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

성균관 건너 진아춘은 아직 건재한가?

원평재 2010. 4. 25. 10:51

 

 

 

 

꽃비가 흐르는 날에 성균관 대학교를 찾게 되었다.

성균관 대학교의 서정돈 총장을 동문 탐방 프로그램에 따라서 방문하는 행사에

동행을 한 것이다.

회장과 총무와 나, 이렇게 셋이서 일단 만나는 장소가 혜화역 4번 출구라서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하여 중국집 "진아춘(進雅春)"을 찾아 보았다.

얼마전 "진아춘"의 존재 여부가 동기생 카페에서 화두로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아춘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가?"

"데자부"인지, 아슴아슴하게 나는 진아춘을 최근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그 오랜 역사의 때가 묻은 중국집을~~~.

 

"600 여년, 성균관의 오랜 전통"에 하찮은 중국집의 역사를 덧대보는 것이 좀

외람스럽고 다소 경망스러운 비유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자기만의 창세기와 아포칼립스의 시간들을 따로 두고 있지 않은가.

"진아춘"의 기억을 성균관의 역사 보다 더 고색창연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학로에서 청춘시절을 시작한 사람들이리먄 특히 더욱 그러할 것이다.

문리대와 법대, 상대, 그리고 성대 등에 친구가 많았던 나는 덩달이로 그런 흐름에 

섞여있었다.

청춘시절을 고향의 대학에서 보낸 나는 "진아춘"에서 탕수육과 배갈로 배를 채우고

친구의 하숙방에서 밤을 새운 무용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흥미진진 모드로 듣고 부러워하는 가운데에서 "진아춘"은 마치 나의

추억 세계에서도 어느 한 모퉁이에 서있는듯 싶었다.

 

지하철 4호선의 혜화역 4번 출구이면 성대쪽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다.

그 출구 바로 앞에 "진아춘"은 아직도 턱 버티고 있었다.

간판을 최근에 새로 고쳐단듯, 풍상을 겪은 허름한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예전의

그 산동성 출신 늙은 부부도 사라져버리고 없었지만, 중년의 키큰 여인이 오갈데 없는

중국풍을 몸 전체로 풍기며 "어서 오세요" 시원한 인사로 고객을 맞았다.

 

이럴 때는 자장면을 시켜야 제격이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어서 "간짜장"을 한그릇

시켜놓고 중국풍의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진아춘이 맞습니까?"

"그럼요. 1933년에 세운 그 진아춘이지요. 신문 보고 오셨군요?"

"아, 네~~~."

최근에 또 어떤 신문에서 취재를 해 간 모양이었다.

나도 벽에 걸린 역사적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았으나 그 부인의 모습까지는 차마 담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신발 벗고 들어가는 안쪽 방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흘러나와 좁은 복도를 서성이며

문틈으로 기웃거려 보았다.

아, 중간고사를 마친 학생풍의 젊은이들이 잔뜩 들어앉아서 낮술을 하고 있었다.

한참 술맛이 좋을 때였다. 그들의 나이가,

또 중간고사 끝난 시절이.

아, 시절은 바로 봄이 아니던가.

 

진아춘(進雅春)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런 옥호가 아닌 것이다.

아름다운 봄을 지향하는 곳이다.

To(For) the Graceful Spring!

그런 뜻의 찬란한 간판을 달고서 진아춘은 청춘이 들끓는 대학로에서 70여 성상 동안

봄을 지향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것이다.

 

Spring!

봉주르, 쁘렝땅!

봄은 항상 꿈이 충만한 기호이다.

"친절한 춘자씨"가 한때 이땅에서 젊은이들의 바지 가랑이를 내리게 하는 바람에

춘자(春字)에는 조금 빛바래고 퇴영스런 어감의 때가 끼이긴 했지만

봄은 항상 꿈과 이상의 상징이다.

고향에 사는 유학자인 내 친구 하나는 아호를 "만춘정(滿春亭)"이라고 지어서 애용한다.

처음 의아해하는 친구들에게 그가 춘자(春字)의 진정한 뜻을 갈파하여 깊은 인상을

심어준 기억이 난다.

