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단편 소설) 우울한 세대의 증언 / 두번째 (수퍼문 전후에)

원평재 2013. 6. 27.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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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첫날 저녁은 화려하게 지나갔다.

만찬이 끝나고 인근의 고층 호텔 숙소로 올라갔을 때에는 아직 "수퍼 문"이 구름에 가려 여린

빛을 인색하게 흩뿌리더니 내 간절한 염원을 받아주는 듯 자정 가까이 휘영청 한강 위에 월광을

아낌없이 쏟아부어서 강변의 불야성과 함께 마음을 부풀게하였다.

아마도 내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이렇게 높고 훌륭한 호텔에서 잠을 자본 것은 이번이 처음

인가싶다. 예전에 미국의사 시험을 치러 왔을 때에는 세브란스가 가까운 신촌의 어느 허름한

여관 같은데였던 것 같다.

 

달은 이제 자신있게 구름을 풀고 만월이 되어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풍만한 근원에서

가림없이 쏟아부어주는 에너지는 과학하는 사람의 뇌리에도 불가해의 신비한 작용을 하는듯,

기어코 눈에는 눈물이 괴게 하고 가슴에는 격랑이 일게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LA에서도 가끔 그리워는 하면서도 더이상의 실천적 행동에는 옮기지 못했던

친구들에 대한 향수, 친구 찾기에의 갈망은 불현듯 강렬한 욕망이 되어 나를 주체할 수 없게

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필경 친구 찾기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성 싶었다.

마침 리셉션 장에서 나를 먼저 알아본 대학 후배 여의사가 있었다. 그녀는 전에 내가 있는

대학병원에 연수를 와서  일년 가량을 머물며 가끔 만났던 사이였다. 그때도 인간적 교류는

되도록 내가 피하였으나 붙임성있는 그녀의 성품이 나를 붙잡았다고나 할까.

이번에도 국제학회에 업저버로 들린 그녀의 넓은 오지랍이 나를 놓치지 않았다.

리셉션 때에 칵테일 한잔을 들고 서서 나누던 학술적 이야기는 그녀가 특별히 만찬 테이블을

또 변경하여 내 옆으로 오면서 사사로운 데에로 변경을 넓히며 진도가 나아가더니 마침내

나의 친구 찾기라는 과제로 최종 집중이 되었다.

 

"식은 죽 먹기예요."

그녀의 시원한 답변이었다.

"언니의 친구들이 이 나라에서 죽지않고 살아 계시다면 말입니다. 호호호."

그녀의 말에 나도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좀 거친 표현이 확신을 심어주는 레토릭임을 나는

파악하였다. 어쨌든 내일의 학술발표, 그 다음 날 부터는 두 친구와의 만남이 이번 학술행사의

최대목표라고 내가 웃으며 강조 하였고 그녀는 쾌히 그 연구과제를 접수하였다.

다시한번 구수한 말 솜씨로 언니의 친구들이 이 나라에서 숨을 쉬고 계시다면 금방 찾아내는건

일도 아니라고 다짐을 하면서 다만 그녀의 인맥 수첩에 언니들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면 학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별로 활동을 하지 않는 분들일 것이라고 단정도 지었다. 

하여간 사람찾는 일을 그녀에게 맡기고나니 수퍼 문이 비추는 월광을 이불 삼아 참으로 홀가분

하게 그날은 잠자리에 들수 있었다. 남편에게는 전화할 엄두를 낼 수 없었는데 디렉터인 조나단

으로부터는 취침 시간대 직전에 따뜻한 전화가 왔다. 남편의 성씨가 Lee인것 처럼 그도 또

하나의 이씨 성이랄까 Leigh여서 달빛에 풀어놓았던 흔들리는 가슴을 꼭 여몄다,

"뎁, 여긴 보스톤이라오. 쌍둥이 딸들이 어제 오늘 졸업식이라서 왔지요. 여긴 몹씨 더워요.

어제는 하바드 야드에서, 오늘은 MIT의 슬로언 스쿨 앞 광장에서 생애 최고의 기분을 내고

있답니다."

그는 인공 수정으로 딸 쌍둥이를 얻었는데 이제 둘은 촬스 강변 케임브리지의 두 명문 학부를

나와서 또 명문 의과대학원으로 진학한다고 하였지. 리서치 메디컬로 유명한 세인트 루이스의

U of Washington과 볼티모어의 존스 합킨스 의대로 진학을 하는데 넉넉지 않은 과학자 집안에

복이 있나니, 모두 장학금이 함께한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즐거워하였지. 

