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고도방 구두를 아시나요

원평재 2011. 2. 13. 11:17

그룹 투어라는 것을 이용하여 서부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 그러니까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을 함께 떠난 일행은 한 십여명
되었다.

몰론 여행사에서 사람들을 모았으므로 서로간에 지면은 없는 낯선
관광객들의 무작위 모임이었는데,
중년의 부부가 네쌍, 나이든 부모를 모신 젊은 부부 한쌍과 그들의
동생인듯한 총각이 포함된 한가족 다섯명, 국내에서 따라가는 여자 가이드
한명, 현지에서 붙은 전문 가이드 남자 한명, 도합 열다섯명이었다.

일행의 운이 좋았던지 전문 가이드는 스페인어 유학을 왔다가 주저앉은
청년이어서 엉터리 가이드가 판을 치는 관광지에서 보석 같은 존재를 만난
셈이었다.

포르투갈을 관광한 일행은 일단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모로코를 보았고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오는 일정을 잡았는데 그 흐름이 절묘햔데가 있었다.
유럽의 가톨릭 문명을 잠시 보고 다시 이슬람권으로 갔다가
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러온 루트를 타서 이베리아로 우리도
진주하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모로코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페즈(Fez)라고 하여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혁 원단을 만드는 곳이었다.
무두질과 염색의 공정은 오늘날도 중세의 방식과 과정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수준인듯 하였다.

좁디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역한 냄새와 눈물이 솟을 정도릐 화학
약품 냄새를 맡으며 우리는 다락방 같은데로 올라가서 어쩌면 처참하달
수도 있는 가죽문명의 기초 단계를 섭렵한 것이었다.
하여간 문명사의 단층을 절개하여 체험한 철저한 관광이었지만
아울러서 우리 민족의 왕성한 구매력도 과시한 대 여행 장정이기도
하였다.
어지간해서는 물건을 사지않는 우리 부부도 피혁 제품을 조금씩 샀다.
마누라는 조금 큰 가죽 핸드백을 샀고 나는 웃기지도 않게 가죽 구두를
샀다.
가장 경멸해 마지않았던 구매 충동에 나도 마침내 백기를 든 셈이었다.

왜 구두인가?
그게 내가 오늘 쓰고 싶은 이야기이다.

낙동강변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매년 물난리를 겪던
마을에서,
대구라는 대처로 K중학의 모표와 배지를 달고 나가보니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특히 생활상에서, 소득 수준에서, 문화에서---.

그중의 하나가 구두였다.
나는 운동화 한 켤레도 가장 싼 것을 골라신는 주제인데,
몇몇 친구들은 보통의 가죽 구두도 마다하고
윤기가 반지르르면서 가볍고 낭창낭창한 "고도방"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물론 새로 오시는 교장 선생님의 철학과 방침의 변화에 따라
단화 착용은 금지령이 내렸다 풀렸다 했지만,
학교의 행사 때나 교외 생활에서는 여전히 구두와 "고도방"이
기승을 부렸다.
운동화는 구두 앞에서 쪽을 못 폈고 보통의 단화는 고도방 앞에서는
밥이었다.
이 현상이 어찌 아이들의 세계에 국한했겠는가.
급기야 번화가에는 "고도방 구두방", "원조 고도방"까지 등장하였다.

고도방이란 무엇인가?
아랍어에 따르면 피혁을 일컫는 말이었다.
8세기 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남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서 지금의 꼬르도바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여기에서 아랍의 선진 기술인 피혁과 금은 세공업을 발달
시켰다.
아울러 배후 세력으로 유태인과 집시들도 끌어들였다.

문명과 문화 발전의 기폭제는 항상 다원주의와 변화를 수용하는
마음자세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일부와 동남 아시아까지 넘보았던 이슬람은 대제국 건설
이후에 원리주의와 불변을 고수하기 시작하면서
변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서구 문명에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영광의 정점에서 불변이란 얼마나 달콤한 미망인가---.

하여간 당시로는 굉장한 선진 기술인 고도반 기술을 개화 시킨
이곳은 지명 자체도 "꼬르도바(Cordoba)"가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고도방 구두의 변천사는 아까도 말하였듯이 모두 운이 좋아서 잘 둔
가이드의 설명에 대체로 의존한 바 크다.
또한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크게 착각하고 있는 나의 보충 발언도
군데군데 무식이 탄로나지 않을 정도로 쑤셔넣었다.

