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

4-19 혁명 오십주년 기념일에

원평재 2010. 4. 19. 09:08

 

뒷 건물은 동성 100주년 기념관이다.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 "

 

대학로 동성 고등학교 정문 근방에 세워진 석조 기념물의 음각 글자이다.

예총 회관 쪽으로 일이 있어 들렀다가 가끔 이 돌탑과 조우할 경우

그 생성과 의미에 대하여 궁금함이 없지 않았는데

4-19 의거 50주년을 맞고 보니 문득 궁금증이 더하였다.

 

서울 동성고(東星高)는 북한산이 한눈에 올려다 보이는 혜화동 천주교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민족을 구하는 길은 오직 미래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한

남대문지역 상공인 등 민족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1907년 설립했다고 한다.

동성고 동산에 올라가면 동성고 교육이념을 세긴 돌과 함께 장면(張勉)총리의 흉상이 

보인다.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인 장면 총리는 이 학교 3대 교장선생님을 지냈다고 한다.

 

1960년 4.19 학생혁명의 날 아침 제일 먼저 거리로 나선 것이 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이고 그 출발점이  바로 이 석탑이 있는 정문이었다.

그래서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 라고 새겨진 4.19 돌탑이 서게 되었다고 한다.
동성고생들은 ‘무저항주의’ 와 ‘민주주의 사수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로 향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울대생과 대광고 학생들이 합류하여 4.19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고

이 젊은이들은 민주혁명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볼 때 3·15의거와 4·19혁명은 둘 다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1960년 혁명은 사실 3월 15일 마산에서의 유혈사태가 있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를 따지자면 2월 28일 대구 경북고, 사대부고,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의 학생들이 벌인 시위가 그 '최초'였다.

민주당 장면 후보의 유세 연설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2월 28일에

강제등교를 하게 한 학교의 처사에 반발하며 '학원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데모에 나선 것이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대전고교 학생들과 경찰은 난투극을 벌이다가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3·15의거를 "한국사상 초유의 유혈사태"라고 하는 것 또한 맞지

않은 셈이다.

물론 시위자 가운데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나온 것이 3월 15일 마산에서의 항쟁인

것은 틀림이 없다.

어쨌든 그 후에도 3월 14일까지 수원, 충주, 청주의 고교생과 포항, 인천, 원주, 부산의

고교생 역시 시위에 나섰다.

 

 3월 15일 마산의 시민, 학생의 항쟁이 혁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저녁 8시 경 경찰의 발포가 시작된 후 이 날 하루만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

당했으며 2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선거 다음 날부터 시위는 계속되었는데, 4월 11일은 또 다른 분기점이 되었다.

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날 밤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 앞에는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고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 앞에서 시위가 잇따랐다. 

 
하여간 이런 과정을 살필 때 민주화 운동에서 <대구 2-28 의거>의 의미가 더욱
돋보이고 그 원류로서의 자리매김이 확실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물론 서울로 불이 붙어서 올라 온 민주운동은 이 곳, 동성 고등학교에서 점화되고
대광 고등학교가 합류하여 기폭제가 되었으니 오늘 이 돌탑의 역사는 무궁하게
이어져 내려갈 것이다.

 

한편 이 나라의 민주운동 역사의 원류 찾기에는 아직도 역사적 해석의 갈래가 많다.

2-28 대구 민주 학생 운동도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광주 학생 운동과

맥락이 닿고 더 올라가서 동학 혁명과 연결된다는 주장도 나와있다.

이 나라 민주화 역사에 4-19 혁명과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여도 여론 조사에서

세대별 편차가 너무나 큰 것도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리라.

'4-19가 시라면 5-16은 밥이다' 라고한 어느 민노당 사람의 촌철살인같은 해석도 이제

어느 정도는 윤택해진 이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심성에서 귀담아 들을 구절이

아닌가 한다.

더욱 시급한 것은 아직도 민주의 온기가 들어가 있지 못한 냉기의 땅에 군불을 지필 일이

아닌가 한다.

 

 

이 근방에 있는 노포의 하나인 이 국수집도 YS나 민주 인사들이 한때 애용하였다니

민주화 운동의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셈인가.

 

 

 

 

 

 

여기가 시장 공관이 아닌가 싶다.

 

 

  

 

서울 성곽이 이쪽으로도 보수 공사의 손길을 타고있다.  

 

  

 

언론에도 보도 되었던 외국 여행객 민박 집이다.

 

 

   

 

 

  

    

  

 

  

   

  

  

 

 

 

 

 

 

 

 

 

 

  

  

  

 

 

 

 

 

 

 

사진하는 친구가 공연 티킷에 당첨이 되었다고 초대하였다.

입장권을 바꾸러 입구로 간 친구를 무심코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이런 경우에도 문예 진흥 기금으로 5000원을 낸다고 하였다.

입장권이 비싼 경우에는 만원도 낸다고 한다.

그런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미안해서 관람 마치고 차나 한잔 하자고 미리 제안을 하였다.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아서 인근에서 조명을 화려하게 받는 문루로 올라가 보았다.

 

 

세상에!

혜화문이라는 존재를 이제야 알다니!

이 동네 이름의 유례를 이제야 알것 같았다.

늦은 시간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다시 극장으로 왔다.

타이틀은 "그냥 청춘"이었다.

나도 한때 연극을 꿈꾼적이 있다.

저 열악했던 청춘 시절에 말이다.

청춘시절은 항상 열악하다.

미래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불확실성 뿐이다.

 

  

연극을 마치고 포토 타임을 가졌다.

박수치고 함께 사진을 찍는 일 말고 무엇을 해줄 수 있으랴.

익숙지 않은 분위기라서 순간, 카메라도 말을 듣지 않았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 포토 타임에도 인색하여 금방 자리를 비웠는데

나이든 관객 두 사람이 끝까지 남아있던 것 만으로도

고독한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연히 눈물이 찔끔거렸는데 바깥은 멀쩡하였다.

아니 겉은 멀쩡하게 보이는 이 많은 젊은이들도

"그냥 청춘"처럼 먹먹한 가슴으로 걷고 있지나 않은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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