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모란 동백

원평재 2020. 6. 13. 09:41

 

 

모란동백

김 유 조

열흘기한으로 짧게나마 모국 방문길에 나선 것은 집안의 경조사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오빠 네의 큰 아들이 부랴부랴 혼례를 서둘러 올리게 되었는데 중환을 앓고 계신 내 친정아버지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된 탓이었다.

결혼식은 성황이었으나 아슬아슬하게 끝났다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밤 비행기로 장조카와 조카며느리가 신혼여행을 동남아로 떠나고 난 다음날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오래 앓고 계셨기에 차라리 큰 슬픔은 없었고 상속문제도 법대로 잘 처리되었다. 멀리서 살아가는 일에만 매달려 오래 뵙지도 못하고 전화로만 불효녀타령을 했는데도 고향의 야산을 오빠와 내게 반반으로 나누어주고 가셨다. 상속받은 야산은 무언가로 묶여있다고 하였다. 하긴 그게 재산 분쟁을 막아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삼오를 지내고 나니 내게는 고국에서의 사흘이 남아있었다. 마음은 슬픔보다 참담함, 황폐 그 자체였다. 교대를 함께 나온 동기들은 현역으로 있는 경우 이제 서서히 초등학교의 교감과 교장의 자리에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조금 일찍 퇴직을 한 동기들은 연금을 받으며 해외여행에 나서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결혼식장에 나와 준 한두 동기들이 전해주는 말들이었다.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남편과 나는 고향의 교대 캠퍼스 커플이었다. 지금쯤 그나 나도 명예를 탐하거나 여행을 즐길 나이에 아직도 자동차의 밑바닥에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며 애쓰는 그, 그 옆에서 보험회사에 제출할 부속서류 같은 것을 꾸미고 있는 내 모습은 말하자면 꼴불견에 다름 아니었다.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에 있었어도 우리 부부가 명예를 탐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둘은 아마도 명예퇴직을 택하여 그는 텃밭을 가꾸고 나는 글밭을 가꾸고 있을 것이다. 내 경우, 그럭저럭 서울의 문예지에서 등단이라는 과정을 마친 바 있다. 시카고 메트로폴리탄 에리어에도 교민 수가 25만 명에 육박하며 문단도 두어 군데로 나뉘어져 있고 출판도 왕성한 편이지만 나는 그냥 서울의 문예지를 택하였다. 미주 J일보 시카고 판에 가끔 시와 수필을 게재할 때면 기쁨과 설움이 복받치기도 한다.

경조사를 모두 마치고 고향에서 두문불출, 미국 갈 날자만 꼽고 있는데 서울의 정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장학사하는 친구로 부터 내 로밍 전화번호까지 알게 된 모양 같았다. 나도 정희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와 나는 교대 다닐 때에 격주간의 "교대 신문"을 만들던 문우이기도 하였다. 아주 일찍 퇴직하여 연금도 못 받고 놀고 있다는 탄식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남편은 판사라던가, 검사라던가, 위풍당당이었지만. 마침 그 남편은 순환보직이라서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는 당연히 내 호텔이 되었다. 결혼한 자녀들은 모두 따로 살고 있었다. KTX와 지하철이 내 고향과 그녀의 집을 두시간대에 묶어주었다.

가을 호 문예지를 본 것은 그녀의 서가에서였다. 그녀가 시로 등단한 문예지였다. 첫머리에 P시인이 쓴 "예술-문화의 도시"라는 기사가 나와 있었다. 고향의 문단 현주소와 과거로의 회고였다. 아는 인명과 지명이 주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산 타워로 갈까? 북악 스카이웨이로 갈래? 고궁으로 모실까?"

황금빛 십자 로고가 크게 박힌 세비를 지하차고에서 꺼내오며 그녀가 묻더니 이내 덧붙였다.

시보레가 외제 차는 아니야. 국내에서 조립한 거야. 공직자 마누라가 조심하고 살아야하는 게 여기란다.”

그녀가 변명하듯 말하였다.

"너 혹시 하이디 아니? 거길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말하였다.

"미국에서 오신 촌 부인이 모르는 데가 없네. 거기가 어디더라---."

내가 주소를 찾으려고 수첩을 꺼내는데 그녀가 얼른 스마트 폰을 두드렸다.

"그런 이름의 맛 집이 많네. 시내에도 많지만 그건 아닐 것이고 으슥한 밀애의 장소, 교외이겠구나."

"맞아, 남양주라던가---."

"내 그럴 줄 알았데이. 미국 촌 여자가 이런 델 어떻게 알아? 추억이 있구나?"

그녀가 신바람이 나서 사투리가 막 쏟아져 나왔다.

", 그런데 내 추억이 아니고 에스더, 그러니까 내 문우의 추억이야."

에스더는 시카고에 사는 내 문우였다. 한국에서 한번 이혼하고 재혼을 하여 미국으로 왔는데 사별, 미국에서도 다시 한 번 결혼을 하였으나 원만치 못한 가족관계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하이디 시절은 일대 로망의 기간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둘이나 첫 남편에게 주고 재혼을 하여 미국으로 왔는데 그 속편은 비극이었다.

"하이디 시절을 꿈처럼 간직하고 사는 여인이 시카고, 로렌스 지역에 있어. 다시 하이디를 찾아보기에는 경제도 넉넉지 않고 가슴이 저려서 죽는 날 까지 못 가보겠데."

