우리는 음식보다 밀린 이야기가 더

많았다.

"덕자 언니도 이민 가셨더라."

"그래, 우린 다 갔어. 미련없이 다 갔어. 일식집 이로리에서 주방 보조, 그러니까 시다하던

언니는 LA 코리아 타운에서 유치원 원장을 평생하고 계셔. 자격증도 다 땄지만 영어는

아직도 서툴어. 한국말 쓰는 유치원을 하시거든. 교민들이 아이들 어릴때는 이중언어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커. 수업료가  두 배라도 다 보내. 초등학교 때는 구몬 수학에, 중등학교 때 부터는

대입준비 입시반이 또 필수 코스야. 모기지로 건물도 하나 장만했는데 그라운드 층에서는

태권도 도장도 열었고. 남동생 둘이 같이 하다가 지금은 독립해 나갔어."

"가만있자, 이로리라면 이 동네 계셨어? 이 아래 길가쪽에?"

"아니야, 남포동인데, 부산. 언니가 맨날 이로리 출신이라고해서."

"덕자 언니는 언젠가 무슨 일 낼 줄 내가 알았다니까. 그런데 어머니 안부는 차마 먼저 묻지

못했네. 언니 잘 되었다니 이제 물어봐도 되겠지? 혹시?"

"그래, 한참 되었지만 마침내 즐겁게 지내시다가 가셨어. 우리가 어머니 살아 계실 때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가느라고,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한달이면 한번 쯤은 밥 먹으러 만나.

계실 때 어느 날이던가, 한국에서 국어학 교수 한분이 녹음기를 가지고  사투리, 그러니까

방언 수집차 유치원에 딸린 엄마네 집으로 들이닥쳤대요. 한국에는 지금 사투리가 급속히

사라진다고. LA에서나 아직 보존 되어있다면서. 어머니가 사투리 녹음을 해주는데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성우같다고 그 교수가 추켰나봐. 그러니까 엄마가 내 셋째 딸이 진짜

성우요, 그러셨다네. 호호호."

"아, 덕이 말이구나."

"그래, 덕이가 지금 라디오 코리아에서 아나운서, 성우, PD, 뭐 안하는게 없어. 클 때는 지

이름이 촌스럽다고. 우리 성씨가 구씨였으면 뭐가 되었겠냐고. 난리를 치던 아이였지."

"그래, 지금 이름은 뭔데?"

"애비게일이야. 애비 말이야. 그것도 좀 고풍나는 이름이지만 그게 또 뜨는 추세라네. 그

교수가 사실은 라디오 코리아의 그 성우, 애비님께서 추천하셔서 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웃고, 그렇게 웃으며 사시다가 돌아가셨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침내 눈가에 이슬을 담았으나 약속이나 한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눈물을 참았다. 전래의 한국식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헐리우드 키드로 자랐기 때문

인지 모르겠다. 맞어, 우리가 무궁을 만들 때에는 숨어서도 미국 영화를 보았지. TV에서의

미국 드라마는 물론이고.

"아이들은?"

그녀가 묻는 말에는 이야기의 진도에 따라 나도 그 질문을 해 주어야할 순서를 미리 장치

하는 의도가 내재되기도 했겠지만 진정 궁금하기도 했으리라.

 

"우선 언니네는 아이가 넷이야. 놀랍겠지만 직접 언니 배로 나은 애는 하난데 다운 증후군이야.

나머지는 하얀 얼굴 하나, 검은 얼굴 하나, 히스패닉 갈색 하나인데 언니와 형부가 영어를

잘 못하니 얘들이 한국말을 잘해요. 언니가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이로리 횟집 시다를 할때

전라도 출신 형부를 만난거야. 그래서 이 집 아이들이 경상도, 전라도 말을 섞어 쓰는데 때로

방바닥을 굴러야 돼, 호호호."

우리도 밥을 먹다말고 구르지는 말자고 상다리를 부여잡았다.

 "언니네 유치원과 학원 이름은 제네시스야. 나를 오늘 여기에 태우고 온 그 차 이름 말이야.

