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소설) 문학상 후기

원평재 2016. 9. 14. 12:00










문학상 후기

                                                                        

간혹 문학상 시상식의 초대장이 왔으나 “하담 문학상”은 낯설었다.

전희일 교수는 조교가 갖고 온 우편물에서 그 초대장을 버리는 쪽으로 분류 하려다가

수상자가 양지훤 교수여서 얼른 보관 쪽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지금 나가는 대학이

달랐으나 같은 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으며 학생 운동 때도 호흡이 맞았다.

프랑스 유학중에는 어려운 국가 박사 제도가 이미 시행되던 시기에 시간의 낭비 없이

학위를 해낸 과정도 유대를 돈독케 한 요인이 되었다.

나이는 양 교수가 한 살 많아서 통칭 형이었다.

그들은 귀국 후 한동안 한국의 프랑스 학회와 나아가서 인문학 전 분야까지를 주름잡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변하여 이제 이 나라의 대학에서 자유 전공제라는 것이

시행되자 그들이 배웠고 가르치는 프랑스 어문학 관련 학문, 아니 전 인문학의 존립

자체가 풍전등화에 다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위기 속에서 각자의 길이 바쁜 두 사람은

최근 연락도 뜸한 형편이었다. 전 교수가 편지함의 초청장을 다시 보며 생각에 잠기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양지훤 교수였다.

“전 교수, 나 양지훤이오. 초청장은 받았겠지요? 문화평론이라지만 글을 잘 쓴 일도 없는데

문학상을 준다니 민망하기 그지없구려. 이번 주 토요일, 바쁘더라도 꼭 참석해 주시게.”

“양 형, 축하합니다. 그런데 서로 바쁘긴 하지만 나한테도 미리 알리지 않는 일이 있네?”

“알리지 않다니, 무얼?”

“아, 그런 좋은 일이 진행되고 있으면 나한테도 미리 알리시지. 그럼 혹시 심사과정의

원군도 되면서 두고두고 엎드려 절도 받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에이, 이런 일이 친한 사이에도 좀 계면쩍고, 나도 거의 결정이 난 후에야 통보를 받았어.”

“그랬군. 다시 축하합니다. 꼭 가야지요. 그런데 하담이란 분이 누구신지?”

“아니, 그 학과에서 정년퇴임하시고 명예교수로 계시다가 작고하신 차학표 교수님의

아호를 여태 모르시오?”

“아, 그 분……, 아호가 하담……. 아이고, 알다마다.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전 교수가 죄송할 대상은 양지훤 교수가 아니라 같은 과에서 근무하다가 여러해 전에

퇴임하여 두어 해 전 작고한 차학표 교수였다. 흔히 그렇듯이 나중에 기회가 있으려니

하고 차일피일 무심하다가 돌아가셨다는 늦은 소문을 전 교수가 들은 것은 캐나다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인 퀘벡으로 1년간 안식년을 가 있을 때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그간 쌓였든 지난 일들이 과거사라는 먼지를 덮어 쓴 채, 보다

더 화급한 현재의 일에 자리를 비키고 있었다. 정말 가장 화급한 일은 대학 캠퍼스에서

프랑스 어문학과가 사라지려는 위기 상황이었다. 국내 프랑스계 은행에서도 공용어는

영어이고 고등학생들의 제2외국어가 중국어 일변도인 시점에서는 프랑스어 전공의

대학 졸업자는 도무지 쓸모가 없다는 현실이 세태로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시장경제 논리는 이미 대학 내에서도 자리를 굳건히 잡은 것을….

이런 와중에서도 재능이 있는 두 사람은 존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발 빠른 변신을

시도하였다.

한탄과 시름 속에서도 전희일 교수는 유럽 문화학, 특히 영상 문화 쪽으로 새로운

전공의 가닥을 잡고 유럽의 ‘필름 느와르’, 그러니까 할리우드식으로 말하자면

‘언더그라운드 시네마’ 쪽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강의는 인기를 끌었고

과장된 수사로 저술된 그의 책들은 잘 팔렸다.

영화, 영상 관련의 베스트셀러인 “음지의 영화”, “어두운 시대의 흐린 영상” 등이 모두

그가 쓴 노작, 아니 노작이라기보다는 역작, 그래 쉽게 쓴 역작이었다.

