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문학의 강

원평재 2016. 9. 19. 10:40














보리누름에

                                                                      

 

그저께는 "서울 특별 시장"과 "용산 구청장", 그리고 또 뭐더라 하여간 여러 가지로 높은

사람들을 뽑는 투표 날이라 초, 중등학교가 모두 쉬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인근에 있는

"용산 가족 공원"으로 놀러갔다. 투표는 물론 일찍 마쳤다.

"삼각지 건강이용원" 원장인 영감은 투표하는 날, 휴일 손님도 만만치 않다고 업소를

지키겠다니 어쩔 수 없이 우리 세 모자, 그러니까 나와 아들과 딸만 공원으로 출동을

하였다.

요즘 같은 행락 시즌에 휴일 이발관 손님이 어디 있겠나, 영감이 혼자 남아서 면도사

아가씨들과 시시덕거릴 꼼수를 두는지도 알 길이 없었으나, 하긴 면도사 아가씨들도

휴일이면 모두 놀러갈 약속으로 업소에 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또 영감도 요즈음은 기능이 많이 약해졌다. 거기에다 워낙 내 감시가 심하고 아이들이

커가니까 행실도 많이 좋아졌고 행동도 점잖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귀찮으니까 안마 의자에서 낮잠이나 즐기려는 속셈 같다.

인삼에 용을 넣어서 한약 한 제라도 달여 먹여야 할 것 같다. 그게 영감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영감만 빼고 우리 세모자는 용산 가족 공원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그냥 놀러온 게 아니라 아이들 현장 학습 숙제 때문이었다.

학교 수업은 줄어들고 집에서 알아서 해오라는 내용은 많아지니 우리처럼 나이 많아서

아이를 둔 데에다가 가방 끈까지 짧아서 아는 게 없는 부모들은 미칠 지경이다.

젊은 가정교사를 두어보기도 했지만 나도 불편하고 영감도 청년 대학생들이 드나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치여서 그만 두게 한지도 오래이다.

그래도 아들, 딸 모두 공부를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니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도 아이들은

나의 도움을 기대하는 건 아닌 눈치이다.

나는 공원에 들어오자마자 아이들과 점심시간에 만날 약속을 해놓고는 각자 알아서

움직이도록 흩어졌다.

나도 오랜만에 오월의 햇살 아래 슬슬 나 홀로 산책을 즐길 심산이었다.

 

아, 보리 누름---.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요즈음 보리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공원 내 어떤 건물의 한 모퉁이에 보리밭이 가꾸어져 있지 않은가.

현장 학습용이기도 하겠지만 관상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보리밭이 아름답게 거기 펼쳐져

있었다.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솟았고, 어처구니없게도 내 밑에 치, 그러니까

아랫도리에도 심상치 않은 반응, 그러니까 물 끼가 스몄다. 미쳤지.

내 고향인 남해안의 "빈포"는 포구이긴 하지만 얕은 뒷산 쪽으로는 밭농사가 있었다.

물론 어업이나 농업이나 둘 다 시원치 않은 깡 촌이긴 했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이미 보릿고개 같은 것은 없어졌는데도 가난한 내 집안의 생활은

여전 고달팠다. 더욱이 아버지가 맨 날 아프신 탓에 어머니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두 분이 다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으셨고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노동판에 나가신 어머니의 고생이 막심했는데, 그나마 관절염을 앓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콜록 콜록이었고 어머니는 끙끙 앓으셨다. 특히 어머니가 이를

악물고 참으시면서 앓는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관절염의 통증이 때를 가리지는

않았지만 봄철의 일교차가 심한 나날들이 견디기 힘드셨던 것 같다.

꽃잎이 흐드러지고 뻐꾹새가 뻐꾹 거리고 장끼가 끼드득 까투리를 유혹하는 봄날에

어머니는 끙끙거리며 일을 나가셨다. 그 때 새벽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하시는

말씀이, "보리누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신음소리였다.

"엄니요, 보리누름이 머요?"

내가 물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아, 보리가 패고 누렇게 될 때가 보리 누름이제, 그것도 모리나. 하기사 보리가

팰 때 보리밭이 눌리고 자빠지는 사고가 많다만---. 그래서 보리누름이라고도 한단다.