지금도 성균관 유림 회관에서 유학자 대회가 있을때면 자주 상경을 한다.

유학자 간에도 히에라르키가 엄존하는데 내 친구는 나이도 있지만 꽤 높은 자리에 있는

모양 같았다.

 

"이 중국집을 세운 원래 주인장의 후손인가요?"

아니 그렇게 무례하게 묻지는 않았고 "원 주인장의 몇대 손인가요?" 뭐 그렇게 에둘러

물어보았다.

직계 후손은 아니고 고모 쪽으로 이 곳의 대가 이어졌다는 답이 나왔다.

부인의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주방으로 부터 나와서 복도에 걸린 옛 사진도 찍으라고

하면서 안내를 하다가 방 쪽에서 젊은이들이 이것 저것 추가 주문을 하는 서슬에

얼른 되돌아 들어가 버렸다.

그러는 중에도 손님들이 들락거렸다.

중년의 남자 하나는 들어와서 그냥 기본 자장면을 시키기도 하였고 조금 있다가는

할머니 한분이 들어와서 삼선 짬뽕을 시켰다.

"흰색으로 할까요? 빨간 색으로 할까요?"

카운터의 부인이 묻자, "흰색"이라는 답이 나왔다.

내가 시킨 간짜장이 식으려고해서 얼른 비벼서 먹고 바쁜 사람을 더이상 붙들기도 

그렇고 내 약속시간도 다 되어서 일어나 나왔다.

양파 냄새를 풍기며 친구들을 만나는 경우가 좀 경우에 없는 행동같기는 해도 

자초지종을 들으면 너그러이 양해가 되리라고 자신하면서~~~. 

  

   

성균관은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는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니 그 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다.

현재의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 : 도서 창고)도 이때 증설되었고

현종 때 비천당(丕闡堂 : 과거장), 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이후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명칭 또한 경학원으로 바뀌어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에 의해 경학원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를 세웠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원래의 성균관이 가지고

있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근대적 형태의 종합대학인 성균관대학교로 이관되었다.

현재의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진아춘은 1933년에 창업되었으니 77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식당의 벽에는 역사적 사진들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아래 중간의 사진들이 현재의 주인에 대한 정체성의 확인이다. 

 

 좁은 복도에 걸린 옛 모습의 사진

 

서 총장 방문의 목적은 훌륭한 동창생을 소개하는 일이라서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으며 현재 유학 대학원의 논문 학기를 이수하고 있는

학생 총장으로 부터 유학과 전통에 대한 담론을 듣고 논하였으며

명의로 이름 높은 서 박사와 건강에 관한 자문도 나누었다.

유머 감각이 탁월한 서박사는 "요즘 건강에 관해서는 비전문가가

전문가 뺨치는 시대 아닌가"라고 시대정신을 꼬집었다.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 대제학으로 문과가 아닌 이과, 특히 의원 출신의 경우는

서총장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평소에도 동기회를 위하여 관심을 아끼지 않는 서 총장을 한 시간가량

붙들고 귀중한 시간을 축내놓은 연후에야 대화는 끝이났다. 

 

 

 

 

 

 

 

 

서 총장은 일행에게 정문으로 나가는 것 보다 후문으로 나가서 꽃비를 맞아보라고 했다.

감사원 쪽 방향을 말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처음 온 사람도 있고하여서 일행은 들어왔던 정문으로 도루 나오며

성균관 유림 회관과 저 유명한 은행나무도 감상하고

오후 한나절을 유유자적하였다.

모두들 헤어질 무렵, 나는 낙산 자락을 사진에 담아보려고 혼자 동숭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골목길이 너무나 가파르고 좁아서 조금 올라가다가 그만 두고 내려왔다.

동숭동 1길에서 5길 까지의 연립주택들이 비탈에 바짝 붙어서서 안쓰러웠지만

창덕궁을 비롯하여 서울의 옛 정취를 내려다보는 특권은 만끽하고 있었다.

 

  

 

 

 

 

 

 

 

 

 

 

 

  

 

동숭 아트홀이 재단장되어 꼭두각시 극장으로 바뀐다던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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