드볼작은 신세계 교향곡을 만들었지만 언니는 창세기 교육원을 만들었다고 자부심이 대단해.

아이구, 내가 주책으로 말이 많네. 내 이야기가 미국식 석세스 스토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하고나면 다 구질구질해. 한강의 기적에 비하면 말이야."

"그러지마, 너무 겸손해도 예의가 아니야. 우리가 본업은 동업자들이라 그렇다치고 너무

개인사를 몰랐어."

"그래, 이젠 나 교수 차례야. 왔다갔다하자. 내 집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고 이젠 네가 해.

산뜻한 이야기로 나한테 자랑도 좀 해줘. 구질구질하지 않고 상큼한 이야기~! 우선 형부

이야기부터. 호호호. LA에서도 필살기 어법은 살아있단다." 

"아이구, 어법도 역시 국제적, 아니 국적불명이네. 그래 내 영감, 네 제부 이야기부터 할께.

내가 너보다 어리잖아. 호호호. 우리 영감은 결혼 때부터 영감 같았어. 젊잖은 사람이라면

자랑으로 들리니? 가풍  탓인지 재미없는걸 미덕으로 아는 그런 집안 있잖니. 친정 아버지와

시댁 아버님이 의대 선후배 동문이시고 정치 색갈이 같은 탓에 우리 부부가 나이 차이도

꽤 많고 서로가 잘 모르던 사이임에도 부부가 되었네."

"우리 의대 동기들이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 쪽도 그랬네?"

"이상과 의식이 어쩌고해도 산다는게 다 이기적인데에서 출발하나봐. 하여간 넉넉한 의사

집안 출신의 또 부부 의사다 보니까 겉으로는 잔 물결 하나도 치지않은 조용한 생활의 연속

같았지만 양쪽 어른들이 고향 분들의 추천으로 정계에 진출하고 부터는 풍파가 컸어. 정권이

바뀌면서 위험한 고비도 많았지. 그래도 내부적으로는 이 분들만큼 믿을 사람도 없다는 그런

교감이 있어서 정권의 인수인계 때에도 나중에는 막후에서 큰 역할들을 하셨나봐. 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들은 풍월 줏어섬겨도 되겠지 뭐. 내가 대학 다닐 때와 새댁일 때는 워낙 일이

급하셨는지 삼청각, 오진암, 대원, 회빈, 여기 밀원, 이런 데로 내가 무언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영업용 택시로 돌아다닌 적도 있었어. 나중에 친정 어머니가 아시고 몸져 누우셨지.

아버지와는 몇 달 말씀도 나누지 않았고. 그런데 나는 이런데 와서 예쁘게 단장한 여자들이

나이 지긋하고 얼굴이 신문에 나오는 분들에게 반말을 하며 교태를 부리는 걸 보면 막 유혹을

받더라. 황진이, 매창 있잖아. 그리고 무거운 가방을 꼭 껴안고 달릴때는 미안하지만 의기 논개

생각도 나더라. 이 풍진 세상에 이 한 몸 던져서. 호호호."

"난 기녀들은 몰라도 난설헌이나 소서노 처럼 살고싶긴 해,"

"넌 마담 큐리 표, 템즈 강으로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 표!"

"아니야, 난 쓸어질지언정 자살학파는 아니야. 서른 경에 자살한 미국의 여자 시인, 실비아

플라쓰의 내관적 시도 걸멋으로 외우지만 인간으로의 공감은 한계가 있어."

"나도 그래. 난 우울증에 빠지는 스타일은 아닌가봐. 나이들면 적어도 다섯 중 하나는 깊이

빠진다지만 올 댓 레이시오, 공자 앞에 문자지만 수치에 불과하고 난 아니고 싶어. 너한텐

미안한 소리같다만 나도 풍상 겪은 일이 시댁, 친정으로 또 더 많아. 그래도 그냥 구경하듯  

지나게 되더라. 시댁에서는 작은 아즈바님이 종합병원을 하나 마포에다 내셨다가 강성 노조에

걸려서 간호사가 투신 자살하는 일을 겪으시며 시아버님의 정치 생명도 끝이나고---.

