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앙코르와트 (팩션 장르의 감각으로)

원평재 2004. 10. 8. 01:44

앙코르와트라는 고유명사를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나보다.

대처에 나가서 중학교를 다니던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골 면장을 두번, 그리고 수리조합장까지 겸직을 하시던 아버지의
사무실에 가서 이것저것 출판물을 뒤적이다가
“4H"라는 팜플렛을 손에 쥐었고,
월간이던가 하여간 그 무더웠던 여름 방학 달의 특집이 "앙코르와트"였다.

농민들에게 영농의 지혜를 전수하고 파종과 시비와 수확에 관한 구체적인
교본 역할을 하는 내용의 “4H" 농민 잡지에 하필이면 앙코르와트 소개라니,
숙명적 대면이었던가, 소년의 머릿속에는 알지못할 기이감만 가득하였다.

책속의 글줄들이 지금도 기억 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대 강국으로 몇 세기를 군림했던 크메르 왕국은
앙코르와트라는 거대 도시와 축성을 남겨놓고
어느날 갑자기 인류사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수세기가 지난 다음
홀연 프랑스 탐험가 혹은 신부님의 눈에 나타났는데,
너무 큰 놀라움은 적절한 숙성기간이 필요했던지
무섭게도 거친  발견의 내용은 다시 반세기 가량 내팽개쳐진
무심과 회의(懷疑)와 망각의 시기를 보낸 다음에야,
겨우 인류사에 다시 등장하여 햇볕을 보게 되는데
이 온갖 과정이 왠일인지 기이하게도 "4H" 농민 잡지에 자리하여
숙명처럼 소년의 눈에 띄인 것이다.
 
그때 이야기는 하여간 그렇고,
우리보다도 이미 오래 전에 아시안 게임까지 개최하였던
크메르 아니 오늘날의 캄보디아라는 나라는
가난하였던 한반도의 소년이 성장하여 한유로운 관광객의 두눈으로
새삼 둘러살펴보니,
한 세대도 더 전 "4H"가 딩굴던 소년의 나라와 어쩌면
찌든 모습이 그렇게도 꼭 같은가.
위정자들 정치 잘해야지,
공포감 속에 전율스러울 따름이었다.

누구는 또 이런 현상이 미국의 월남전 수행과정, 내지는
인도차이나 책략 때문이라고 덮어씌우기를 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라가 결딴나는 온갖 책임은 그 민족이나
구성원에게 있지않으랴.

통일 베트남이 미국을 이용하고 중국도 미국에게 아첨을하지
않는가,
목표의 그날까지---.

한 세대 동안을 나는 앙코르와트에 대한 선행 지식으로 인하여
인류사의 불가사의에 관하여,
그리고 왕조나 국가의 운명과 숙명에 관하여,
오호라 또한 여행이나 잡학에 관하여
해박한 전문가로서의 위치를 고수해 올 수 있었다.

<img src="http://solly.iam.ro/tour/tomtom.jpg">

보라, 지금도 앙코르와트를 생경한 고유명사로 대하는 내 나라
동포들의 안목에 비하여 일찌기 소년의 지식 변경은 얼마나
광대무변 하였던가.
아이구, 내가 너무 나가고 있네---.

하여간 앙코르와트 관광단 일행은 타이베이를 경유하여
방콕 공항에 도착,
다시 "아란"이라는 태국의 작은 변방 도시에서 일박하고
새벽 잠을 설치며 육로를 통하여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지대로 달려갔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고 위치가 가까운 나라 사이에
편안한 관계는 드물다.
이제는 사정이 뒤집어져서 국제화와 외국자본의 유치에 앞선 태국은
경제적 부를 누리며 캄보디아의 거지 같은 노동자들을 일당 품팔이로
매일 아침 불러 들였다가 저녁이면 되돌려 보내고 있었는데
경비가 삼엄하였다.

이런 캄보디아 거지 군상의 집단 왕래를 내가 캠코더에 그대로
포착하여도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어린이들이 동냥을 구하며 파리 떼처럼 모여들어도
이 치욕적 광경을 치욕으로 느낄 시선도 주위에는 없었다.

