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학 산책

미국문학 산책을 안동에서

원평재 2018. 10. 2. 14:57









안동 신우 대학의 초청으로 미 문학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잠시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미 문학 산책 (강연 요지)

 

미국문학 통사에서 배우는 삶의 의미

                                                                     

영문학, 특히 미국 소설을 전공하고 강단을 지킨 이력 때문에 아직도 인문학 관련으로 연단에

불려나갈 때가 적지 않다. 대체로는 주요작가와 작품을 이야기할 계제가 많지만 때로는

미국문학 전체를 통사로 말해 달라는 주문도 받게 된다.

단체가 자주 모이기는 힘들다보니 일거에 전부를 들어야겠다는 요청에 처음에는 펄쩍뛰었으나

생각해보니 그 나름으로도 의미가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한 시대의 시대정신이나 이를 반영한 문학작품이 전후 상관없이 돌출적으로 나올리는

만무하고 어디까지나 긴 맥락 속에서, 거친 혹은 잔잔한 물결을 타고 이어지는 것이지

무 자르듯 장을 가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시리즈로 하는 강의가 아니라면 한 토막을 쳐서 작가나 작품 혹은 시대상을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도 간절해진다.

아주 최근에는 미국 동부 문인협회의 요청으로 미국문학 통사에 관한 강연을 하루 저녁에

모두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펄쩍뛰는 시늉을 하였으나 금방 한번 해 보겠다고

수락을 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의의와 작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달 말경에는 국내의 어떤 문화대학에서 같은 제목의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의미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고 할 것이다.


미국이 독립을 이룬 것은 잘 알다시피 1776, 유럽에서는 18세기 낭만주의의 물결이 한창

대륙과 섬을 휩쓸 때였다. 미국의 독립운동에는 여러 정치 경제적 요소가 거론되지만 이런

시대정신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인문적 입장에서는 이런 인본적 관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어쨌거나 이 낭만주의가 사실 지적인 측면에서는 그전의 유사고전주의나 20세기의 모더니즘과는

괴리가 있으나 미국이라는 개척지의 여건으로는 문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식민지시대의 미 동부 거주자들의 지적인 문학 활동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초기 개척민들에게는 문학적 소양보다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화두가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대표되는 생활의 지혜, 공리적인 금언 같은 글쓰기가 주목을 받았다.

또한 독립선언문이 문학으로 대접받는 것은 우리의 독립선언문의 위상과 물론 동일하다.


독립 직후에 이름을 떨친 『스케치북』의 워싱턴 어빙은 미 동부 지방의 여러 풍물과 전설을 글로

엮지만 이 창작집 속에는 영국에서의 기행문도 다수 포함된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의 고향 영국 런던에서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관심이 더 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자기 작품의 작가로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서 자신은 소개자라고

뒤로 빠지는 등, 당시의 양반 행세가 어떠하였는지도 보여준다.

한편 퓨리턴들의 건국이념이 지배적이던 이때에도 뉴잉글랜드의 지성인들은 교조적(dogmatic)

종교관에 매몰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내더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불륜을

저지른 헤스터 플린을 끝까지 정죄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궁극적인 인간 승리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 땅의 “미투”운동과 그 향방이 어떤 극단의 사고와 결론에서 유일한 진리로 자리매김

하려는 건 아닌지 비교해볼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허먼 멜빌이 쓴 『백경』에서는 흑백논리의 위험을 이미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백경은 흰색의 고래이지만 악의 상징이 되는가 하면 이를 퇴치하려는 아합 선장은

선의 상징이기보다는 편집광적인 모습으로 독자의 외면을 산다.

이 작품의 화자인 이쉬메일은 아브라함의 적자가 아니라 하갈과의 서자인 이스마일의

이름인데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지만 이교도인 퀴켁의 우상숭배 의식에 인간애로서

참여를 해준다.

 

 

이 부분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그 마크 트웨인이 쓴

 『허크 핀의 모험』에서 이 소년이 흑인을 감추어주는 “불법행위”와 함께 앞으로 올 미국 문학의

큰 궤적을 예고해주고 있다. 선과 악, 준법과 불법이라는 이분법이 인간애라는 제3의 해법에서

무력화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같은 나라에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참혹한 갈등의 시기였다.

정서적으로는 지금도 남부정서라고 하는 것이 상존하고 문학적으로는 “탈주자 그룹”이라는

서정의 집단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직후에 남부는 전쟁배상금이나 전범재판에서

모두 자유로워진다. 남군 최고사령관은 이듬해에 향리의 대학 총장이 된다. 남북 간의 전쟁을

치루고 빨치산과 국군의 대결, 제주 43사건, 묘향산 구국대의 전설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크게

앞선 교훈으로 다가오는 성 싶다.

양차대전을 겪으면서는 『무기여 잘 있거라』나 『젊은 사자들』 등에서 반전 혹은 염전 사상을

그린 작품에 일단 주목을 하지만 이 작품들은 원래 기존의 서술방법론이나 주제의 전개 등에서

상투적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살육전의 참화가 인류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총체적

아수라장이었다.

독일 후방 드레스덴의 대 폭격으로는 어린이와 늙은이만 남은 후방이 완전히 프라이팬이

되어버리는 지경이었다. 커트 보니것은 『제5도살장』에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부조리한

환상으로 이끌고 가서 기이한 SF를 구성한다.

조지프 헬러는 『캐치22』에서 전폭기의 대량학살과 그 조종사의 고뇌를 블랙코미디로 펼친다.

이런 소설에서는 승자와 패자, 악과 선의 대결이나 응징은 너무 여유로운 주제일 따름이다.

9-11을 겪은 최근의 미국소설에서는 테러가 주는 인간의 불안의식, 종교적 정치적 독선,

배타주의,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아비판이 나온다. 톰 크랜시가 쓰는 대중소설에

가까운 작품은 이러한 깊숙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폭발적으로 팔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비롯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들을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선악의 경계가 해체되는 경지를 그리는 작가와 작품도 많다. 마이클 코널리의 시리즈에서는

살인범이 바로 FBI 수사관이라는 설정도 나온다. 절대적 진리와 신념에 대한 회의도 주제가 된다.

1960년대의 포스트모던 작가, 토마스 핀천, 존 바스, 쿠버, 커트 보니거트의 뒤를 이어서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매듀 필의 『단테 클럽』은 역사적 추리 소설의 영역에서 인류사의

수많은 모순과 역설, 독선의 폐해와 박해 등을 거론해본다.

댄 브라운은 『천사와 악마』에서 천사와 악마의 관계를 해체하며 제3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는 생명과학과 로봇 공학은 악한 인간과 착한 클론 혹은 로봇, 그들의

자율적 진화 등을 다루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정체성과 선악 이분법의 표류를 다루고 있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대중문학), 활자문학과 영상문학, 종이책과 전자책, 인문학과 과학의 대립,

전이, 전도 등의 현상 속에서, 그리고 또한 인종과 젠더의 정체성 위기에 처한 오늘의 현실을

문학이 어떻게 반영하고 조치하고 진단하고 출구를 마련하느냐 하는 미국문학의 흐름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가치의 전도 혹은 교환은 과연 21세기에 걸맞은 방향인가,

과연 주홍글씨의 시대나 백경의 난투극 상황보다 무언가 정반합의 지양을 기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 것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한다.

미국 문학 통사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가치관을 재음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