당시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아즈바님이 종업원들의 고통이나 요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측면이 컸지만 노조도 너무 극단이었고 서로 한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등등. 이제 와서보면 거기 분명히 있었을 법한 지혜가 짓밟힌것 같았어. 정치적 계산 속에.

그 바람에 나와 아범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잠시 도피를 했지. 거기 가서 나는 박사

학위를 했고 아범은 잘 놀다왔지. 당시 막후 정치가 이집, 밀원에서도 많이 이루어졌대요."

 

그때쯤인가, 처음 들어왔던 귀부인 같은 주인 마담이 종업원 대신 잠시 들어왔다.

"어르신들은 다 편하시지요?"

묻는 말이 정겹고 의미심장하였다.

"감주를 좀 넣어볼까요? 어른들이 좋아하신 것 보다는 묽게-."

"네, 주세요."

아마도 막걸리를 뜻하는 모양같았다. 귀태나는 부인이 확인을 하고 조용히 나갔다.

"아이들은 그때 왜 미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지금도 내심 불만인데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가 보더라. 아무튼 그 후 귀국하여 첫 아들은 여기에서 의대를 나왔는데, 보스톤에

가서 펠로우를 하고 왔어. 둘째는 경영학을 했는데 MBA를하고 와서 지금은 싱가폴의

시티 그룹 지점에서 근무해. 금융위기라서 지금은 고전하나 보더라."

"중국 힘도 있고 거긴 괜찮을거야. 우리도 연구비 지원을 거기서 많이 받아."

내가 위로사로 들릴지도 모를 사실을 보탰다.  

"우리 집안 양가는 지금 보면 구멍가게 같은 종합병원을 운영했지만 작은 아즈바님 사건

이후로는 종합병원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해. 큰 아이가 미국 물을 좀 먹고 들어와서 해외

환자, 특히 돈 많은 노인병 환자들을 유치하는 의료 특별 법인을 하나 만들려고 하다가

특권층 병원 만들어서 의료 제도의 이원화, 이중화, 양반 상놈 따로 치료받는 병원제도를

꾀한다고 매스컴의 뭇매를 맞고 그만 종함병원에 취직을 하고 말았어."

"아쉽구나. 우리가 그런 특수 병원들로부터 용역을 받아서 평소 연구소 유지비를 대는

형편이거든."

나는 엊그제 한국의 TV에 출연한 데에도 그런 깊은 뜻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언부언 발설치

않았다.

"우리나라도 지금 노년 의료 문제가 아주 심각해졌어. 한동안 너도나도 노인 요양원을 짓고

대박이 터지리라 기대와 경쟁이 대단했어. 전문 요원을 양성하는 기관도 생기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 병원들이 모두 적자에 허덕이고 말씀이 아니야. 그런 곳 하나를 내 친정에서

벌였다가 지금 큰 곤경에 빠졌어. 거기에다가 남편이 그 사업을 부추겨서 속알이를 하고

있단다. 시댁 어른들께는 말도 못꺼내고있어. 작은 아즈바님 사건으로 우리 시댁에서는

다시는 의료사업에 뛰어들지 말라는 원칙과 엄명이 있었고, 지나간 그 일로 그 아즈바님은

성북동에 출입도 못하시거든. 그런 판국에 아범이 처가에서 사고를 친거야. 솔직히 털어

놓차면 내 남편이 요즘 우울증에 빠져있어. 나 몰래 항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걸 내가 다

알지. 막상 우리 친정에서는 큰 땅을 하나 처분하고서 손을 털 단계에 들어갔는데 말이야.

처음부터 내겐 알리지도 않았으니 나도 그런 사실을 영감에게 알려주지 않고있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정말 희은이 얼굴에는 무슨 근심 걱정 같은게 보이지 않았다.

 

"얘, 너는 무슨 제3국 스포츠 중계하듯 쉽게 이야기를 하네? 무슨 사연이 있지?"

내가 육감을 발휘하여 그녀의 속을 짐작해 보았다.