국경을 넘어 다섯 시간을 비포장 도로에서 덜컹거리며 달린 후에,
우리가 캄보디아 내에서 1박을 한 곳은 앙코르와트의 입구에 자리한
“시엠립”이라는 작은 도시였다.
태국 샴 족을 크메르 족이 물리친 곳이라는 뜻의 고장이었다.
이 곳은 그래도 태국 쪽으로부터 자본과 관광객들이 들어와서
수도 프놈펜 보다 더 살기가 나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인근에 있는 더럽고 거대한 톤래삽 호수의 수상족들은
원시 이하의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니세프 구호활동과 관련하여 이 곳에 왔던 탤런트 김혜자씨가
눈물을 쏟았다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래 이런 곳이 극단적인 경우라면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떤가.
한마디로 한국 전쟁 직후의 우리 사정과 비슷하다면 긴 설명이나
서술이 필요 없을듯 싶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국제협력기구, KOICA같은데에서라도 기금을 이용하여
이런데에 청년들을 보냈으면한다.

이 곳 사람들도 이제 눈을 조금 떴는지,
관광객들을 위하여 지어놓은 호텔은 그래도 우리의 장급 여관
수준,
수도물도 나오지만 먹을 수는 없고 전기는 당연히 자가발전이었다.
발전소라는 것이 도대체 이 나라 안에는 없고
거리에 내놓은 노란 물병 같은 것은
모두 휘발유나 석유를 담아놓고 파는 모습이었다.
전력의 사정이나 품질이 이러하니 캄보디아에는 제조 공장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오직 수공으로 하는 섬유 가공품만 잔뜩 태국에서 받아서 가공 후
되넘길 따름이었다.

아, 제조업의 예외가 있었다.
"앙코르 맥주"가 있었는데 이것도 일본 자본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하여간 캄보디아 내에서 제조되는 유일한 공산품이었다.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핵심이 되는 성곽 도시, 앙코르 톰과
더불어 왕궁이며 사원이며 무덤이었다.

천년 전에 이 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산되는 돌을 운반하여
약한 지반은 비록 경도는 다소 무른 사암으로 축조하여 다진 위에
이토록 웅장하고 거대한 성채와 구조믈을 일으켜 세우고
끝도없는 부조물을 벽면에 조탁한 주인공들은 과연 지금의 키작고
왜소하고 가무잡잡한 캄보디아인들의 선조란 말인가?
이 부분은 건축 구조물 내부의 계단이나 편의 시설 등의 사이즈를
감안할 때 틀림이 없다고 한다.
왜소한 체구에 맞게 설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 축성과 변방 확장과 정복의 에너지 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고 해답은 오리무중이었다.

팩션 글쟁이인 내가 이런 단순 감탄과 의문과 전율로 독자들을
잠시나마 우왕좌왕케하고,
여기저기를 의문부호와 함께 기웃거리게 해서는
아무리 포스트 모던한 기법의 "작가/독자의 경계 허물기"라고
강변하더라도 역할 분담이 너무 모호하다.

프랑스 신부님이 놀라서 기절까지 하였다는 바이온 신전을 포함하여
모든 구조물들이 이미 경악의 경지 따위는 솟구쳐 넘어섰으므로
이 곳 상황에 관한 세밀묘사는 여행사들이 올린 인터넷 상의
기록물과 자료로 대체하고,
이 팩셔니스트는 이야기꾼으로서의 할일과 본업에 빨리
복귀하여야겠다.

내가 볼 때 천년전 이 거대 문명을 가능케햇던 에너지 원은
코끼리였다.
당대의 크메르인들은 부조에도 나와있듯이 코끼리의 사육과 조련에
천재이자 달인이었으며 쉬임없는 노력가들이었다.

코끼리 군단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속전 속결 정복하면서
그 때마다 확보한 수많은 노예들은 곧장 이 성곽과 신전을 만드는
노동력으로 이용하였으리라.
성곽의 문은 전투 코끼리를 중무장한 규모의 폭으로 고안되어
있어서,
적의 외침에도 오늘날의 중형 전차에 맞먹는 전투 코끼리만 있으면
문을 꽉 틀어막고 자율 방어토록 치밀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아울러 관광차의 폭도 리무진은 맞지않아서 한때 우리가 만들었던
아시아 자동차의 중형 밴이 최적이라고 한다.
일본 관광객들이라도 별수없이 한글이 곳곳에 찍힌 우리 중고차를
애용할 수 밖에---.

성곽 안에는 적어도 100만명이 기거하였다고 하니 크메르 왕국의
넓은 강역을 지키고 확장하고 움직이는 핵심 원동력들은 에너지를
매우 유효적절하게 선택과 집중의 원리대로 배분했던 셈이다.
선택과 집중은 이 시대 경영원리의 근간이 아니던가---.

