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장편; 빈포 사람들

속초 통신

원평재 2010. 3. 28. 13:52

 

 

사랑하는 교수님!

메일 받고 너무 놀라지는 마셔요.

존경하는 교수님으로 먼저 불러야하겠으나 제 간절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봄눈이 또 내려서 설악을 얕게 덮은 모습이 또다시 선생님을 부르게 합니다.

간절한 생각에 몇 자 메일을 올립니다.

정말 부담 느끼시지 마셔요, 호호호^^.

 

그날 밤 선생님은 제게 들어오시기도 했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신 것이니까 그런 면에서라도

선생님과 저는 서로 자유롭습니다.

제가 이런 전제를 먼저 드리는 것은 제 아빠처럼 멋있게 생기신 분이 모습에 어울리지도 않게

겁쟁이라는 그날 밤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첫사랑을 떠나 보낼 때에도 그와 몸을 나눈 일이나 수없이 반복했던 기약을 다시

따져묻지 않았던, 이름처럼 마음도 아름답고 선한 미모의 젊은이입니다.

물론 몸을 나눈 일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지만 기약을 저버린다는

행위는 고약한 짓이 아닐 수 없잖아요.

그런 일에도 저는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갖지 않는 아름다운 젊은이라는 말씀입니다. 

“미래(美崍)”라는 제 이름, 잘 기억하시지요?

“동해 칸추리 클럽”의 티칭 캐디, 미래---.

200명 회원님들 중에 거의 반수가 일본인이라서 “도카이 칸토리 구라부”라는 발음이 어색하지

않게 들리는 이곳의 미래 말입니다.

 

제가 하루 밤을 선생님과 지낸 것을 두고서 캐디들의 일반적 사생활을 속단하신다면 슬픕니다.

제가 그날 밤을 빗대어 교수님을 속단하지 않듯이 그렇게 저를 이해해 주셔요.

사실 저희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회원님들이나 선생님처럼 초대받은

고객님들과의 스캔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사생활의 흐트러짐이 발견되어도 그날로

모가지입니다.

겁쟁이 교수님도 도덕군자 생활을 하시는 게 비슷한 사회적 규약 때문이기도 하시겠지요.

저희들이 몸매를 감추는 헐렁한 캐디복을 입고 요조숙녀로 지내는 데에도 그런 생활 수칙이

큰 제약으로 있기 때문이랍니다.

아니 꼭 그때문 만은 아닙니다만---.

 

그날 제가 선생님과 속초 시내, 중앙시장의 횟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

모험이었습니다.

제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면 “얘가 왜 이러나” 하시겠지만 사실상 인생을 건 도박이었답니다.

유복자로 태어나서 이제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사고무친한 제가 그나마 이토록 좋은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삶의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만약의 경우 선생님을 기대고자했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고향 빈포 마을 출신의 훌륭한 교수님이라서 제가 모험을 건 것만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유복자인 제가 사진으로만 보았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선생님은 사진으로만 보았던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제 아버지의 모습과 너무나도

많이 닮았습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제가 마침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새로 발견했노라고

소개를 하고 확인을 할 정도로 선생님은 제 아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좀 황당한 말씀일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과 저의 고향인 빈포 마을이 외지고 좁아서 어쩌면

선생님과 저희 가계에 내려오는 DNA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근친 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그날 이후 저는 곰곰이 삭여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친상간을 했네, 라고 저는 쿡 웃으며 기뻐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겁쟁이 교수님, 겁은 내지 마셔요.

아름다운 모습은 조금 떨어져 있어야 더욱 그 아름다움을 지켜낸다는 정도는 나이 젊은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다음 달이면 일본으로 갑니다.

재일 교포이신 저희 회장님이 티칭 캐디를 몇 명 뽑아서 일본의 골프 스쿨에 일년 기한으로

유학을 보내주시는 계획을 이제 실천하신답니다.

세 명을 뽑는데 저도 거기에 들어갔습니다.

셋 중 둘은 단기 코스이고 성적이 좋은 하나는 남아서 경영 수업까지 받게해 주신답니다.

