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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소설 민영환과 이승만의 세계

원평재 2020. 6. 4. 16:57

 

소설 민영환과 이승만의 세계

 

근대 리얼리즘 문학의 대두와 함께 역사소설의 변경 문제는 항상 첨예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이전 낭만주의 시대의 소설세계에서는 역사소설이 현실적인 바탕보다는 사뭇 과장과 상상의 야담적 허구 세계를 기본으로 하여서 로맨스 문학의 뼈대가 되었고 로맨티시즘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영국 역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며 아이반호웨이버리 시리즈로 유명한 월터 스코트의 예를 들어보아도, 그는 독일의 고딕 로맨스 소설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데 모두 리얼리즘 소설에 앞선 당대의 비현실적 허구적 구성이 우선하는 특징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근대 사실주의 문학사조와 함께 낭만적 서사에도 변형은 필연이었다. 야사나 신화에 근거한 역사는 사실성에서 독자의 외면을 받으면서 이제는 역사로부터 빌려온 사실과 소설적 진실성을 지니는 허구를 접합하여 역사적 인간의 경험을 보편적 인간의 경험으로 전환하는 문학 양식의 진화가 문학사에서도 시대정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독서대중의 요구가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기에 역사소설 작가에게 요청되는 덕목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나 예지를 활용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와 시대적 요구에 맞게 변형, 수정, 가감하는 능력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돌아와서도 역사소설 유형의 변모를 살피면 서구의 궤적과 비슷한 바를 볼 수 있는데 지면 관계상 개화기 이후를 잠시 들어본다면 이광수(李光洙)마의태자 麻衣太子·단종애사 端宗哀史·이순신 李舜臣, 홍명희(洪命熹)임꺽정 林巨正, 김동인(金東仁)젊은 그들·운현궁(雲峴宮)의 봄, 박종화(朴鍾和)금삼(錦衫)의 피·대춘부 待春賦등을 들어볼 수 있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제가 과거든 현재든 상관없이 역사의식을 소설의 당위적 전제로 삼으면서 스토리를 잘 녹여낸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이 역사의식에 가장 크게 조명되는 인물을 들어본다면 광복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전기는 다수 나온 바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는 일대기 같은 문자그대로의 전기에 다름 아니어서 생생한 공감대나 기승전결의 스토리 성 측면에서는 독자의 입장으로 볼 때 부족감과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 조선말의 역사적 격동기와 전환기에서 이승만은 어떻게 그의 젊은 날을 갈고닦았으며 어떤 우연과 필연의 곡절을 겪으며 입지할 수가 있었을 것인가.

이러한 점들은 표면적인 사실 나열만으로는 결코 사실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객관적이지도 못할 수가 있다. 오히려 깊은 상상력과 성찰이 전재되지 않으면 필연성을 간과하고 우연으로 치부하며 진정한 의미성은 허공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 이승만이 되기에는 우연인 듯 필연인 우리 민족사의 비운의 주인공이자 선각자이며 또한 의혈의 애국자 민영환이라는 존재가 동시대인이자 선배의 입장으로 등장해야만 한다. 즉자적 존재로서의 이승만에 대자적 존재로서의 민영환, 이 두 수레바퀴는 서로 보완을 하여 굴러가며 때로 이인삼각의 조화 속에서 민족적 전환기의 역사를 풀어나가는 필연으로 또한 역사소설의 불가분의 존재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무나 착안하기 힘들지만 엄연한 사실이자 묘하게 숨어있는 존재이기도하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성을 깊게 파고든 소설가가 민병문이다. 민병문 작가는 원래 경제 분야 전문의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논설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집과 소설, 평론집 등을 여러 편 낸 바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역사의식에도 투철한 혜안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민병문이 지은 소설 민영환과 이승만책 속의 두 주인공은 조선말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민영환은 1861년에 태어났고, 이승만은 1875년에 태어나 무려 14세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은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이 절묘하다. 그들이 뭉친 것은 배달민족, 환인, 환웅과 단군자손으로서 옛 고조선의 영화를 되찾자는 일념에서이다.

작가는 사실을 기둥 삼아 상상력으로 사건과 일화를 만들어 소설의 집을 흥미롭게 지었다. 북한산 문수암에서 두 사람은 첫 대면을 한다. 불당 앞 계단을 서성대며 주변 풍경에 취해있는 민영환에게 소년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선비님, 부처님께 뭘 빌었어요? 과거 급제, 아니면 수명장수?” 당돌한 소년의 질문에 민영환은 흥미를 느끼며 그와 다정스럽게 얘기를 나눈다. 그러던 중 소년은 한시 하나를 남기고 어머니와 홀연히 자리를 뜬다. 그 시는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간다네.’라는 내용이었다.

민영환은 소년 이승만이 남긴 심오한 시 내용에 감탄하며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한다. 소년은 커서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부터 1904년까지 5년 넘게 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문수암에서의 인연으로 민영환은 이승만의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한다. 그의 충실한 조언은 이승만이 정치 외교를 통해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게 된 원동력이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숙명처럼 이끌리어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한 혈맹의 동지가 된다. 특히 책 말미 민영환의 주선으로 이승만이 1904년 대한제국 독립을 청원하고자 미국 방문이 눈에 띈다. 그가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대한제국 밀서와 하와이 교포들의 청원서를 전하지만, 일본의 반대 공작으로 정식 접수에는 실패한다. 강대국들의 나눠먹기식 밀약에 그는 땅을 치며 통탄한다.

그러던 사이 대한제국은 을사오적의 밀실 조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다. 민영환은 이 조약의 부당함을 단식으로 항거하다 마중물이 되고자 끝내 45세 나이로 자결한다.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적인 사실을 근저에 두고 있다. 그 외는 가공인물을 등장시킨 사건들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산물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허구(虛構)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모두 허구만은 아니다. 작가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소설을 읽으면 재미를 더한다.

후대에 와 정치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 편에서 바라보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잘못한 부분 이상으로 잘한 부분이 많은 애국지사라는 것은 역사적인 고증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1910년부터 해방 이전 동안 해외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한 독립 운동가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작가가 과거를 반추(反芻)한 것은 희망적인 미래를 열기 위해서일 것이다. 더불어 대한민국이 세계 11대 경제 대국이 되기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선현들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긴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한반도로 쪼그라든 현실을 개탄하며 옛 고조선의 영화를 되찾자라며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모두 41장으로 서술된 이 작품은 각장이 독자적인 내용을 담은 옴니버스 스타일로 되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어 내려갈 수가 있는가하면 또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서 소설의 줄거리를 풀어나가고 있다. 리뷰하는 입장에서 주요한 장의 제목을 한번 나열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표적으로는 문수암 해후, 운현궁 대결, 칼날을 피해, 부대부인 호출, 과거제 폐지, 배재학당, 만수도사, 이승만 뜨다, 서재필 송별, 뉴욕 뿌리심기, 건국 비자금, 이승만 편지, 리틀록 인연, 우남과 우룡, 감옥 가는 길, 밀사 수락, 만남과 이별 등등이 풍운의 역사를 은유하고 있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없다. 새해와 새봄맞이에 이 역사소설이 새로운 정기를 부어 넣어주는 촉매가 되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