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통신

디어본의 포드 공장과 박물관 스케치

원평재 2005. 9. 11. 01:22
 

디어본의 포드 공장과 박물관 스케치


"디트로이트에는 구경꺼리가 없다"는 화두는 사반세기 전부터 하는 동생의 푸념이자

걱정꺼리이다.

손님 대접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법은 항상 디어본에 있는 포드 공장 견학과 생가를 중심으로 한 민속촌

방문에서 찾았다.

 


 


 

이번에는 우리 식구 다섯을 데리고 또 고민 끝에 그 모법 답으로 들어갔다.

제수씨도 잠시 참여했다가 연구실로 나갔다.

시카고에서나 독일 마을에서나 또 이 곳이거나 간에 모든 비용은 전례대로 동생이

내고 있으니,

우리는 입장료라던가 식사 비용이라던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올바른 리포터 자격도 못된다.

 

 



헨리 포드 공장 견학은 아주 조직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완전히 미국 정신, 아메리칸 드림 실현의 본때를 보여주면서 사람을 감싸 안는다.

그래 그런지 관람객들도 거의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백인이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 식 조립방식, 어셈블리 라인의 승리를 만고강산으로 구가하던

시절도 계곡 길로 접어들었다.

강력한 유니언 샵, 산별 노조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자동차 공업은 일대 전기를 맞았고

이어서 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조직화된 도요다와 혼다 등, 일본 자동차 공장이 이들의

혼을 빼앗았다.

 


 

 


(자동차 박물관에 일본 사람들의 숨결이 있었다. 이걸 또 수용하는

미국의 다원주의도 돋보였다.)

 


 

(박물관의 입구 사진을 이제야 올리는 의미를 느껴주시면---)

 

 

조립 라인의 단순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엄청나다.

노동자 천국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 하지만 다른 산업 부문의 가난한 계층을 생각

하면 산술 법은 복잡해진다.

 

기술 혁신과 연구 개발을 주도하는 시스템도 예전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문 닫은 연구소와 철강 제련 공장이 눈에 뜨인다.

건물의 옥상마다 스프링클러와 바이오 식물 제배 장을 만들고서 환경친화를 부르짖는

백인 안내양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내 청각 탓인가.

 


 


 

그러나 아직도 포드는 포드였다.

킬로미터에 달하는 조립 라인의 규모는 우리의 울산 현대 공장이나 소하리에 있는

기아 자동차에서 본 내 기억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만 로봇 등 자동화 공정은 보여주지 않는지, 노조의 힘에 밀린 탓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군데군데 설치된 자동 안내 보드를 두드려 보아도 동영상에 나오지 않았다.

 

의사인 내 동생이야기로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저 조립 라인의 기술자들이 워낙

단조로운 일에 매달려서 술과 마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폭스바겐과 기아 공장의 근로자들이 가족들과 거대 조국의 미래를 생각

하는 수도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기하면 섬뜩해진다.

 


 

거대 공장 견학을 하루 만에 하기에는 벅찼고 특히 오토메이니아인 아들은 아쉬움이

많았으나 저녁 해가 뉘엿하였다.

손주를 데리고 따로 민속촌 쪽으로 간 고부도 그제야 나타나서 왕성한 관찰력을 과시

했는데, 알고 보니 점심 먹고 내내 풀밭에서 쉬다가 왔다고 한다.

 

저녁에는 의과대학 졸업반인 동생네의 딸과 사윗감이 바쁜 중 인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내년 9월 2일에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는 의미도 있지만 피로연장 잡기가 좋은 데는 1년도 더

전에 예약이 된다고 한다.

피로연 관계는 딸의 집에서 모두 책임을 지는 것이 이 곳의 풍습인 모양이다.

 


 

사위의 이름은 “데이브”였는데 할아버지가 시카고에 최초로 한인 교회를 세운 분으로서 집안에 데이브 항렬의 사촌들이 마흔 한명이나 그 도시 인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내 조카 딸, 세럴(Cheryl)과는 의과대학 동기였다.

 

동생의 아들 이름을 소개하면 에디(Edy)이다.

처음 미국에 와서 흔한 대로 Eddy로 짓고 나니, 나중에 하바드의 어느 한 반에만

Eddy Kim이 네 명이나 되더란다.

한인들이 지독하다.

그래서 Edy로 했는데 이 스펠링이 흔치않다보니까 이번에는 혼동이 많다고한다.

 

"세럴"은 그래서 좀 생각 끝에 지은 것인데 이번에는 대부분이 Sheryl, 혹은 Sherill 등등

으로 오인이 많아서 골치라고 한다.

이 나이에 "세럴"이 많다.

그때 유명한 모델에 "세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이 세럴이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는 미국의 유명한 의학자가 쓴 저서에

“아내와 딸 세럴에게”라는 헌사를 본 기억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책은 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될 정도라고 한다.

 

오래전 학회에서 그 분을 만나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는 가족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최근에 본 동아시아 담당의 정책연구관에도 같은 스펠링의 세럴이 있었다.

그 "데이브와 세럴"이 저녁에 우리를 만나러 앤아버에서 한 시간 넘는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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