"혹시 복수심 같은건 아니니? 남의 가정사를 내가 들여다 볼수는 없지만 말이다. 배우자에

대한 객관적 반응은 복수심에 근거한다는건 교과서적이잖아, 추측이 맞다면 모른척 넘어

가지 못한 내 처신을 사과할께,"

"역시 노벨상 후보 감이야. 내가 오늘 다 이야기할께. 우선 내 친정에 재앙을 끼친, 그래서

다 늙으신 친정 아버지를 노심초사케 한 일은 어쨌거나 모두 당사자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어. 또 내 남동생 하나는 그 일로 노년 보험을 할인하고

리베이트를 주었다는 죄목으로 형사 피의자가 되다시피 했지만 그것도 또 개인의 책임

이라고 치자.  진정한 문제점은 평소 나에 대한 영감의 태도와 대접의 문제로 귀착되는

거야---."

그녀가 문제니 문제점이니 하는 말을 중복하여서 쓰듯이, 정말 문제는 간단치 않아 보였다.

그녀에 따르면 결혼 후 한번도 그는 자기 아내의 감정를 인간적으로 배려해 준적이 없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봐. 난 당연히 네 편이지만 부부간 해석상의 오해가 있을 수 있잖아."

내 말에 그녀는 움찔하더니 이내 미소를 되찾고 이야기를 털어나갔다.

"먼저 해외 관련이야."

그녀는 꿈꾸는 얼굴이 되었다.

"이울회라고 아는지 모르겠어. 내가 다닌 의대와 저기 동숭동의 의대생들 사이에 오래 내려

오는 모임이 있어. 지금도 그 전통이 내려가고 있을거야. 예전에는 무의촌 진료를 하였고

그후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로 탈바꿈을 하니 해외 무의촌 진료를 나가게 되었지."

"그럼 그쪽 남자 의대생과의 러브 스토리? 거긴 민지도 다녔잖아?"

"민지는 그런 봉사활동이니 뭐니 하는건 그때만 해도 외면하는 성품이었고 또 그쪽 대학

에서는 남학생만 가입했으니---. 요즘은 거기도 입학 여학생이 과반은 될테니 그 모임이

지속되고 있을지도 의문이네. 하여간 무슨 국내판 러브 스토리는 기대하지 마시고."

" 그럼 국제적 스토리인가?"

"그래, 러브라는 말은 잘 뺐네. 눈치가 정말 노벨상 감이구나."

그녀가 이울회의 일원으로 여름 방학 때마다 네팔에 의료 봉사를 간게 세번쯤, 그러니까

3년간 그곳을 다니는 사이에 그쪽 네팔의 남자 봉사단원과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남녀관계는 아니고 연민같은 감정이랄까, 한국에 대한 그 네팔 남학생의 열정에

동정심이 갔는데 그쪽의 다른 단원들은 그를 약간 주제 파악 못하는 이상한 운전기사 단원

정도로 자기들 끼리도 우습게 취급을 하였고.

지금이라면 인터넷 메일이 오고 갔겠지만 그 당시로는 몇차례 서툰 영어로 편지가 왔으나

한두차례 답신을 보내주다가 이어서 혹독한 본과의 수업,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 그리고

결혼, 그게 전부였는데 여러해 후에 네팔 정부의 한국 시찰단에 그 청년이 뽑혀서 왔다고

한다. 그는 그녀의 모교 의과대학으로 연락을 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했고

희은이와 극적인 해후를 한 모양이다.

"정말 극적이었을 것 아니겠니?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지. 뭔가 방문 효과가 나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하고. 남편은 시아버지 덕분에 그 당시 보건 사회부에 의사로 공무원 신분

이었거든. 그런데 그만 그 청년은 방문 기한도 다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어.

외교 분쟁이 될뻔한 사건이었어. 이름이 '다와'라고, Monday라는 뜻이래. 월요일은

일주일의 처음인데 마침내 주말이 되면 자신은 무언가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꿈에 부풀던

청년이었어. 물론 서구에서는 Sunday가 일주일의 첫날이지만 자기들은 그때만 해도

한국처럼 월요일부터 한 주가 시작된다고. 그때가 나는 첫 아이를 갖었을 때야. 그런데

남편이 그 청년을 제 발로 보따리를 싸게한거야. "

"오, 마이 고쉬, 세상에!"