"축하해요. 멀리 떠난김에 와슈와 합킨스 캠퍼스도 들러보고 대학원 기숙사도 점검해 보세요."

"사정을 알면서 딱한 말씀하시는구려."

그의 아내 캐산드라는 몇년전 오래앓던 우울증 끝에 높지도 않은 공동 주택 발코니에서 뛰어

내렸다. 

"캐시도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기어코 내가 저 세상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캐산드라는 앓아누운 내 남편, 강 같은 은혜를 베푼

내 은인에게 내가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 경의를 표하도록 존재하는 둑이고 제방이었다.

지금 둑은 허물어지고 있고 제방의 잔디도 헐벗어지고 있으나 나는 견딜만큼 견딜 작정이었다.

나이도 나의 편이었고 연구소의 분위기도 여기가 제 아무리 미국이고 그 중에서도 서부활극의

이라고 할지라도 동료간에 얽히는 데에는 만만치 않았다.

"G-nite." 그가 아쉬운듯 말을 끊었다. 

"Have a nice day!"

서머타임의 동부, 촬스 강변은 지금 한낮일 터였다.

 

다음날 내 심포지엄은 성공적이었다. 다국적 학자들 사이에 참여한 한국 과학자들의 열성과

토론자세도 그렇게 진지 할 수가 없었다. 최종으로 공부를 마친 곳은 거의 모두 미국에서

였겠지만 토론 요지의 글과 말도 유창하고 매력적이었다. 과학자들이야말로 인문학자 보다

글을 더 잘 써야하고 말도 더 섹시해야 한다는 과학계의 묵시적 바람이 이곳에서도 시원하게

불었다. 로켓 과학자들이 NASA에 예산을 더 따오려고 시작한 세련미가 근원이었다던가.

그래 우주과학쪽 사람들이라면 일찌기 갈릴레이 갈릴레오도 수사학 도사였으니까.

마음이 가벼워져서 생각도 가벼워진 가운데 상쾌한 바람따라 기분 좋은 오전이 재빨리

지나갔다. 

하지만 오후부터 시작하려던 개인적인 일은 한가롭게 추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인으로서의 내 입지가 어느 사이엔가 너무 높이 매겨졌달까, 만만치 않은 스케줄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나는 그 후배에게 친구들을 찾아내더라도 연결과 만남은 연기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모두 주최측에서 제공해준 근거리 통신기기를 이용하였음은 물론이었다.

일이 쉽지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국내 매스컴의 집요한 접근 탓이었다.

물론 불평이나 불만의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매스컴과의 일들은 내가 치루어야할 과제의

최 우선순위이자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거기 비하면 친구찾기란 참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매스컴으로 일단 나의 연구 테마가 뜨고 온라인 상의 관심이 비등하면 대 기업으로 부터

연구비를 구체적으로 확보하는 단계에 까지는 이를지 못할지라도 그 접속의 기록만으로도

책임역량은 수행한 셈이 되고도 남는다. 

"언론 접촉을 통한 교두보의 구축" 정도로 짧은 보고서를 작성하여도 학술발표 내용물 보다

주목 받는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선례들은 비일비재하다. 어쨌든 연구비 조성의

국제화, 다양화를 위한 적극적 기여 평가 항목에는 기필코 좋은 기록을 남기리라.

노벨상 유망주의 인사이드 스토리에 수행 평가 항목을 염려하는 이런 술회가 들어간다는건

좀 우습지만---. 

 

 


아침의 밝은 날씨는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구름이 끼었다. 무슨 말인가하면 새로 출범한

어떤 종편 TV 방송국에서 다중 토크 쇼우에 나를 초청하여 문자 그대로 쇼우맨쉽, 혹은

쇼우우먼쉽을 발휘하라는 주문은 종내 견디기가 어려웠다.

특히 방송국의 이른바 작가 선생들이 미리 만들어 내게 준 콘티를 읽어보고는 아연실색할뻔

하였다.

"우울증 세대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나를 이 시대가 겪는 신드럼의 대표적 상징으로 

꾸며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다는 심산이었다.  거기에 걸맞추어 제시된 소설같은 내용이

여럿 있었지만 우선 두어 경우를 들어보면 이렇다.