"난 또 네 이야기인줄 알았네. 하여간 가보자. 얼마나 비밀스러운 곳인지. 사실 사랑은 밀교적이야. 안 그래? 밝은 대낮 보다는 어둠 속 같은. 영어로 익조틱이 아닌가? 머라카노?"

"에소테릭---."

내가 아는 체 한 걸 곧 후회하였다. 그냥 니 말이 맞네---”라고 하면 될 걸,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내 영어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 같았다. 설마 검사 부인이 에소테릭한 러브 스토리를 현존으로 갖고 있기야 하랴. 하지만 또 누가 알랴---. 일단 그녀, 혹은 그녀 주변의 이야기는 포기하고 일단 내 중심으로만 진도를 나가기로 하였다.

"내가 고국 방문을 한다니까 몇몇 문우들이 좋은 데를 추천해 주었어. 고향 쪽은 그렇고 서울 시내로는 북촌과 서촌, 그리고 근교로는 김유정 마을과 그 어디 프랑스 마을, 그리고 남이섬 뭐 그런데 더라만. 그런데 사실 뭐 난 고향에서 꼼짝도 않다가 돌아갈 생각이었어. 상주가 된 입장이잖아."

"그건 알겠는데 그 와중에도 하필 하이디라니? 그 여인과 특별히 가까워서?"

'아니, 아까 네 서재에서 본 문예지에 P 시인이 고향마을 문단 이야기를 썼더라. 자기 약력에는 고향 T고등 재학 시 이미 시집을 냈다고 밝혔더군. 그런데 아까 그 여인의 죽은 남편이 그 학교를 나왔고 하이디의 주인도 같은 학교 절친 문학청년이라던 말이 문득 생각났어."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하긴 고향을 떠나면 화석화된 기억이 남지, 그래 그리로 가보자. 어차피 선택인데 짧은 체류에 최선의 선택은 아닐지 몰라도 의미는 찾으면 되는 것이고."

그녀가 가속기를 밟으며 CD를 넣었다. 조영남 가수의 "모란 동백"이 나왔다. 그런데 전에 미국에서 들었을 때보다 템포가 조금 빠르고 음색이 다소 거칠었다.

"스피커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노래가 좀 거칠게 들리네?"

내가 한마디 하였다.

"이게 진짜 오리지날이야. 이제하 시인 알지?"

"알고말고, 교과서에도 나왔잖아.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그리워 그 시절!"

"그 분이 직접 부른 거야, 작사, 작곡, 노래---. 모란동백에서 난 이분이 부른 게 훨 낫더라, 거칠지만 윤색되지 않고, 페이소스에 가득하고."

"맞다, 맞아. 미주에서도 최근 쎄시봉 시절이던가 하는 시리즈가 나와서 거기 조영남 가수의 이 노래가 특별히 히트를 쳤거든. 그래서 그가 지은건가 했더니 오리지날이 있고 리메이크구나. 근데 정말 윤기 나는 그 노래보다 이게 훨씬 가슴을 치네.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우린 시인들이니깐, 호호호."

친구가 내비, 내비라고 부르는 GPS가 가리키는 데로 달려서 우리는 금방 하이디에 닿았다. 예상이나 기대와 달리 그곳은 어둡지 않고 밝았다. 밀교의 어두운 제단과 얼굴을 가린 회중들은 어디로 가고 밝고 넓은 내정과 후정에는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고 있었다. 유화로 그린 주인장의 전신상이 환영사를 외치는데 과연 그림과 꼭 같이 생긴 주인장이 그 아래에서 종업원들을 고향 사투리로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알은체 인사를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어~, 여기가~"

그렇게 수인사를 시작한다 치자.

"15년 전쯤 사장님도 잘 아시는 어떤 중년의 남녀가 자주---"

이야기는 곧장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서울 가정 법원을 거쳐서---, , 절에서 간략하게 예식을 갖추고---,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안착을 했으나, 지금 그곳에는 이곳 달밤의 추억을 먹고사는 사람이 하나로 줄었네요."

그리고 또 무슨 말을 더하랴. 아서라. 침묵은 금이라고 하였지. 우리는 주인에게 알은체도 않고 산채 나물 비빔밥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나는 폰 카메라로 그곳 사진만은 여러 장 찍었다. 다만 뛰노는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얼굴은 처음부터 다 뺐다. 이제는 자녀도 없는 그녀에게 그런 영상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 여기서 모란 동백이나 틀어달라고 해볼까?"

정희가 가만히 속삭였다.

"이제하 시인이 부른 CD가 있으려나?"

내가 응답하였다.

"그렇구나, 그럼 아예 내일은 대학로에 있다는 마리안느를 찾아보자."

"마리안느?"

"그래, 아까 스마트 폰으로 이제하를 치니까 대학로에서 카페, 마리안느를 운영한다나봐. 내일은 거기!"

그녀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었다. 설마 변방에서 떠돌다 떠돌다 사라지는 자들을 노래한 그 가사가 나를 빗대고 정희 자신을 안도시키는 사연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은 날을 고향으로 내려와서 갓 봉안한 친정아버지의 납골당을 다시 한 번 찾는 것으로 채웠다. 친구 정희의 머뭇거리던 사연을 듣지 못하였어도 궁금하지 않았고 꿈에도 그리던 이제하 시인은 아쉬웠으나 마리안느 까지는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는 못다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