한편 양지훤 교수는 영상 콘텐츠 쪽과 전복적 비평, 문화 비틀기 평론의 영역에서 변경을

개척하였는데 국문학 쪽에서 곱지 않은 시선이 들어오기도 했으나 지평이 넓은 그의

안목은 금방 중앙 일간지의 주목을 끌어서 칼럼도 쓰고 문예지의 산문 영역을 주름잡았다.

그는 얼른 ‘언론 영상 문화학 전공’이라는 복합학과를 만들어내었다.

전반적인 순수 인문학의 퇴조 속에서도 양지훤 교수의 찬란한 문장은 도도하였다.

그래서 아마 양 교수가 상을 받는가 보다고 전 교수는 생각하였다.

“양 형, 궁금한 김에 물어볼게요. 하담 문학상은 그러니까 어디에서 주관을 하고

있습니까? 예컨대 기금이라든지……?”

“전 교수는 벌써 돈 계산부터 하네, 하하하. 수상자 선정이라든지 그 진행은 월간

문화예술이라고..., 꽤 중후한 종합 문예지인데, 그걸 내는 출판사에서 행사 일체의 주관을

하고, 경비와 상금은 모두 미망인이 내시지요.”

“아하, 그러고 보니 하담 선생께서 어느 문중의 장손이라서 신도시가 생길 때 보상금을

많이 받으셨다던 소문이 이제 생각나는군요. 또 후사가 없다는 말도 들리던데, 그럼 유산

같은 게 모두 사모님에게로 갔나 보군요?”

“돌아가신 하담 선생께서는 종친회 쪽에도 돈을 많이 내놓으신 모양이고, 미망인에게도

당연히 유산이 꽤 돌아갔겠지요. 내가 그런 건 잘 알지 못해도….”

양 교수가 문학상 제정과 관련된 깊은 이야기는 사실상 모르는지 하여간 더 이상은 언급을

않겠다는 반응이어서 전 교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긴 같은 학교에 있던 분에 대해서

다른 학교에 있는 이에게 묻는다는 것도 민망하였고 가까운 사이라지만 체면 문제였다.

그리고 돌아가신 원로 교수의 부인을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양 교수의 태도에 대해서도

그는 다소 저항이 느껴져서 전화상으로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미망인이라는 표현이 객관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전 교수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아쉽고 미흡한 데가 있었다.

전 교수는 그 사모님을 전에 두어 번 본 기억이 있었다.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곧장

지금의 대학에 초빙이 되고나서 부부가 함께 그 댁으로 인사를 갔을 때에 처음 본

사모님의 인상은 좀 복합적이었다.

언뜻 보아서 그녀의 얼굴은 나이든 분에 어울리지 않게 이목구비에 너무 강렬한 데가

있어서 그는 속으로 죄송한 마음과 함께 불타는 여인의 시선을 조금 비킨 게 사실이었다.

하기야 이윽고는 그녀도 곱게 늙은 할머니의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면서 남편인 차학표

교수 보다 더 나이가 든 누님 같은 분위기로 부군을 감싸 안는 것이었다.

“여보, 부인이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여요.”

돌아오는 길에 전 교수의 부인이 여인 특유의 감각으로 이상 징후를 집어내었다.

“글쎄, 난 모르겠던데…….”

그는 부부간에 사적으로 공유하는 부분과 공적으로 달리하는 부분을 엄격히 선을 그어

나누는 성격이어서 더 이상의 대화를 피하려고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아내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중에 그 분이 주례 서기를 일절 피한다는 사실과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사실을 전 교수는 알게 되었지만 그런 일들에 관해서도 아내에게 보고성

발언은 하지 않았다.

사모님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전 교수가 본 것은 정년교수들을 모아서 치르는

대학의 공식적인 정년 퇴임식 때였다. 초로의 아름답게 나이가 든 할머니가 정년을 맞는

부군의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식이 끝나자 그들은 빨리 식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담 문학상 시상식에서나마 인연이 있어 그 중 살아있는 한 분을 다시 보게

될 참이었다.

차학표 교수는 정년 얼마 전 학과 교수들과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아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 분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내 이름 차혁표가 너무 강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아호를 하나 지었는데 하담이라고

하였어…. 물 하(河)에 말씀 담(談), 좀 느릿하고 유장한 강의 흐름을 염두에 두었지.

한글로는 담담한 강물일 수도 있고 세상의 짐을 진다는 뜻의 하담(荷擔)을 생각해내도

좋겠어요.”

