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시대의 아쉬운 세상 나들이

그날의 감회

원평재 2009. 6. 7. 10:13

어떤 모임의 소식지에 실었던 내용입니다.

지난달 25일쯤 작성된 글입니다.

졸문입니다만 일단 여러가지 의미가 중첩되었던 날의 기록성으로

반추해봅니다.

 

2009년 5월 23일은 큰 국가적 사건과 개인적 일이 오버랩 되는 날이 되고야 말았다.

먼저 개인사적으로는 이날 서울 동북부에 자리한 덕성여대의 차미리사 관에서 열린

“(한국)미국 소설학회”에서 지난 2년간 회장으로 활동했던 역할을 접고 감사패를 받으며

새로운 회장에게 바톤을 넘긴 일이었다.

비온 후의 대학 캠퍼스는 여자대학답게 깔끔하고 정일하였으며 내 개인의 심사는

한 시대를 지나보내는 감회로 작년 은퇴하던 날 못지않게 자못 만감이 교차하였다.

미국 소설 학회는 800여명의 교수, 학자들을 회원으로 삼고 있는 큰 학회임을 자랑한다.

 

 

비슷한 시각, 라디오에서는 경천동지할 뉴스가 시시각각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며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되어 바깥세상의 궁금함과 안타까움을 누르며, 미국소설학회는

신진과 경륜이라는 양대 배경의 학자들이 묵직한 주제를 발표, 이어서 토론과 질의가

심도있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날의 논문 주제는 대략 미국 소설에 나타난 “음모론을 통한 사회 비판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지극히 전공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소개하여 올리는 일이 타당성의 측면에서

모험 같기도 하지만 인문학이란 항상 우리의 주변을 맴도는 공통화제가 될 수 있다는

특징과 힘을 믿고 여기 잠시 염려를 무릅쓰고 소개를 해본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인류사에서 언제나 존재해온 필연이었고 이런 갈등은 개인의

내부에서도 속속 생성, 갈등, 마침내 화해라는 정반합의 과정을 지속함은 우리가 모두

겪고 느끼며 살아가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에서도 불온한 격랑이 한차례 지나가면 시대정신으로 보수의 기반이 일단

뿌리를 내리는데, 그러나 뿌리를 내리는 바로 그 순간 즉각 진보의 역습이 시작되는

공식은 문학이라고 해서, 아니 문학이기에 더욱 격렬, 선명하게 나타나는 역사의

흐름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진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자세이거나 대안이라기

보다는 보수 세력의 확립이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공격전술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수적 가치의 안정화를 들이치는 전략이 대략 “음모론”에 기반하였고

그런 모양새의 진보적 공격은 여론의 지지를 한순간 향유하지만 곧 이어 별볼일 없이

보수적 맥락에 합류되고 만다는 사실을 신진 학자들은 미국 소설을 텍스트로 잘

파헤쳐서 이날 발표장은 마치 한국 정치사의 일단을 난도질하는 장면 같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쉬운 방책은 보수적 가치도 새롭게 진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

시키는데에만 기여할 따름이 아니겠는가.

 

 

진보의 실험정치, 혹은 낫게 보아서 진보의 이상정치를 십여 년 경험하고 마침내

그 허상에 넌더리가 난 이 나라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보수의 기치를 높이든

새 정권의 출범은 장밋빛이었으나, 곧 출발의 꽃가마는 서툰 흥행으로 이어져서

어쩌면 본의 아니게도 서민들에게는 꽃가마를 탄 그들만의 잔치로 보였고

이어닥친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재앙 속에서의 불가피한 한국적 고통과 현실도

곧장 어떤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오늘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진보의 역습이 재빨리 그리고 당연히 시작되었으며 그 중의 상당부분은

음모론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쨌거나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빨리 회복 도상에 있다는 훌륭한 성적표도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있음을 

모두가 통감해야 하는 오늘이기도 하다.

 

 

백면서생인 내가 보수하고 싶은,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지켜줄 지혜롭고도 특히

폭 넓은 진보적 정치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