내가 다 듣지도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후 시아버님의 정치적 사건으로 우리는 곧 일본으로 일종의 도피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사건으로 하여 남편과는 끝장을 본 셈이야. 둘째가 나중에 태어났지만 그건

폭력행위 같은 결과였지. 나는 그때 이래 남편으로 부터는 모든 걸 진정 도피 하여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어. 덕분에 교수가 되었으니 남편의 외조에 고맙다고나 할까."   

"트레저디!  30년전 현상이었다만 참상이었구나. 더 이상 네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구나."

"내가 평생 너를 기다려왔나봐.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겠니. 기이하게도 너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 온전한 영혼을 지켜냈는지도 몰라.

아, 내가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또 YWCA 일도 열심히 해오고는 있어. Y 일은 문학에 대한

내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변용된 것이었어.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아직 국내적 사건이

하나 더 있었어."

"국내적 사건?"

네팔 청년과의 일을 듣고나서 내가 차마 국내에서의 사건을 물을 경황이 없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박범수 변호사와의 일을 끄집어 냈다.

 "내가 일본 생활을 마치고 들어와서 대학병원에 자리를 잡았을 때니까 40대 초인가,

어느날 박 변호사가 연락을 했어. 법원 근처, 서초동 교대역 어디에서 저녁을 했을거야.

네 근황을 먼저 묻더라. 나는 모른다고 했지. 솔직히 좀 김이 샜다고나 할까. 정말 졸업 후

처음 만났는데 네 근황을 먼저 묻다니? 그리고 그 일이 궁금해도 말을 돌려가며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래가지고 무슨 변호사를 하는지 말이야,"

그녀가 키득이며 내 얼굴을 보았다. 나도 얼떨결에 따라 웃었지만 긴장이 뒤따랐다.

"모른다고 그랬더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갈 수록 태산이네. 그런데 내가 좀 보충설명을 할께. 우리가 중학교 때에 무궁을 만들면서

사춘기의 정서를 일찍 깨달은 조숙아들이라고 시건방스럽게 자부했잖니. 그때 나와 범수는

친구들 몰래 손을 자주 잡았던것 같아.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방학 때 그애가 내려오면

우리는 자주 만났고 마침내 가벼운 허그까지도 했을거야. 하지만 내가 의과대학을 들어가고

걔는 고시촌으로 가고 하면서 연락이 끊어졌어. 내가 대학 생활을 할 때에는 처절함의

극치였지. 하여간 그건 좀 이해를 해줘. 아차, 내가 왜 변호사를 변호하지? 하긴 그래봐야

오래전 흘러간 전설이네."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그 다음 순서가 되어서야 나오더군. 우리 무궁 동지들을 모아서 문학회를

하나 만들자 그런 제안을 하는거야. 민지, 차옥이를 넣고 병만이, 성관이도 넣고 그 외에도

재경 선후배들을 찾아서 넣자고---. 내가 박 변호사에게 서울 최일류 고등학교 동기들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지방도시 중학교 모임이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고등학교 동기들은 모두 권력,

금력 지향적이어서 문학할 동지들이 없다나, 그리고 믿을만한 여류들도 있어야 되는데 그런

인연을 어떻게 찾느냐고, 이야기가 아주 간곡하더라고. 어쨌거나 나도 그동안 잊었던 

보물을 되 찾은듯, 그리고 박 변의 인간미에도 호감이 가고해서 재경 동문들을 적극

찾아보자고 했지. 나 자신 꽤 오랜 해외생활 뒤끝이라 고향의 옛 사람과 옛 시간, 옛 인연에

대한 어떤 순수한 회귀감 같은게 무럭무럭 자라나는거야. 강 박은 그때 내 심정 이해가 갈거야."

"내가 빠진 쾌감까지?"

"노벨상 한번 더 수여할께."