그는 마지막 의미의 어려운 한자는 직접 식탁에 써보였는데 그때는 매우 쓸쓸한

낯빛이었다.

“사실 내가 언론인으로 있다가 대학에는 좀 늦게 왔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더디 흐르는

강이라고, 더딜 지(遲)자를 넣어서 지하(遲河)라고도 생각해 보았는데 불러보니 공연스레

손아래인 김지하 시인도 생각이 나고 또 지하실 같은 어두운 이미지도 있고 해서… 결국

담담한 강물이라는 뜻으로 하담이라는 걸 하나 장만했어요. 그 전에 남들이 지어준 화려한

것들도 좀 있지만…”

“김지하 시인과 연배는 다르셔도 예전에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하셨다면서요?”

물색 모르는 젊은 교수 하나가 불쑥 물었다.

“이 사람아, 남의 지난 일은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듣기만 하고 묻지는 않는 거야.”

노교수의 말씀과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이 분이 원래 언론계에 있었는데 군부독재 시절 무언가 언론 관련의 민주화 투쟁 선봉에

섰다가 감옥에도 잠시 들락거린 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정도의 소문은 학과 교수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이른바 ‘진실’은 어디에서도 새나오지 않았다.

“고문을 받으시며 무언가 발설한 게 있어서일까? 배덕자 같은 자괴감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그 무슨 지하실 조사 분실에서는 석방의 조건으로 그 속에서 일어난 일을 죽을

때까지 발설치 않겠다고 서약을 한다면서… 석방 후에 말을 꺼냈다가는 다른 치사한

일들을 그 쪽에서 다 까발려 사람을 망신 준다든데…”

그런 이야기들만 술좌석에서 가끔 뒷담화처럼 나올 따름이었다.

어쨌든 그 분의 자기 관리가 이 정도이다 보니 결혼 생활이나 주례를 하지 않는 이유를

누가 촌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자기만의 방 속에서 꼿꼿이 지내다가 정년을 맞은

분이 그 몇 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세상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만은 않은 듯, 이제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전 교수의 곁에 다시 한 번 다가온 셈이었다.

시상식이 있던 날은 절기로 소한이었다. 그동안 조금 참았다는 듯이, 아니면 시상식에

맞추어 눈꽃 송이를 보낸다는 듯이, 아침나절부터 서설이 대설주의보의 수준으로 펄펄

날리기 시작하였다.

전 교수는 눈 내리는 날의 정오 시간에 꼭 맞추어서 식장인 호텔의 소 연회실을 찾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미망인, 혹은 사모님을 뵙기가 민망하여서였다.

그에게는 아무래도 그동안의 무심이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일찍 얼굴을 내밀다가 무슨

난처한 지경에 빠지기 보다는 예정 시간에 딱 맞추어서 어물쩡 자리를 잡는 게 상책

이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정말 시작 시간에 딱 맞추어서 그가 식장에 얼굴을 들이밀고 보니 서른 명은 더 될 듯

싶은 미리 온 하객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며 헤드 테이블의

수상자 양지훤 교수와 우선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얼른 뒤쪽의 자리로 가서 몸을

낮추었다. 하객들로는 우선 문단에서 나온 안면 있는 남녀 문인 몇 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들을 빼면 하객들 거의 대부분은 하담 선생의 과거 친구들인 듯, 백발은 당연

했거니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분들도 적지 않았다.

수상자 양 교수의 가족들은 나오지 않았다. 늦게 본 어린 자녀들이 나올 자리는 아니었고

이름 있는 교향악단의 바순 연주자인 부인은 순회 연주가 많았다.

좌석을 채운 원로 하객들 중에는 과거 공중파 방송의 회장을 하던 분, 신문사의 사장을

맡아하던 쟁쟁한 CEO들도 보였으나 지금은 흘러간 시대의 유성일 따름이었다.

그들도 한 때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투사이기도 했으나 마침내 체제 속으로 들어가

용비어천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한 이력들을 암각화처럼, 혹은 화석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 남기고 이제는 이 시대와 고별을 하려고 모인 듯도 하였다.

과거 한 번도 하담 선생이 캠퍼스에서 그런 교유관계의 내색을 하지 않았던 쟁쟁한

현대사의 인물들이 민속촌의 활인화처럼 갑자기 무더기로 나와 앉아 있는 모습들은 고인의

위상을 다시 깨닫게 하는 또 다른 거울에 다름 아니었다.

