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

봄봄

원평재 2010. 4. 30. 03:05

 

 

 

 

세상은 하 수상쩍어도 계절의 추이는 어쩔수 없습니다.

 <서울 문학> 봄호에 실었던 권두 칼럼을 올립니다.

"서울 문학"과 "서울 문학인"은 서로 다른

계간 문학지인데 이번 봄호에는 두군데 모두에 청탁을 받고

글을 실었습니다.

봄의 정경들도 함께 올립니다.

 

 

 

권두 에세이 “봄봄”

 

봄은 김유정의 소설 제목처럼 거푸 불러내야하고 결코 외짝으로는 오지 않는다.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라고 외쳐 부르는 가요 가사처럼 봄은 이 들판 저 골짜기로 삽시간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른다.

그래서 봄은 이성이기 보다 감성의 계절이라는 표현도 있다. 겨우내 썰렁했던 집안 공기를

떨치고 봄볕에 겨워 바깥출입을 하고보면, 그 따뜻한 봄기운을 누구라서 차가운 이지의 서제로

끌고 들어오랴.

하지만 봄의 속성이 이성이기 보다는 감성이라고 하는 속뜻은 봄꽃이 불쑥 불쑥 예측 불허로

피어오르고, 봄기운이 여기저기 연두색 군락을 두서없이 뿜어내는 듯 한 겉모양새에 맞추어

붙인 게 결코 아니다.

봄의 기운은 계절의 순서에 따라 지난해 차례로 자리를 양보했던 그 절기의 순환 원칙에

따라서 이 땅에 다시 회복의 전령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온 것이다.

때를 맞추어 힘차게 물관부와 체관부를 가동, 뿌리와 몸통과 가지의 체온을 덥게 하고

마침내 형형색색의 화신을 올리게 하는 봄기운이 바로 우리의 감성을 달구어낸다는 뜻이

강조되었을 뿐, 비이성적이라는 뜻은 결단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봄의 기운은 이기일원론이며 선험적이고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 윤회적이다.

 

돌이켜 보건데 릴케는 여름이 위대하였다고 찬사를 보내면서 가을의 과육을 익게 한

태양신에게도 한마디 아첨을 던졌었다.

쉘리는 ‘서풍에 부치는 노래’ 속에서 저 거대한 겨울바람을 속절없이 외경하였다.

운율과 가락에 맞추어 그 시를 낭송해보면 휘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의 거대한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지며 우리를 온통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든다.

영국의 서풍은 우리로 치면 북풍, 삭풍에 다름 아니다.

서풍에 부치는 노래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 거센 서풍이여, 너 가을의 숨결이여,

너의 보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죽은 잎사귀들은

마치 마법사로부터 도망치는 유령처럼 쫓겨 다니누나,

 

누런, 검은, 파리한, 병적으로 빨간

역병에 걸린 무리들, 날개 달린 종자를

어두운 겨울의 잠자리로 몰고 가는 너---.“

 

그의 첫 영탄은 이렇게 겨울 서풍에 대한 완전한 항복이며 더 할 나위 없는 굴신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쉘리의 예지는 그렇게 삭풍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 절대적 패자로서의 절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는다.

그는 서풍의 의미가 파괴로부터 창조에 이르는 데에 있음을 이미 직감하고 이렇게

그 다음을 이야기한다.

 

“생생한 빛깔과 향내로 들과 산을

가득 채울 때까지, 무덤 속의 시체처럼

각기 싸늘하고 낮은 곳에 누워 있게 하는 오, 너 서풍이여.

 

어디서나 움직이는 거센 정신이여,

파괴자이면서 창조자인 서풍이여, 들으라, 오 들으라!“

 

쉘리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낡은 것들, 구각을 겨울바람이 날려버려야 대지에는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우리의 사상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소리치며

저 만고에 빛나는 결구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예언의 나팔이 되어 다오!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

 

봄의 앞을 지나간 겨울과 그 삭풍은 문학사적으로 생각해 보면 구조주의의 거대 담론과

같아서 우리를 지배한 세력, 권력 구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감성의 피안에서 이성을 담보하여 지적 유희를 농단한 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얼어붙은 대지를 뚫어 오르는 해체의 봄이 우리 주위에 다시 찾아왔다.

그 봄은 홀로오지 않고 “봄봄”으로 군락을 이루어 차갑지 않게 따뜻하게 감성으로

다가왔다.

 

남쪽 지방에서 올라온 따뜻한 봄소식이 또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대구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일요일에 강제등교를 당한 일이

있었다.

1960년 2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날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선생은 이미 급서를 한 상태에서

장면 부통령 후보가 외로운 선거 유세를 하는 날, 집권 여당은 학생들을 휴일인데도 강제

등교 시켜서 유세장 참여를 원천 봉쇄하였다.

이 불의의 사태에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항거하여 학교별로 일요일 아침에 거리로

뛰어나와서 민주의 목소리를 외친 것이다.

이 외로우나 의로운 목소리는 금방 메아리를 불러일으켜서 전국으로 퍼져나가다가

마침내 4-19 의거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세월은 어느덧 50년을 셈하게 되었고 그동안 이 의거는 스튜던트 파워를 두려워하는

정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망각의 길로 접어들 즈음, 다행히 작년 말 국회에서 이날이

우리나라 민주 운동의 시초라는 공식 선언과 함께 기념일로 법령화 되었고

그 첫 공식행사를 금년도 봄의 초입인 2월 28일에 치루었다는 소식이다.

당연한 일이 이제야 빛을 받게 되었으며 날짜와 계절도 의미심장하여 해 마다 봄이 오면

이 나라 민주의 봄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되새기는 일이 법적으로도 뒷받침 된

것이다.

그동안 이 운동의 뜻을 지켜나온 많은 민주지사들의 노고가 고맙기 그지없다.

일제 강점기, 근대사에서 독립을 위한 항거 정신에 고등학생들이 처음 발을 디딘 것이

1929년의 광주 학생 운동이었다면, 현대사에서 민주 운동의 횃불을 든 것은 바로 대구에서

일어난 “2-28 민주운동”임이 이제야 정사로 각성되고 각인된 셈이다.

봄소식으로 이보다 더 꽃다운 일이 있으랴,

 

봄노래를 부르다보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라고 절규한 이상화 시인을 또한 잊을 수

없다.

강점기의 압제와 폭거에 항쟁한 민족 시인을 이 봄에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문필을 쥔

후세들에게는 송구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새봄을 마지하면서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 저 문학의 가이없는 지평으로 우리의

글밭을 가꾸어 나아가야할 소명을 새삼 느끼며 가슴이 뛴다.

 

<끝>

 

글쓴이;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부총장 역임), 경맥 문학회 회장, 미국 소설학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회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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