못된 남녀 간에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조심 하거라. 네년도 엉덩이가 커서 걱정이다."

나는 보리누름에 대한 어머니의 설명과 경고를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나도 보리가 팰 때쯤 두 남자로 부터 보리밭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보게 되었으니 결국 "보리누름"을 하고 만 꼴이 되었다.

보리누름이란 그게 그러니까 보리를 누르고 하늘을 보느라 보리밭을 쓰러뜨리는 일인데,

그걸 나도 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나마 어찌어찌 빈포 중학교를 들어가던 해에 처음에는

먼 친척뻘이 되고 나이가 많은 아저씨로 부터 어느 날 밤에 강제로 보리밭에서 몸을

빼앗겼다. 내가 조숙한 데는 있어서 이미 가슴도 나왔고 생리도 할 때였다.

어떻게 된 건지 처음 당하는데 피도 나오지 않았고 고통도 없었다.

사실은 야릇한 호기심까지 내 몸 속에서 꿈틀거렸다. 나이든 친척 아저씨는 곧장

동네에서 사라졌는데 후일담이라고 하던가, 하여간 그 뒤 이야기는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산에 나가서 장사를 한다는 동네 오빠가 나를 건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오빠의 이름은 춘식이였다. 나보다 나이는 일곱 살이 많았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보리누름 계절에 나를 몇 차례나 보리밭으로 데려가서 내 몸을 누르고

보리를 뉘었다. 나는 평소에도 그를 무척 좋아하였다. 우리는 좁은 빈포 바닥의 시선을

속이고 보리누름을 몇 차례나 하였다.

"야, 넌 어떻게 된 게 이리 조숙하냐. 놀랠 노짜다."

그는 이런 소리를 몇 번이나 하였다. 나는 그때 "조숙"이라는 말의 뜻도 몰랐고

"놀랠 노짜"는 더더욱 몰랐으나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그

오빠는 군대에 입대하면서 나를 버렸다.

3년 후인가, 제대를 하고 그는 한두 번 빈포를 찾아왔으나 그의 옆에는 이미 서울 말씨를

쓰는 멋쟁이 아가씨가 파란 선글라스를 끼고서 붙어있었고 두 사람은 곧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는지는

여기에서 다시 밝히고 싶지도 않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남자에 대해서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나는 내 몸을 꽁꽁 동여매었고 장차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남자에게는 내 몸을

열지 않기로 독기를 품고 맹세하였다. 그와 함께 나도 장차 대처로 나가서 돈을

벌어야한다는 야무진 마음도 가슴에 새겼다. 대처의 대상도 마산, 진주, 부산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서울이어야 하고 나도 서울 말씨를 연습하여 유창하게 쓰리라고 우리의

맹세 같은걸 혼자 하였다.

 

남들은 뒤에서 퇴폐 이발관이라고도 하는 건강휴식이용원을 운영하는 지금 영감이

고향 빈포에 가끔 내려와서 시골 처녀들을 데리고 올라갈 때에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동네에 돌았고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은근히 눈짓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나를 데려가려고 할 때가 되자 당연히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그러나 이때가 성공의 기회다 싶은 나는 어머니의 반대를 어거지로 꺾고 영감에게는

순진한 척 내숭을 떨며 그의 유혹에 가까운 권유를 받아들여서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마침내는 그의 아내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던 것이다.

테레비에서 "인간 승리"라는 프로가 나올 때마다 나는 역경을 이긴 주인공에게 박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내 밑바닥 비밀 때문에 몸을 떨었으며 혼자 울고 그리고 웃었다.

며칠 전에는 영감이 집에 들어와서 그 사나이 "춘식"이가 이용원에 들렀더라는 말을

하였다. 영감은 물론 나와 춘식이의 관계를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니 내가 결혼 당시에 새파란 숫처녀였던 걸로만 알고 있다.

"춘식이 오빠가 왔다구요?"

"그래, 당신도 알지?"

"알긴 뭘. 한 동네 선배니깐---."

"당신 안부도 묻던걸?"