만감을 느끼며 전 교수는 아까 들어오면서 혹시 마주칠까봐 걱정했던 그 곱게 늙으신

할머니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식이 시작될 즈음까지도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궁금증이 걱정으로까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하여간 더 이상 주최자를 기다릴 수는 없겠다는 암묵적 동의가 돌았는지 시상식은

월간 문화예술의 편집국장이 개회선언과 경과보고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문득

아까부터 어떤 중년의 부인이 작은 디지털 캠코더로 날렵하게 식장을 녹화하여서

전 교수의 눈에 이채롭게 들어왔다.

“아차, 저 부인이 사모님이시군. 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적절한 비율로 안면에 두루

담고 있는 또렷한 윤곽선, 그리고 좁으면서도 얕보이지 않는 당당한 어깨 곡선의

추임새…, 다만 머릿결은 너무 염색을 하셨구나.”

두어 번 뵌 기억이 뭐 그리 정확하다고 서 교수는 무릎을 치며 외칠 뻔하였다.

기억의 편린과 현상이 가까스로 이중인화에 성공하여 형상화 되고나자 전 교수는 가장

속물적인 감상을 속마음으로 터뜨렸다.

“그래, 역시 죽은 사람만 억울한 것이지….”

남편보다도 나이가 들어 보였던 분도 이제 홀로 남게 되자 무엇을 도모하겠다고

하담 문학상이라는 만장(輓章)을 펄럭이며 자신은 최상의 미용술로 한 20년 더 젊어진

모습을 하고 나타나 디지털 캠코더를 만지고 계시나.

그래, 탓할 일은 아니지. 슬픈 얼굴로 어설픈 내숭을 떨며 미망인의 기표를 내세우는 것도

오히려 경박한 모습일거야…. 하여간 놀랍고도 고맙지 않은가. 이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이런 문학상의 자리펴기만도 과연 어디야! 그리고 내 수상 차례는 언제쯤일까? 그는

마침내 안도와 감사의 감상 속에 젖기까지 하였다.

좋은 일에 비용을 지출하며 군말을 살 필요는 없다는 듯이 순서는 무겁지 않게 빨리

진행되었는데 오늘의 수상자에 대한 헌사도 길지는 않았다. 산업화시대의 인문학 고사

지경에서 삶의 가치를 되새겨보게 하는 높은 사유와 빛나는 문장력, 대략 그런 찬사가

심사위원장으로부터 나왔다.

이어서 작은 연회가 시작되고 모두들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사회자가 참석자들의

소개를 시작하였다. 전 교수는 다시 한 번 찔끔했으나 마침 아무개 교수식으로 이름과

직함만 호명하여서 미망인의 주의를 끌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연회가 시작되고부터는 미망인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캠코더를 치우고 다소곳이 자신의

접시만 해결하였으며 유명, 무명의 인사들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더니 주로 밥만

먹고 일어섰다. 정말 그 흔한 건배제의와 건배사조차 없다니, 하담 선생이 평생 좋아하던

바그너의 저 장중한 교향곡이 연상되는 분위기였다.

전 교수도 식사가 끝나자 얼른 일어섰다. 입구에서는 이 날의 수상자인 양지훤 교수와

월간 문학예술의 편집국장 그리고 미망인이 함께 서서 자리를 뜨는 하객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보내고 있었다.

“아, 전 교수, 미망인과는 처음이시죠? 저녁에 몇 분이서 뒤풀이 술 한 잔 하려고 합니다.

그때 인사 나누시죠. 내가 쏠게요. 저기 파이낸스 센터 지하, 우리 잘 가는 그 곳에서

여섯시에 봅시다. 꼭 나와요.”

양지훤 교수의 말이었다.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고 빠져나오려던 전 교수는 몹시 당황하였다.

“아, 네-네.”

그는 담담히 미소 지으며 서 있는 미망인의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녀의

인상적인 목선만 곁눈질하면서 이 교수의 초청에 간신히 답을 하였다.

“아니, 처음 보신다고…?”

그는 다행함과 섭섭함을 함께 섞어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저녁, 전 교수는 매우 중요한 선약이 있었으나 파기하고 양 교수의 뒤풀이 초대에

응했다. 양 교수와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무언가 숙제풀이의 심사 탓이었다.

석연치 않은 궁금증,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배반감까지 드는 건 웬일인가.