그들은 또 뱀의 형상으로 숭배의 표상을 만들어서 집단을 최면시켜
통치해 나갔으며,
이 표상을 바탕으로 신화와 전설을 창조하여 부조로 구상화한 다음
일종의 집단 의식을 만들어 계승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에 다름아니었고
나아가서 통시적, 공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편도 되었으리라.
그리고 이 과정에는 고도의 지식인인 제사장이 동원되고
상응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펀더멘탈을 구축한 고도의 유효 집단이 정신적으로는 신화로,
물질적으로는 코끼리 군단을 휘몰아 정복의 길에 나갔을 때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의 소수 인종들은 굴복치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역사는 왜 그들을 한 순간에 멸망, 소멸케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수세기동안 망각의 저편으로 몰아 넣어버렸을까?
망각의 기간과 그 정도가 얼마나 길고 고립적이었나 하는 것은
헐리우드 영화 "툼 레이더"(무덤의 침입자 혹은 도굴꾼)에도 나오듯이
원시림이 석조 궁전 하나를 완전히 나무 뿌리와 가지의 힘으로
집어 삼키고 뒤집어 엎어서 파괴시킬 정도였다.

이 파괴된 궁전을 나는 다른 축조물 보다도 가장 인상깊게 보았다.
환상과 몽환적인 제 요소를 다갖춘 기막힌 형상을 상상계나
가공의 세계가 아닌 현실계에서 체험하게 되다니---.
전율과 공포감 가운데에서도 묘하고 이상한 통달감, 정복감,
그리고 기시감(旣視感; 데자뷔)이
오관과 하다못해 땀구멍을 통하여서도 물밀듯
내 인지와 인식의 메카니즘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프랑스 학자들은 크메르 제국의 멸망을 이웃 태국의 샴족이 세운
아유타야 왕국의 침략 탓으로 보았다.
크메르 왕국이 강성하던 중에도 이들 태국계의 아유타야 왕국은
상대의 성장을 벤치 마킹하면서 코끼리 군단 등,
비슷한 전력을 키워나갔다가
마침내 힘을 모아서 왜소한 체구의 크메르인들이 구축한
앙코르 제국을 정복하고 궤멸 시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인과율로 보는 서양 철학이 녹아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정목자들은 왜 이 거대한 전리품들을 방치해 버렸을까.
이 막대한 부와 생산의 터전을 왜 버리고 망각의 피안에
매몰시켰단 말인가.
서양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논리의 연쇄고리가 여기에서 끝장이
난다.

논리가 끝난 곳에 늦게 진출한 일본학자들의 자연재해설이
비집고 들었다.
말라리아 계통의 열병, 요즈음도 창궐하는 "조류독감" 같은 것이
13세기 경에 이 곳을 휩쓸어서 크메르 문명과 문화와 거주인들을
절멸시켰다는 학설이다.
백만명의 문명인들을 하루 아침에 절멸시킨 요인으로는 좀
황당한데가 있으나,
앙코르와트라고 하는 거두절미된 현상이 이미 논리 이전으로
황당한 존재일진데
이에 대한 해석의 논리도 상당부분 기막히게 직관적이고 황당한
것이라야 오히려 더 현실적, 합리적일는지도 몰랐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조류독감"이 태국에서 발생했다는 BBC뉴스를
들은 것은 이틀간의 앙코르 와트 관광을 마치고,
우리가 지친 몸을 이끌며 태국-캄보디아 국경 비무장 지대,
무주공산에 세워진 "다이아몬드 카지노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였다.
이 곳은 태국과 캄보디아의 중간지대로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지역이었다.

BBC 뉴스는 약간의 공포감을 일행에게 던졌으나 어쨌던 우리는
내일이면 방콕 공항을 통하여 이 공포의 지역을 떠날 일정이었다.
상당한 수준의 호텔에는 카지노 시설이 되어있어서
저녁 식사가 끝나면 가볍게 오늘의 일진과 이번 여행의 운수를
베팅해 볼 참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열대의 폭염과 강행군에서 온 피로를 고급 흉내를 낸
카지노 호텔의 샤워시설로 털어내고 저녁 식사 시간 전의 오수를
잠시 즐기기로 하였다.

달콤한 시에스타에 빠져들어서 얼마나 지났을까,
저 왕코르와트의 부조에 수도 없이 많이 나왔던 천년전의
압살라가 꿈속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을 붙였다.

처음에 나는 관광지의 매춘부가 몸을 팔러 호텔에 잠입한 줄로
잠시 착각하였다.
그러나 온몸을 꼬으며 손가락을 뒤로 발랑재끼는 그들의
포즈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으악!"
내가 소리를 내질렀다.
"놀라지 마세요. 어제 오늘 그렇게 우리들을 실컷 보시고서---."
일렁거리는 환영(幻影)이 손을 저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건 꿈 결같은 상태에서, 아니 지금이 꿈속이라면
당신들을 본건 어쨌든 생시의 일이었지.
그리고 생시에 본건 당신들이 돌더미에 꼼짝없이 각인된 아니 부조된
모습이었지. 이렇게 움직이지는 않았잖아요!"
"돌 속에서 부조된 상태에서는 피가 돌지 않는 죽음의 세계였지만
지금은 잠시 나와서 이렇게 살아 숨쉬고 피가 돌고있는 상태랍니다."