"빈포 남자치고 나를 궁금히 여기지 않는 사람 없을걸요. 내가 한 미모 하잖아요.

그래서 또 인기도 많았고."

"동부 이촌동에 사나봐, 그러니까 용산 공원 근방이라나---. 한번 같이 만나서

저녁이라도 하자는 거야."

"싫소. 우리가 돈께나 모은 줄은 알겠지만 밀실 이용원 사장에 면도사 마누라, 뭐 그런

수준으로 볼게 뻔한데 왜 만나요?"

"내 마음도 그래. 이 자식이 찾아 온 김에 건강 휴식 이발을 하고 가겠다기에 그냥

내보냈어. 우리도 이제 그런 장사는 안한다고 했지."

"잘 했어요. 뭘하고 산답디까?"

"동부 이촌동에서 부동산한다나 봐. 그런데 어째 이제야 삼각지에 나타났을까?"

"요즈음 공인 중개사가 쏟아져 나온다면서요? 뭘 하다 망해서 새로 시작하나 보네요."

 

물론 이런 대화 때문에 내가 용산 가족 공원으로 일요일에 나온 건 결코 아니었다.

목적은 당연히 아이들 현장 학습 숙제 때문이었다. 그를 만난다는 건 어쩌면 두려움의

대상 그 자체일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움켜쥔 행운을 이제 와서 그로 인하여 놓칠

우려는 전혀 없었다. 그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정작 겁나는 것은 옛날 보리누름에 내가 그 오빠를 받아들이며 느꼈던 그 강렬한 희열이

아직도 내 몸 저 속 어딘가에서 끈적끈적 꿈틀 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타고난 욕망과 희열을 나는 꽁꽁 묶어서 기억의 저편에 두면서 내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써먹고 말았다고는 생각한다.

그래, 달콤하고 즐거운 추억보다는 증오와 분노의 힘이 초인적이라고 어디선가

읽었던가 들었던가 하였지. 나같이 가방 끈이 짧은 사람도 책을 읽고 그런 것쯤은 알고

이해하고 마음에 새긴다.

증오와 분노로 변질된 내 희열, 내 욕망의 기억, 내 나이 열 넷인가 열다섯에 문득 내

정수리를 쥐나게 했던 그 떨림을 최근에 와서 부쩍 기력이 떨어진 영감을 두고 사는

내가 다시 원점으로 반추한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상상을 동반하는 셈이었다.

아니,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게 아니다.

내가 그를 이기고 복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모욕을 갚기 위하여 몸을 꽁꽁 여미고

살아 온 지난날이 하루아침에 그의 앞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억울하고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조숙했었지. 그런 내가 지금의 영감과 결혼하여서 어디 한번이라도 정수리에

쥐가 난 적이 있었던가.

피도 마르지 않은 내 머리통에 쥐가 나게 한 사내가 우리 아파트 근처 "동부 이촌동"으로

이사를 와서 "용산 가족 공원"이라는 말을 흘리고 간 것이다.

동부 이촌동과 용산 공원이란 말을 흘린 것은 정말 의도적인 것 같았다.

망할 놈!

 

그런데, 그런데 내 밑에 치는 왜 이렇게 뜨거워지기 시작하는가.

오래 꽁꽁 묵어 놓았던 내 비밀의 문에 달린 감춰진 초인종이 마구 울리기 시작하다니---.

갑자기 공원 입구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춘식이 오빠를 닮은 중년의 사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한참을 서서 나를 보더니 곧장 나에게로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전시실이 있는 중앙 건물 쪽으로 달려가서 인파 속에 몸을

섞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급히 찾아 헤맸다.

단순한 빙의 현상인가?

아니 그 미지의 사내가 나를 향하여 과연 오고 있기나 하였단 말인가.

숨을 겨우 고르며 나는 여러 생각을 정리해 보기 시작하였다.

아, 그런데 모처럼 내가 갑자기 달려서 그런가---.

쓰지 않던 근육들, 예컨대 종아리 같은 데에 갑자기 정말로 쥐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체의 저 오묘한 구석에도 정말 얼마만인가, 갑자기 쥐가 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어듣기

      01. 보리밭 (테너 안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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