특히 미망인과의 기시감은 연회장을 나오면서 “두 분 처음이시지요?”라는 양지훤 교수의

한마디에 완전히 와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신 노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논리 위에 세운 추측이 무너지고 불가해의 노예가 되는

순간부터는 정신적 공황의 지경이 아니겠는가.

그날 낮 수상식에서 완전히 붕괴된 심리체계의 형해 일부라도 복원하지 않고서는 일상이

도저히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도 같았다. 그는 자기류의 비참 감 까지 섞어서 여섯시의

회동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파이낸스 센터의 지하 술집은 우리 전래의 방식으로 누룩을

띄어서 빚은 전통주가 괜찮아서 국제 학회 같은 때에 외국 학자들을 그리로 가끔 초대

하면서 두 교수의 단골이 된 집이었다.

어쨌든 그 날 저녁 시간이 마침내 오고 네 사람은 조촐하게 전통주의 신전에 모여 앉았다.

미망인과 양 교수, 잡지사의 국장 그리고 전 교수였다. 일단 기시감이 깨어지고 나서 이제

다시 전 교수가 가까이에서 본 미망인은 맙소사, 정말로 원래의 그 사모님이 아니었다.

“아, 이거 여러모로 제가 정초부터 헤매고 있습니다. 양 교수의 탓이 큽니다만….”

경황이 없는 중에 술이 몇 차례 돌자 전 교수가 작정하고 볼멘소리를 쏟았다. 전통주의

신전에서는 술김, 술기운이 제일이지 제사장이고 무수리고 따질 일이 무어야 하는 심정

으로 그는 입이 헤퍼졌다. 사실 전통주가 만만치 않았다. 문인 넷이서 ‘전통과 개인의

재능’으로 전통주를 농단하였다.

“그래, 사모님은 어디가시고 미망인이 나오셨나요?”

전 교수의 혀가 좀 꼬부라졌다.

“사모님은 돌아가셨어요.”

미망인이 서늘한 눈빛과 음성으로 천재처럼 시원하게 퍼즐을 풀어주었다.

“네엣?”

그의 꼬부라졌던 혀가 금방 도루 펴졌다.

“전 교수가 안식년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전후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 하담 선생님의

부인께서는 부군보다 연세가 한두 살 더 많으셨잖아…. 나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양지훤 교수가 옆에서 거들었다.

“맙소사, 그런 줄도 모르고---, 양 형은 가만 계시고 이 분께, 그러니까 미망인에게

직접 전말을 부탁합시다. 형이 거드니까 꼭 조교 학생 같아요.”

그는 섭섭한 감정을 이 틈에라도 섞어 넣어야 속이 좀 풀리겠다는 심사로 조교라는

표현을 아주 만고에 남을 유머처럼 구사했는데 양 교수와 편집국장은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미망인은 여유 있게 미소조차 띄면서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경직된 분위기를 확 풀었다.

“아이, 전 선생님,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철부지 같으셔. 제가 진짜 조교였어요.”

“네에?”

전 교수가 다시 놀랬다.

“그럼요, 제가 전말을 소상하게 풀어드리죠. 하담 선생님은 동경대학을 김수영 시인

하고 같이 다니셨어요. 해방이 되자 문리대로 들어와서 또 불문학을 함께 하셨고요.

선생님은 영어도 참 잘하셔서 신문사 외신부에서도 이름을 날린 진보적 지식인이었어요.

콧대 높은 언론계에서도 하담 선생님을 외경스럽다고 어려워했답니다. 선생님께서는

부업으로 그때 YMCA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특강을 하였는데 장안의 인기였고, 특히

낮 시간의 인텔리 주부들이 열광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노총각이었던 선생님은 당시 어떤

명문 세도가의 며느리와 결혼을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사모님께서 그런 식으로

이혼과 재혼을 한 것입니다. 장안에 난리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그래요, 많은 이들의

침묵 속의 보호를 받았던 것은 평소 그분의 품성이 워낙 고고, 정일하고 고독한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네, 그래요, 고독이 만유에 고요를 불러왔어요….”

“독재에 저항해서 지식인들과 문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마침내 하담 선생도 대공

분실에 붙잡혀 들어가서 옥고를 치루시고….”

양 교수가 또 조금 거들었다.

“조교님은 좀 조용히 계시구요….”

전 교수가 제지하였다.