우리는 또 의기투합한 웃음을 웃었다.

"그래 옛 인간들은 많이 찾았어?"

"응, 우선 차옥이가 그때만 해도 인사동에서 갤러리를 하고 있더라. 그래서 그곳을 아지트로

하고 선후배 중에서 좋은 사람들을 골라보았지. 강 박에 대해서는 솔직히 더 이상 찾을 생각을

접었고. 선후배 중에는 정말 호감이 가는 문우 감이 꽤 있더라고. 모두 연락을 취하고 인사동

갤러리에서 발기회인지 창립회인지를 열고 그랬지. 민지가 고급 양주와 와인을 몇 병 들고

나타나고 박 변이 밴드를 부르고 난리가 났어. 아, 국악을 하는 모임이 또 나와서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켰어. 황병기 교수님 문하생들을 자처하더라. 그런데 이게 금방 소문이 돌고

남편이 박 변에게 연락을 취해서 뭐 사회 문제로 삼겠다나 그랬나봐. 순식간에 다 도망을

가더군. 문약하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그때 처음 깨달았네. 또 따지고 보면 출발의 포멧을 좀

잘못 잡기도 했고. 어쩌다가 일이 꼬여서 그렇게 그런 방향으로 튀더군."

"네 편으로 내가 이해는 된다만 그래도 출발이 좀 잘못 되긴 했네. 감히 짚어보건데 창립회

분위기가 그렇게 된 데에는 민지의 영향이 컸겠네. 어제 내가 만나봤다만."

"남 탓해서 뭣하랴만 일이 그렇게 되었어. 남편은 그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내게 한마디도

안하고 내내 기분이 좋은지 며칠간은 빙글빙글 웃음을 참지 못하더구만. 안그래도 우리 부부가

공식적인 이야기 밖에 나누는게 없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러는게 더 얄미웠어. 일찍부터

대머리가 되어서 처음 나 만날 때는 가발을 쓰고 나타난거야. 결혼식 피로연 때에 술이 들어간

의대 동기들이 누구시냐고 웃기고 법석을 떨고서야 알았지. 뭐 그걸로 혼인 관계를 해태할

수도 없었고."

"대머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이 좀 그렇네. 그래도 사람은 좋다면서."

"좋은게 뭔지 모르겠다만 그냥 좋은 얼굴하고 좋게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 폭이 넓은듯

하나 밖에 모르고 속이 깊은듯 한치 속도  못되게 얕고 그래. 아, 여자 관계 묻고싶지?

그것도 깨끗해. 우선 그쪽을 밝히지 않는 사람이고 그건 종족 보존의 수단 정도로, 둘째

가질 때가 그런 식이었지."

"그럼 뭘하니?"

"민족과 나아가서 인류의 장래를 근심하며 사는 사람이야. 장인에게 노인 요양 병원같은거

만들어 보시라고 내밀하게 부축인게 그 한 구체적 예이고, 환경, 생태 이런 모임에 발기인,

임원, 공동대표, 요즘은 나이가 드니까 그게 죄다 고문으로 바뀌더라. 호호호."

"나 교수도 Y에서 중책인가 보더라만."

"문학 동호인 때려치우고 Y에서 활동을 시작했어. 다시는 문학의 문자도 꺼내지 않겠다

결심하고. 세월이 빠르네. 나도 이제 그 조직에서 고문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어. 그만 두고

싶은데 그 다음에 무얼할까 그게 무서워서 손을 못떼고 있어. 또 시부모님도 내가 거기

있으니까 신뢰를 하시고 그래."

"효부상 받겠다."

"그건 몰라도 모범 부부상, 정식 이름은 그렇지 않은데 하여간 그 비슷한 상을 몇차례 받기도

했으니 아이러니지 뭐. 또 그런 상 받으면 도네이션을 반대급부로 요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겉으로 그런척하고 사는 삶은 뭐 남들에게 젠체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공명심도 아니고

또 작은 아즈바님 댁에서 시비를 거는 것처럼 유산이나 상속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야. 나는 

그저 인간적 도리를 지키는 데에 내 몫이 있는것 같아. 나같이 무기력하고 정열도 욕망 지수도

낮은 사람이 어쩌다 운이 좀 좋은 편인데 그럼 무얼하다가 죽어야할까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살어. 나는 사실 폐경도 매우 일찍왔어."