피 튀기는(표현이 죄송해요)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돌아와서 중책도 맡는답니다.

이곳에 국제적인 골프 스쿨이 생기면 명칭 상으로는 교수도 될 수 있고 경영 직에도 진출을

할 수 있답니다.

 

그런 신분을 확보한 제가 그날 밤 교수님과 함께 한 것이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는 제 말씀을

이제 더욱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한 번도 못 뵌 아버지를 이제 당분간이지만 이 나라를 떠나기 직전에 마침내 새로 찾아서 뵙고

그 품에 안기고 싶었던 제 간절한 소망이 그날 밤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함께 이곳으로 오셨던 우리 고향 빈포 출신의 훌륭한 사업가들과의 만남이라는 분위기도

물론 큰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저는 사실 지금껏 서부 경남의 작은 어촌, 빈포라는 고향을 부끄러워 했답니다.

저야 물론 거기서 태어났지만 오래 산 곳도 아니고 내내 가난하게 이곳저곳으로 어머니와

떠돌아다닌 탓에 고향이라면 지긋지긋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가 그 깡촌에서 무슨 마음으로 사진관을 차리셨는지 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교수님처럼 선대 어른이 어장을 갖고계신 넉넉한 집안이라면 영상 예술을 전공으로 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저의 아빠는 등 너머로 배운 사진술로 시골 면사무소 옆에서 증면사진을 주로

찍으며 삶을 이어가시다가 술이 취해서 요절을 하셨다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인생이었습니다.

교통사고가 난 그 국도 구간의 고향을 제가 어찌 증오하지 않았겠습니까.

혹시라도 그 사진관 집 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서울에서 열린 "세계 한인 상공인 대회"의 뒷풀이를 동해 칸추리 클럽으로 유치

하신 우리 회장님 덕분에 이렇게 훌륭하신 고향 분들을 우연히 만나고 또 아빠같은 교수님을

알게 되었으니 저는 순간 무엇을 다 주고라도 한번 아빠의 품속에 안겨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강릉까지의 드라이브는 지금도 꿈결 같습니다.

 

영상학을 전공하신 교수님 말고도 더 나이가 많은 국문학 전공의 어떤 소설가 교수님도 빈포

출신이라는 말씀을 그날 해주셨지요.

또 미국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 향상을 위한 운동을 하시는 여성분이 계시다는 말씀도

고마웠습니다.

그날 티업을 같이 하시고 따뜻한 격려를 해주신 나머지 분들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에 출판업을 하시는 한분이 또 빈포 출신이라는 말씀도 제게 자부심을 부어넣어

주셨습니다.

이날 교수님께서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시면서 네 분이 나눈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의

짧은 실험영화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지요.

네 분의 네 가지 이야기니까 “사중주 곡”으로 이름을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외람스럽지만 제 이야기도 넣으셔서 “오중주 곡”을 찍으면 되지 않을는지요?

아니, 제 이야기는 선생님의 몫이라서 그냥 “사중주 곡”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제 이야기가 삽입된다면 그냥 사중주로 연주하셔도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그날도 얕은 눈이 설악을 덮었었지요.

겨울에 우리나라에서 골프를 하실 수 있는 곳으로는 아마도 제주 보다 이곳 속초가 더 나을

것입니다.

이곳이 눈 내리는 날만 아니라면 겨울에도 참 따뜻해요.

울산 바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눈내린 설악 연봉을 보며 티업을 하던 순간은 다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셨을 것입니다.

올해는 설악이 봄철까지도 제 이름값을 하는구나 싶습니다.

매년 겨울이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눈이 없는 겨울 설악의 모습은 험악하거나 슬피보여요.

 

사랑하는 교수님,

이제 제 이야기를 아름답고 슬픈 감정으로 마칠까합니다.

이날 전속 사진사가 찍은 사진들은 현상과 인화를 하여서 저희 회장님 성함으로 공식 발송이

된답니다만 제가 사진사 실장님에게 부탁하여서 좋은 사진을 더 골라내어 따로 특별히 보내

드립니다.

 

즐감 하시구염,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눈 내린 설악에서 딸, 이미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