“호호호, 웃어도 되겠네요. 글쎄 제가 바로 조교였다니까요. 선생님은 석방이 되면서 곧장

인연이 있어 학교로 들어오셨는데 학과 동료들 간에는 교류가 별로 없으셨지요. 저는

그즈음 여상을 나와서 은행에 다녔는데 마침 선생님 계시는 우리 모교 야간부 불문학과로

들어갔지요. 저희 집안이 좀 어려웠어요. 그런데 은행이 워낙 늦게 끝이 나서 맨 날 지각

대장을 하였지요.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친구가 하는 개인 회사에 넣어주셨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선생님 연구실에서 유급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에 적을 걸었고 교사 임용고사

준비를 하였지요.”

그녀는 석사가 되던 해에 서울 시내 프랑스어 교사 임용시험에도 합격을 하여서 공립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었다. 대학 때부터 시작하여 조교 시절을 지낸 그 여러 해

동안 그녀는 하담 선생과 사제지간의 선을 넘은 적도, 또 그런 마음이나 분위기도

아니었다고 한다. 선생이 그어놓은 금도가 그러하였고 그녀의 맑은 정신세계가 또한

그러하였단다.

“선생님은 항상 찬바람이 나는 분이었어요. 그게 남에게 부는 찬바람이 아니라 그 분

안으로 들어가는 찬바람, 칼바람이었지요. 고독한 분이었어요. 사모님은 평생 호강

하셨지요. 선생님이 번역을 열심히 하셔서 댁에는 항상 가정부를 둘 여유가 있었고 또

자식이 없으니 돈 쓸 일도 별로였고 술도 안하셨어요. 다만 고전음악 감상을 위한 최고급

오디오를 장만하시고 또 새로운 음향기기가 나오면 쉴 새 없이 업그레이드를 해나온

일화라든지, 거장들이 작곡했거나 지휘한 광범한 수량의 LP에 대한 수집 열은 당시

서울 장안에서 어지간한 문화인이면 모르는 이가 없었지요.”

“찬바람, 칼바람 부는 분과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습니까?”

전 교수가 이날 저녁 조금 아슬아슬하게 대화의 경계를 넘나든 것은 술 탓이 아니라

미망인의 서늘하고 부담 없는 언변 덕택이었는지도 몰랐다.

“글쎄, 그런 질문도 나올 수가 있겠군요. 칼바람이 부는 황야에서 우리는 왜 외투의 깃을

세우고 머뭇거렸던지…, 엄한 스승과 심약한 제자의 사이, 결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가정이 어려웠던 저를 처음부터 안쓰러운 심정에서 동정과

연민으로 보살피셨고, 저는 또 선생님을 존경과 외경으로 대해 오다가 선생님이 영위해

오신 부부의 역사랄까, 부부 관계사를 어느 순간 알고부터는 가당찮게도 선생님을 연민의

심정으로 대하게 되었지요. 생각해 보세요. 한 세대 전, 재혼의 여인과 결합한 총각의

마음이 항상 조용한 호수일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만나오던 어느 해 우리 두 사람은 각각

아주 어려운 개인 형편을 맞았어요. 제가 대학원을 마칠 때였어요. 지금 와서 구체적인 건

묻지 마세요. 그저 흔히 상상 가능한 어려움을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맞았어요.

서로 그 힘든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은 절대 고독의 빗장을 풀고 저를 안았지요.

한번 봇물이 터지고 나자 우리 사이는 걷잡을 수가 없었어요. 사실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지금 꼭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러하였고 그것도 한 큰 원인이

되었지요. 그제서야 저는 그 분의 부인을 의식했어요. 질투도 많이 하고 조사 반장처럼

조사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저와는 20년 이상 차이가 난 그 부인이 나와

외모가 참 많이 닮았더라구요. 그렇다고 하담 선생님이 총각 때의 한 번 실수로 강퍅한

유부녀와 억지 결혼을 했다든지, 그게 억울하여 비슷한 외모의 젊은 여자, 숫처녀, 연민의

조건을 갖춘 제자에게서 대리 충족을 하셨다는 상상도 격에 맞지 않아요. 참, 외모가

비슷한 사모님이 속내와 성격은 저하고 달리 매우 급하고 불 같았어요….”