"이것도 내가 감히 말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만 넌 민지하고는 정 반대쪽에서 사는 사람같다."

"그래 뭐 누가 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가 하는 전제만 안세운다면 부끄러움

없이 흔쾌히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호호호. 민지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미스테리한

이혼을 성취한건 들었지?"

내가 어제의 일을 조금 발설하자 희은이는 또 놀라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미스테리하고 크라임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과정에 심지어 박 변까지 동원되었잖아.

박 변도 참 싱거운 사람이야. 민지 이혼 사건에 일찍부터 관여한 건 뭐 그럴수 있다고 치자.

변호사의 본업 중의 하나이니까.  또 뭐 꼭 남의 가정을 해체한다는게 나쁘기만한 시대는

아니겠지. 그런데 일이 길게 가면서 이상한 사람들도 관여가 되고, 그러는데 박 변이 민지

하고 관계가 깊어졌다는 소문까지 들리더라고."

"아니 그런 소문이 신문에 나니? 교수가 어떻게 그런걸 다 듣고 알어?"

"중학교 재경 동기회 모임에 하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나중에는 욕까지 얻어먹게 되기에

이제 아이들 장가갈 나이도 되어가고 해서 한번 나갔지. 글쎄 박 변도 그렇게 끌려나온

모양인데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너 민지 빌라에 들락거리는거 자주 봤다나 뭐 그러면서

시비를 붙더라. 그랬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며, 또 박 변은 왜 또 구설에 말리는지.

박 변 말로는 이혼 소송 건으로 그 집에 피치 못하게 한 두 번 들락거렸다나 뭐, 그러더라."

"민지는 안 나왔어?"

"늦게 술 한 잔 전작이 있는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동기회 기금만 내게하고 우리 몇이서

근처 찻집으로 갔지. 민지 따라 간 곳인데 알고보니 찻집이 아니라 칵테일 바아 같은데였어.

거기서 또 양주를 몇잔씩 술 잘하는 여자 동기들이 하고는 민지를 닥달했어. 너 박 변하고

뭔 일이 있다고 방금 동기회 회식 석상에서 난리가 났다고. 그랬더니 대답이 결작이야.

글쎄 자기 자신도 잠자리를 했는지 어쨌는지를 모르겠다는거야. 물론 명정상태, 양주가

몇잔씩 들어간 상태이긴 했지만."

"우리나라 상류사회 부인들의 모습들이 좀 그렇네. 민지도 그렇지만 그보다 전반적인 신상

털기랄까 인민재판 포멧도 그렇고. 남이야 뭘하든---."

"아니야,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아. 물론 아이들 일류대학 보내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달까, 그런 쪽으로만 매몰된 건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대학이나 유학을 이미 보낸 후의 나이들인데 뭘-."

"그래, 그 이후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점이 있지. 솔직히 유사이래 인간의 역사는

상당 부분 광기의 역사, 전쟁과 섹스의 역사가 아닌가 해. 거기에다 우리는 또 급격히

평균 여명이 길어진 유례없는 나라이고. 그러니 인류가 처음 겪는 고령사회의 룰이랄까,

모델이 정립되지 않은 사회상을 대표 선수로 앓고 있달까 그래. 신경내과 하는 나같은

사람이 할 일이 많은 사회야."

"그래, 블루 오션에서 마침내 어군을 만났구나, 얘. 역시 현명하다."

"아니야, 일본에서 좀 늦게 공부를 시작하면서 경쟁이 쉬운걸 물색하다보니 대박인가,

자아, 우리 성북동 시댁에 가서 인사나 여쭙고 갈래? 미수를 바라보시는 분들이 정정하셔.