"그럼 나는 이게 지금 꿈이요? 생시요?"
"꿈도 살아있을 때 꾸시는거니까, 생시니 꿈이니 하는 것도
모두 경계가 없는겁니다."
"당신들 이름이 뭐더라, 그래 압살라였지. 어쨌든 찾아온 목적이
뭐요?"

압살라란 앙코르와트에서 수문장과 함께 성곽을 지키는
여성 모습의 크메르 수호신들이었다.
힌두 문화의 영향에서 탄생한 땅과 하늘의 중간지대에 사는
영물이라고나 할까---.
돌로된 성채의 부조상에 수도 없이 등장한 일꾼들,
벌들의 세계로 보면 일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몸매와 품새가 남아서 오늘날 캄보디아와 태국의
손발을 뒤로 재끼며 몸을 비꼬고 비트는 춤사위로 발전
되었다고 한다.

내가 조금 정신이 들어서 바라보니 그들은 모두 합이
셋이었는데
얼른얼른거리며 움직일 때에는 숫자가 왔다갔다 하였다.

"저희들의 목적은 크메르 정신을 외국 방문객들에게 인각
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관광객을 찾아다니기가 가히 번거롭겠소."
내가 놀라움 속에서도 조금 비꼬았다.

"다 찾아다니는건 아니구요. 첫번째 대상으로는 수칙을
지키지 않은 분들입니다.
앙코르와트를 처음 들어오시면서 가이드로 부터 경고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들어오시는 방향으로 사진을 찍으셨으면 나가실때도 반드시
나가시는 방향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으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앙코르의 귀신들이 손님들을 쫓아다닌다고---.
선생님도 그 룰을 지키지 않으셨지요."

"그, 그건 맞는 소리 같소만 그거야 당신들의 일방적인 규칙이
아니겠오."
"그래도 우리 영지에 들어오셨으니까요. 로마에서는---."
"알았오. 또 다른 이유는?"
"손님처럼 귀국하셔서 크메르의 장래에 영향을 끼칠 분들만
대상으로 하지요."
"알아줘서 고맙지만 무슨 영향을 끼쳐 드리리까?"
"복잡하지 않습니다. 크메르와 앙코르와트 절멸의 이유를
프랑스 학자들 주장이 아니라 일본 학자들 해석이 맞다고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설? 조류 독감같은 것 말이오---?"
"맞습니다. 우리가 절멸한 것은 고약한 열대성 독감 때문
이었지요. 일부 살아서 도망간 자들도 이 곳을 저주받은
곳으로 여겨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피난지에서도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을 퍼뜨려서 이 쪽은 완전히 폐허와 단절의
땅으로 되고 말았지요.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가 인구의
1/4을 몰사시킨 사례와 비슷하다고 하겠지요."

"난 일본이라면 사지가 떨리는 대한민국 사람이오. 또 그들의
학설에 무조건 동의하고 귀국해서 학계나 사회 각계에
영향력을 끼치라는 주장은 어쨌거나 공평하지 않소.
내가 반대한다면 어찌하겠소?"
"우선 마지막 질문부터 답을 드리자면 돌아가시자 마자 조류
독감으로 사지가 떨리도록 해드리지요."
"그건 협박이 심하네. 그래 그렇다치고 일본 주장이 옳다는
논거는 뭣이며 왜 그 주장이 크메르에 유익한 것인가요?"
내 사지가 이미 좀 떨리는듯한 착각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간단하지요. 앙코르가 5-6세기 동안 인적미도(人跡未蹈)의 땅이
되었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이 곳을 정복했다면 그들은 이 땅을 자기네 번영의 터전으로
활용했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파괴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곳은 그냥 어느날 갑자기 텅 비워지고 말았지
파괴의 흔적은 없지요. 그렇게 갑작스런 공동현상이 생긴
다음에는 풍화작용과 함께 원시 거대 수림이 서서히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말았어요.
주민들의 태반이 괴질로 하루 아침에 죽고 일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갈 때 우리 압살라들은 성벽의 돌에
꼼짝없이 붙어있으면서 돌가루 눈물을 흘렸지요."