미망인이 냉수를 청하여 목을 축이는데 편집국장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밀애, 이런 표현의 적확성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구요…, 하여간 두 분이 아주

조심을 하셨어도 이런 사실은 일단 세상 밖으로 불거져 나왔고 하담 선생님과 그 첫

부인께서는 결국 파국 일보 직전까지 치달은 전쟁을 치루었잖아요. 그게 정확히 언제

적이었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아까 연회장에서도 이야기가 사뭇 나오는 듯하더니 금방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좌석의 눈치를 본달까, 분위기를 관망해오던 문예지의 편집국장이 이제는 술로

잘 익은 얼굴을 하고서 앞뒤 적절한 질문을 하였다.

“네, 제가 이번에 하담 문집을 만들 때 그 분과 친교가 깊었던 많은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저도 하담 선생님이 부인과 이혼 직전까지 간 그 전쟁의 원인 제공자로 전쟁의

중심부에 있었으니 참으로 할 말이 많았지만 문집에서는 모두 뺐지요. 돌아가신 분들이라

결코 반론할 수 없는 이 마당에 그분들이 빠져들었던 관계의 본질과 또 그 변질을 왈가

왈부한다는 게 주제넘기도 하고 분명히 또 하나의 오해의 출발점이 될 듯싶었어요.

그러니 문집에도 넣지 않았던 사실들을 이제 와서 다시 재론 하고 싶지는 않군요.

용서해 주세요….”

미망인이 입을 닫았다.

“편집국장님의 질문과 그 답변에서 제가 세속적 궁금증을 좀 풀어 볼까 했는데 역시

결론이 너무 깔끔해서 얻을게 없군요. 잘 알겠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하담 선생님과

여기 앉아계신 미망인께서 언제 재결합을 하셨는지, 그 순애보를 연대기적으로나마 좀

정리해 주시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해도 하담 선생님의 세계를 재음미하여

다시 그려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정도면 후학으로서는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교수님. 하담 선생님 이야기라기보다 제 이야기로 들어주시지요. 여기

두 분은 제 미천한 과거사를 이번 출간을 계기로 대략 아시지요만 다시 한 번 요약을

하겠습니다. 저는 졸업 후에 서울의 여자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하다가 프랑스

문화부에서 해마다 시행하는 해외 프랑스어 교사의 재교육 프로그램으로 파리에 갈

기회가 생겼지요. 저는 파리의 ‘쌩 제르멩 데 뿌레’에 있는 ‘시떼’, 그러니까 국제 학사에

들어가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소득은 그 곳 프랑스어

교수님과의 결혼이었어요. 하담 선생님께서 부인과 해를 넘기는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였지요. 그 정황이 프랑스에서의 제 국제결혼의 한 큰 원인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하여간 저는 남편인 ‘마르셀’을 통하여 제 고독과 상처 난 자존심의 일부를

치유 받고 싶었고 또 그렇게 되었지요. 파리의 인문학계에서는 그때 이미 냉엄한

이성주의 비평의 시대가 전개되었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 살을 부비며 차가운 고독을

불태워 없애버리고자 했어요. 우리가 살을 부빌 때 내가 ‘연민’ ‘연민’이라고 외치면 그도

프랑스어로 ‘피티’ ‘피티’로 화답하였지요. 코메디 같다고 웃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녀는 건배를 제의하여 술잔을 부딪치더니 얼른 한 잔을 다 비웠다.

“여기 술이 참 좋군요. 맛이 있어요. 하여간 이렇게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파리로

사라지면서 서울의 두 분은 일단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십여 년간 파리 생활을 하며

한국과는 인연을 끊었지요. 세월은 무서워서 그러는 동안 서울의 하담 선생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셨는데 그 이듬해에 연상의 그 사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육 개월 후에 이번에는 파리에 있는 제 남편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어요. 워낙 저보다

나이가 십여 년이나 위이긴 했지만 참 갑작스러웠어요. 저와 하담 선생님이 마침내 결합을

하는 데에는 이러고도 한 두어 해가 그냥 지나갑니다. 서로 연락을 끊고 지냈으니 혼자된

소식들을 몰랐었고 알았더라도 어찌 당장에 결합을 하였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냥 모르고 흘러갔던 그 두 해가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군요. 하여간 저는

프랑스인 남편이 작고하고 나서도 이년간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파리 생활을 다 접고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공연히 억울하고 누구라 대상도 없이,

아니 사실은 이미 작고하신 줄도 몰랐던 사모님이 가장 큰 대상이 되어 혼자 된 제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더군요. 하지만 마르셀이 작고한 다음, 두 해를 보내고 나니 고독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어요. 그러면서 선생님 생각이 고문처럼 시시각각으로 저를 짓눌렀지요.