첫째로는 내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을뻔 하였다가 도둑질을 당한 일이 있었고 이 일로 큰

상심을 하여 우울증 같은 것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1960년대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제임즈 왓슨과 크릭에게 상을 도둑 맞았다는 항간의 인식과 비슷한 정황을 꾸미려는 은근한

저의가 깔려있지 않은가.

그 다음으로는 나의 성장과정과 도미 유학의 동기에 따른 인사이드 스토리를 먼저 공개해

달라. 그리고 여성 과학자의 가정생활은 본질적으로 원만할 수가 있는 것인지, 

어쩌면 공개하지 않았던 비의적 내용을 털어 놓으라는 무언의 압력이 강력하게 들어있었다.

나의 개인사를 욹어내기 위해서는 곁다리로 희생양을 두엇 이미 만들어두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여류가 가정적으로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고백을 눈물섞어 미리 하도록 콘티가 이미 짜여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혹은 만들어 내라는 압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제목부터 툇자를 놓았다. 자화상을 내 놓을 자리와 순서가 있지, 이게 신상 털기도

아니고  무슨 꿍꿍이 수작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자화상이라는 것이 사실도 아닌 우울증에

내가 걸려있다는 전제가 아닌가.

내 주장이 먹히지 않으면 토크 쇼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최종선포를 하고야 말았다.

 

방송국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나를 다른 방송국에 빼앗길 수는 없었던지 마침내 내 말을 모두 수용하였다.

우선 멀티 토크가 아니라 두사람간의 대화형식을 택하는 "타임즈 토크" 형식을 취하자,

그리고 제목은 그냥 "우울한 시대의 증언" 정도로 하자, 나의 주장이었다. 

"그건 예전 낭만적 시대의 제목입니다. 삘이 꽂치지 않고 채널이 풍차돌듯 날라가요."   

PD 보다 윗선의 기획부서에서 또 난리가 났다. 그러나 심야대로 방송이 밀려나도 상관이

없다는게 주장이었다. 아니 대담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밀어부쳤다.

대회 조직위원장인 차흥봉 박사께서 시의적절히 등장하여 중재자의 역할이라기 보다

서로의 이해를 넓히는 커피 타임을 그 바쁜신 중에도 먀련한 것이 양자의 입장도 살리며

정반합으로 지양, 아우프헤벤이 되었다. 내가 제목을 "우울한 시대"에서 "우울한 세대"로

하자, 저쪽에서는 자화상이란 표현 대신에 증인, 혹은 증언으로 선택적 양보를 하여 내가

사람이 의식되는 증인 대신에 증언으로하여 모두 한 발짝씩 양보를 하였다. 

그리고 멀티 토크에 강한 미련을 갖는 방송국의 태도를 바꾸어서 조용한 타임즈 토크 방식을 

택하되 플로어에 청중을 초빙토록 하였다.

끝으로 일대일 대담의 주제에 이어 부제는 "고령사회에서의 우울증에 관한 폭넓은 논의와

그 예방 및 해결책"으로 낙착이 되었다.

대담은 한국 방송계에서 저 유명한 B 앵커였다.

여기에 실명을 올리지 않는 것은 대담 이후에 내가 일부를 활자화하겠다는 양해를 미리

구하지 못하여서 만일을 염두에 둔 조치일 뿐이다

 

<계 속>

 

 

 

 

 

 

 

 


 

 

 

Oboe and Harpsichord Concerto in C major, Badley C1

 

레오폴드 호프만 / 오보에와 하프시코드를위한 협주곡

Leopold Hofmann 1738~1793

 

 

 

 

 

 

 

 

 

 

Stefan Schilli, Oboe

Jeno Jando, Harpsichord
Budapest Nicolaus Esterhazy Sinfonia

Bela Drahos, Cond

 

 

 

 

 

 

 


I. Tempo di Giusto

 

 

 


II. Adagio molto

 

 

 


III. Thema - Menuet (con Variazioni)

 

 

 

 

 

 

 

 

Leopold Hofmann (1738.8.14 ~ 1793.3.17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Leopold Hofmann는

하이든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이러한 느린

도입부를 교향곡에 삽입한 최초의 작곡가는

빈의 호프만(Leopold Hofmann, 1783~1793)으로

알려진다.

 

 

느린 도입부에는 부점(附點) 리듬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프랑스 서곡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선율과 잘정돈된 화음을 구사하는 명곡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