그래서 널 여기 가까운 데로 모셨어. 아니 불편하면 이 아래로 내려가서 세상에서 두번째로

맛있는 단팥죽 맛도 보고 현대 화랑의 천경자 상설 전시 별관도 보고, 북촌 가회동 계동

경기고 있던 화동 집들도 구경하고 그리고 내일은 차옥이네 집으로 내가 직접 데려다 줄께."

"아니야, 내가 갑자기 오후에 방송국 사람들과 약속이 생겼어. 지금 시간이 별로 없네."

나는 Y에서 중책이 있는 권사님에게 미안하지만 잠깐 거짓말을 하였다.

무거운 대화가 마침내 박 변호사에게 까지 불똥이 되어 튀는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와 나는 어떻게 보면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지를 영원히 읽고있을 사이였다.

그럼에도 이번 사흘간의 고국방문 자유시간에 그와의 만남을 끼워넣거나 하루를 더

연장하여 만날 채비를 차리지 않은 것은 우리 사이의 아름다움을 기억 속의 편지로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로는 내일 정차옥과의 만남은 나혼자 방문이 아니면 불발될 위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차옥이는 나만 오기를 원했고 교통편은 그녀가 하는 H 미술관의 다인승

차로 모시겠다고 그녀의 시동생을 자처하는 남자가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가만있자. UCLA에서 학생회장을 했다는 딸 이야기는 아직 못들었네?"

내가 주섬주섬 일어나려고 하자 희은이가 황급히 손을 잡았다. 날짜를 꼽아보니 내 딸

쉐럴은 이리안 자야에서 이웃한 나라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로 보급을 받으러

날이 가까웠다. 오래 앓아 누워있는 제 친정 아버지와 멀리 고국을 방문하고 있는 나,

그리고 친가 쪽은 없지만 외가 쪽의 이모와 외삼촌네 가족들, 인도계 시가의 대규모 패밀리,

그리고 마침내 문명사회의 소식까지 일정부분 소금을 얻어가듯이 받아서 다시 들어갈 내 딸

쉐럴과 사위 모세 굽타, 그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듯 하였다. 나는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모두 그냥 덮어두고 지나가고 싶었다. 부끄러워서? 천만에!

나 교수는 이미 Y를 통해서 몇몇 아프리카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매달 얼마씩을 보내고 있다

하였다. 장한 일이었다. 그런데 선교지역에 있는 내 딸과 사위의 소식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고 또 얼마를 내놓으려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불쌍한 미지의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금전적 영향을 줄 수도 있으리라. 그건 말하자면 무어라고 할까, 아 그래

'삥땅' 질을 내가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민지를 통하여서 알기는 하리라.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이 땅을 떠났으리라.

"미국 생활이 다 그렇지 뭐. 잘 지내고 있어."

내가 말하였다.

"시집은 갔니? 우리 집에 아직 장가 못간 녀석이 둘이나 있단 말이야."

나 교수의 말이었다.

"이제는 결혼관도 다 달라졌고, 자기 스스로 앞 길을 개척하고도 남을거야. 예전처럼 부모가

나설 계제가 못되나 싶어. 또 자칫 만인의 축복속에 탄생한 커플들이 얼마나 많이 헤어지니."

나는 마치 인생을 꽤 많이 더 산 진짜 선배같은 소리를 대충 둘러대고 단호하게 일어났다.

내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묻지않고 염두에도 두지않는 건 LA 소식을 서울에서 더 잘 안다는 

미진이의 말이 맞는건가. 희은이의 따뜻한 마음이 말없이 전달되어 가슴이 다시 저려왔다.

 

<계속>

 

 

 

Gabriel's Oboe(Nella Fantasia) /Ennio Morricone

 

 

 



Gabriel' Oboe

세계적인 작곡가 Ennio Morricone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한 Gabriel's Oboes (가브리엘 오보에)입니다. 영화 '킬링필드' 감독 롤랑 조페의 1986년도 영화 '미션'은 1750년 남미에 파견되었던 한 선교사가 겪은 실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남미로 간 선교사들이 그 곳 종족들에게 십자가에 묶인 채 폭포로 떨어지는 순교를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두 사람(가브리엘 신부와 멘도사 신부)은 그 곳으로 향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