이 꼬르도바의 고도방이 "마카오 신사"나 "새무가죽
(Chamois 혹은 Shammy, Shamoy leather)"라는 어휘와 함께 어떻게
20세기 중엽에 한반도로 들어와서 가난한 시골출신 중학생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그 유입사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지(Serge)군복과 함께 미군부대 뒷구멍에서 깡통
(Can 혹은 Canteen)과 함께 흘러나왔으리라.

그건 그렇고 꼬르도바에도 그러니까 회교사원, 모스크 양식을 몸통
으로 하였으되,
가톨릭 양식의 높은 종탑과 함께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식 탑이
상부를 장식한 대성당이 있어서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우리가 총독부 건물의 중앙 돔만 해체하고 청기와를 얹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주제도 자주 떠올려보지만 하여간 박살을 내버린 전직 대통령의
철학을 "쾌거"라고 하기도,
안타까운 "망동"이었다고 하기도 모두 주저스럽다.

"고도방 구두를 아세요?"
내가 다섯명 한가족의 제일 젊은 총각에게 물어보았다.
같은 도시 출신으로 여행 중 그래도 가까이 지나고 있는 사이라서
아무 뜻도 없이 무심코 물어본 셈이었다.
아니 흘러간 세월에 대한 확인을 해보고 싶은 뜻이 무심결에 물어
있었나---.

"내가 그런걸 알게 뭐요!?"
청년 총각의 답이 몹시 거칠고 무례하였다.
"---?"
"아저씨, 참 잘났오. 구두방이 그래서 어떻단 말이오?"
그가 혼자서 점점 격앙되더니 얼굴을 붉히며 대들었다.
"구두방이 아니라 고도방 말이오. 그리고 구두방이라면 또 어떻소?"
총각의 거친 말과 나의 당황한 답이 오고갔다.
나이든 아버지가 나타난 것은 이때였다.

"얘야, 무슨 오해가 있나보다."
그분은 나에게 닥아와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대구시에서 고도방 구두점을 크게 했지요. 이름은 은성
제화라고---."
"아, 은성 제화, 정말 반갑고 또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건 30년도 넘지만 은성 제화를 어찌 잊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그만둔것도 10여년 이상 되는군요. 우리는 지금 대구
시에서 금융업을 한답니다. 은성 상호 신용 금고가 발전된
은성 저축 은행이라고---."
"아, 들은 풍월이 있군요. 적절한 변신을 하셨습니다."
"제화점이 원래 현금 장사 아닙니까. 그래서 금융업이 차세대 사업이
되자마자 우리는 갖고있던 현찰로 즉각 변신을 했답니다."

"죄송하지만 서양의 유대인들이 그런 변신에 빨랐지요. 대표적인 것이
골드만 삭스라던지, 모건 스탠리라던지, 그렇다는군요. 그런데 자제
분은 왜 저렇게 흥분했습니까---?"
"모두 갖바치라는 말 때문이랍니다. 가죽 일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나라
에서는 가죽바치, 혹은 갖바치라고 했지요. 우리야 그런 계층과는
거리가 멀고 해방 후에 미군의 진주와 함께 동성로의 집앞에서 이 일을
시작했지요. 사업이 잘 되니까 중앙통으로 나아갔고---. 그런데도
예전에 광우리를 짜면서 평생을 살아간 고리 귀신하고 우리를 갖바치라고
하여서 같은 족보를 적용하더라고요. 더우기 우리는 해방 후에 벌인 가업
인데요. 우리가 돈을 벌수록 뒷전에서는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대구시에서는 제일 큰 가방장사 딸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뒷 말들이 더 많아진겁니다."
막내인 총각의 격앙되었던 감정이 조금 진정 되면서 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돈될 분이 K 백화점에서 큰 가방집을 경영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것이지요---."
아들의 목소리가 큰데 비해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고 낮았다.
"아, 막내 자제분이 결혼식을 앞두고 있군요?"
내가 조용히 물었다.
"네, 그렇답니다. 샘소나이트 대리점 집의 딸과 연애를 하다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지요. 우린 지금 금융업으로 변신을 했는데도 대구라는
보수 사회가 그러고들 있답니다. 위의 두 아들도 이 보수 사회에서 여간
힘 들지 않았지요---."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이슬람 문명이 쇠퇴한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탓입니다. 변화없는 도그마, 카스트 제도---, 이런 것들이 종교와 접합
하면서 원리주의가 되면 대책이 없는것이죠---."
똑똑한 젊은 가이드의 유창한 안내의 말이 그 때 우리의 귓전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