아까 드린 말씀처럼 그 분이 상처를 하신 줄은 전혀 모른 상태에서도 이제는 내가 그 분과

함께 하여도 좋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직관처럼 제 머리에 꽂혀 들어왔어요. 아니

생각해보면 저는 지난 인생이 모두 하담 선생님과의 존경, 연민, 사랑, 그런 것으로 꽉 찬

생활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이자 수단이었고 해결해야 할 최종의 인생

목표 같은 것으로 나를 이끌고 지배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약이 없이 내가 어찌 파리

생활을 감내하며 살았겠어요…. 나는 언젠가는 하담 선생님과 살리라. 그게 살아생전에

배를 맞대고 사는 게 못 되면 죽어 뼛가루로라도 섞어 함께 살리라….”

“하담 선생님과는 몇 년을 함께 사셨나요?”

전 교수가 미망인의 번득이는 눈길을 피하며 더듬거리는 말씨로 물어보았다.

그녀의 안광이 번득이기 시작한건 눈물 탓도 있었겠지만 동공에 아예 인광이 내재하여

타는 듯, 푸른빛이 유현하였다.

“몇 년을 함께 살았냐구요? 모르셔서 그렇게 묻는 줄 알지만 참 여유 있는 질문이십니다.

한 해를 채우지도 못하고 겨우 마지막 6개월을 그 분과 살아보았어요.”

그녀의 눈빛을 번쩍이게 한 눈물이 마침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한 해는 커녕 육 개월이나 겨우 채웠다고 답하며 펄쩍 뛰는 시늉에는 파리지엔느의

제스처가 담겨 있었다. 정초의 따뜻했던 날씨가 억울했던지 폭설이 쏟아진 새해의 첫

주말은 해가 빠지면서 기온조차 뚝 떨어져 입구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네 사람이 술을 마시는 전통주가에 늦은 손님 몇이서 어깨의 눈을 털며 들어왔다.

“우리 눈이나 좀 맞으며 걸어요. 일찍 들어가셔야 하는데 혼자인 제가 붙들고

늘어지나요?”

미망인이 세 사람을 고즈넉이 쳐다보았다.

“저는 비둘기, 아니 기러기 가족입니다”

편집국장이 얼른 고독한 신상을 고백하였다.

“저는 마누라가 춥다고 방학 맞은 아이들 데리고 제주도로 갔답니다. 친정이 그곳이라서.”

전 교수도 홀로였다.

“양 교수님은? 수상식에도 홀로 오시고---?”

“바수니, 아 마누라가 바순을 연주하는 바수니스트인데 저는 바보 순이라고 그렇게 부

르지요. 바수니는 오늘 지방 공연이 있지요. 항상 늦어요. 연주가 끝나면 바순을 들어주는

피리 부는 총각에게 미안해서 맨 날 한잔 대접을 하고 들어온다네요. 연주자들도 끝나면

뼛속까지 고독하답니다. 오늘 상을 탄 바수니 남편이 고독 상도 일등 같아서 이차까지

책임질게요.”

“아뇨, 이차는 제 차례 같군요. 고독 상 차례에서 말입니다.”

미망인이 어림없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하담 선생님과 저는 세상에서 가장 친했다고 자부했어요. 마지막 돌아가실 때에도 새로

보완한 오디오 기기를 손보시다가 순식간에 쓰러지셨지만 우린 그렇게 함께 음악 들으며

대화를 나누고 아니 그런 것이 없어도 서로의 눈만 들여다보면서 몇 날을 보낼 수 있었어요.

예전에 몰래 데이트를 할 때에도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자부하였고 오래 만나지

못하며 지낼 때에도 항상 존재를 의식하면서 살아왔어요. 우리는 부부이기도 했고 연인,

정부, 부녀와 모자이기도 했어요.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또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보다도 더 가까웠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런 나보다도 선생님에게 더

가까운 존재, 선생님과 더 완벽한 묶임이 된 존재가 있었나 봐요. 그건, 그건 고독이라는

존재였어요…. 나 몰래 하담 선생님과 내통한 그 고독과 싸우라고 내가 문학상을

제정했나 봐요. 그런 분의 여자였으니 이차는 내 차례이지요.”

바람과 눈발이 내통하는 거리로 네 사람은 걸어 나갔다.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7번 Op.31-2 템페스트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Kun-Woo Paik,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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