그들의 긴 설명이 끝나자 이제는 내가 말할 차례였다.
"인류사의 모든 동기는 모두 정치적이라고 하지요. 폴리틱스
말입니다.
일본이 괴질과 자연재해를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태국에도
많은 투자를했지만 이제는 앙코르 복원을 책임 맡으면서
크메르 족의 위신을 세워서 또다른 거점을 만들자는 정치
혹은 정책적 책략이 감추어져 있을텐데요---."
내 사지가 또 조금 떨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나 최종의 순간
압살라에게 항복할지언정 나도 내 할말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 

"좋은 말씀입니다만 그건 그들의 책략이 우리 민족혼과 운 좋게
맞아 떨어진 것이지 어거지 주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도 발해의 흥망성쇠에 관심이 많고 자국의 역사에 편입해
놓고 있지않습니까.
발해가 왜 멸망했습니까? 중국의 힘에 의하여라기 보다는
어느날 갑자기 멸망한 것 같지않은가요?
아마도 당시 백두산의 대폭발과 관계가 깊다는 인식과 학설이
새로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 소수 학자들의 의견 및 실증적 자료와 함께 대구 가톨릭
대학 국어학자이신 김동소 박사의 주장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의 재앙이라는 학설이 민족혼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겁니다."

나는 발해사의 흥망이라는 압살라의 신선한 반격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제 사실은 그들의 간곡한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싶어졌다.
"저도 돌아가서 크메르 흥망사에 관심을 깊게 갖겠습니다. 그리고
발해사를 깨우쳐 주신 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 사지와 오장육부에 따듯한 온기가 다시 돌았고 떨림같은 것은
일순 사라지고 존재치 않았다.

"저희들은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압살라들이 강남 룸사롱 아가씨들 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쯤에서였다.
객지의 남자들이란---.

"잠깐! 당신들이 착한 압살라들이란 것을 어떻게 믿지요? 증명해
주고 가시오."
내가 끝까지 당찬 고집을 하였다.
"그럼 지금 카지노로 내려가 보세요. 블랙잭 할 줄 아시죠?"
"예전에는 손을 좀 대어봤지만 지금은 자신 없어요."
"그럼 룰레트는?"
"러시안 룰레트라는 말 밖에는 몰라요. 거 왜 자살게임 하는거---."
"호호호, 이 양반 딱하시네. 그럼 빠찡꼬로 가세요."
"일본 말 말고 슬럿 머신이라고 합시다."
"그래요. 하여간 그리로 가셔서---."
"코인을 잔뜩사라?"
"코인 사서 집어넣기도 귀찮으실걸요. 요즈음은 모두 전자식
이잖아요.
지폐를 백불 짜리로 기계에 넣고 좌우는 물론 대각선까지
16개가 모두 베팅되는 올인을 해보세요."

"아니 가로로 바바바하던지 은빛 종 셋, 혹은 수박 셋이 맞으면
잭팟이 터지는게 아니오?"
"답답한 양반이시네요. 지금이 어느때인가요. 하여간 모두 걸고
확 당겨 보세요. 잭팟이 터질겁니다. 그게 제 위력이자
아이덴티티 확인과 증명 방법이예요."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서둘러 카지노로 내려갔다.
까무잡잡한 인도차이나 딜러 아가씨들이 카드 테이블에서
고혹적인 미소를 띄었으나
나는 압살라와의 작정대로 블랙잭을 버리고 슬럿머신 쪽으로 같다.

코인 환전소가 아직도 한쪽에 있었으나 하여간 나는 압살라의
말대로 슬롯 머신기에 달린 지폐 투입구에 100달러를 넣고
가로 세로 대각선의 26가지 얼개에 모든 것을 걸고 옆쪽에 달린 바를
잡아당기는 대신에 키 보드의 전자키를 살짝 눌렀다.
옛날 귀에 익었던 바바바 소리가 아니라 특이하게 아름다운 멜러디가
여기 잭팟이 터졌음을 만방에 알리고 있었다.

나는 뛸듯이 기뻤다.
단 한번의 베팅에서 올린 300만원 수입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압살라와의  대면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자 진실로 확인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4H 시대 이래의 힘들었던 내 생애를 관통하여
한 줄기 밝은 빛이 이제야 지나가는듯 하여서,
나는 뜨거운 희열을 맛 본 것이었다.

압살라와 레종데트르(Raison d'tre),
존재의 가치는 이렇게 환영(幻影)과
도박의 현장에서도 움켜쥘 수 있는 것인가---.



'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날의 감회  (0) 2009.06.07
실크로드 견문록  (0) 2004.11.27
크루즈 시승기  (0) 2004.08.02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0) 2004.06.18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0) 2004.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