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단편) 짧고 행복했던 낚시여행

원평재 2018. 1. 6. 09:49














짧고 행복했던 낚시여행

                                                         

 

내 배낭에는 헤밍웨이 단편선 영문판을 넣었고 당신 여행 가방에는 그 번역본을 넣어두었으니

기내에서 심심하면 보시게."

뉴저지 집에서 JFK 공항으로 출발하며 한익준은 무심한듯 아내 송정자에게 말을 건네었다.

"여행 떠나며 무슨 소설책이야요?"

"상파울로까지 아홉 시간 이상 걸리니까---."

"나라들이 크긴 크군요. 한국은 너무 작아."

"-----."

한익준은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 부부는 최근 한동안 영어나 스페인어로는 물론이려니와 한국말로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살아왔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송정자는 남편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으나 한익준이

항상 외면을 하였다. 원래 남편은 과묵한 편이기도 했지만 아내가 그들이 경영하는 델리점의

주방장, 페드로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생각한 이래로 그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부부가 쓰는 말은 기본이 한국말이었으나 미국 생활 반평생에, 때에 따라서는 영어도 먼저

튀어나올 때가 있었고 또 가게의 고객 대부분이 히스패닉 계통으로 바뀌면서는 부부 모두

스페인어도 생활언어 수준은 되었다. 한익준은 원래 스페인어가 대학 전공이기도 하였다.

한편 델리 가게의 주방장으로 히스페닉 출신이 들어오면서 송정자의 스페인어 실력도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결국 그녀의 스페인어 실력이 늘어나는 만큼 한익준의 수심은 깊어지고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었다. 현실에서의 말이 없어지는 대신 한익준은 옛날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그가 맨해튼에서 잡화점과 소규모 델리 점을 겸하는 장사로 정신없이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차원이었다. 사실 그가 30여 년 전 미국으로 올

때만 하여도 그는 일종의 자기 성취감, 자랑과 자부심 같은 심정이 가득하였다. 그때만 해도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은 김포 공항에서 성대한 환송연을 받고 헹가래가 쳐지던 시절이었다.

이민은 곧 살기 험한 조국, 북으로부터의 위협, 군사독재 등을 피하여 떠나는 행운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그 자체가 이미 성공한 삶으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제 숱한 고생 끝에 돈을 좀 모아서 플러싱의 싸구려 셋집을 청산하고 뉴저지 쪽 한인

동네에 괜찮은 단독 주택을 마련하고 슬하에 둔 남매도 마침내 괜찮은 대학의 기숙사로 떠나보낸

인생 후반에 그는 우울증상을 앓게 되었다. 특히 나이 오십 중반에 남들 보다는 조금 빨리

부부간의 성적 관계가 부진하게 되면서 그의 우울증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과

의사에게 매달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상담 치료를 받으며 또 처방 약을 사

다가 먹는 과정이 벌써 3년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그는 아내에게 남미 여행을 제의하였다.

딱 일주일 전에 그는 아내가 주방에서 페드로와 깊은 키스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미국 생활에서의 부부간의 관계 설정이 30년 전 한국을 떠날 때와는 판연히 다른 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 흑인 친구와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기절초풍을

한 쓰라린 경험도 그에게는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지만 말썽이 잦았던 첫 딸이 그에게 준

과제이자 새로운 생활에 대한 면역이었다. 아내와의 이혼은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두

공황상태를 의미하였으므로 그는 인내로 대처할 작정을 하며 남미 여행을 제안한 것이었다.

사실 외국어 대학교 스페인어과를 다닐 때만 해도 그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니, 대학 생활의

첫발부터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먼저 좌절이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스페인어과를 간 것은

아니었다. 욕심을 내었던 영어과를 지망했으나 낙방, 2지망인 스페인어과로 밀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파라과이와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이민을 받아

주면서 스페인어과가 상종가를 쳤다. 당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국을 떠나 너도나도 남미

이민을 꿈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스페인어의 시세가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어를 잘 익혀서 미국으로 가는 것이 당시 젊은이들의 일차적 목표

였으나 가난하고 빽 없고 하다못해 당시의 표현대로라면 "양공주" 누이와의 연고조차 없는

이 땅의 맨주먹 자식들이 미국이라는 천국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기는 힘들었다.

서독 광부나 간호사로 유럽 땅을 밟은 청년들이 불태운 젊은 꿈이 꼭 미국행의 대안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 미국행, 혹은 외국행에 대한 젊은이들의 꿈은 가히

염원에 가까웠다. 그럴 때 하늘이 도왔는지 갑자기 "남미"라는 대안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가 쪽으로 파라과이에 이민을 떠났던 친척들이 농업 이민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여 맨해튼에서 음식 장사로 명맥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한동안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혼돈의 기간 동안에 군대를 갔다가 복학을 천천히 했다. 늦은 복학을 하고나서 그는

스페인 어를 이제 건성으로 하고 영어과에서 주로 청강을 하였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을

접한 것도 그때였다. 헤밍웨이의 단편에는 꿈과 좌절, 기약과 허무가 공존하였다. 단편 속의

주인공, 닉 애덤즈의 고뇌를 자신의 것으로 감정 이입하며 그는 자신이 리얼리스트이자

로맨티시스트임을 발견하였다. 아무튼 외가 사람들이 불법체류자의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불체자 특별 사면령"의 덕택으로 그린카드를 따낸 덕분에 그는 어머니를 따라 20대 후반에

뉴욕으로 건너왔다. 가족들에게 평생 도움이 되지 못하던 아버지는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들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인근에서 처음 노점상을 하다가 밥집인

델리카티슨 점을 꾸려나갔는데, 그는 한동안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야간에는 조리사

과정을 다닌 끝에 마침내 주방장이 되었다.

송정자는 한국에서 그와 갓 결혼한 상태였는데 역시 같은 델리점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경력과 크레딧이 조금 쌓이자 그와 그녀도 외삼촌들이 했던 그대로 본을 받아 모기지를 얻어서

작은 가게를 내었다. 뉴저지 쪽에 사는 한인들이 버스나 페리를 타고 맨해튼으로 건너오면

지나게 되는 길목에다가 그는 "한 델리"라는 간판을 붙이고 샌드위치와 빵과 특히 순대를 팔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특별히 한인들에게는 냄새가 나지 않게 밀봉한 비닐 팩에 김치를 넣어서

팔며 한글로 된 미주 판 H, J. 신문도 갖다 놓아서 고정 고객을 잡았다.

"한 델리" 점이 초창기, 뉴욕에 한인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에는 이런 정책으로 먹고 살만

하였으나 크게 돈을 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시절은 푸에르토리코나 멕시코에서 건너온

히스패닉 인들의 천지로 급변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Han Deli라는 간판을 Khan Deli

바꿔달고 멕시칸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Khan이라는 성씨의 유래는 잘 몰랐지만

유태인이나 히스패닉들에게 이 성씨가 심심찮게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여 원래의 간판에 슬쩍

K자를 하나 더 붙이고 음식도 칠리소스를 잔뜩 쳐서 히스패닉 쪽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정책은 적중하여서 아침부터 점심까지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한익준도 이제는 주방을

벗어나서 판매에만 전념하였다. 주방에는 페드로라는 이름의 히스패닉 주방장을 하나 드리고

젊은 파트타임 여종업원도 하나 더 두었다. 그녀는 불리비아 출신인가 하는 인디오 인상이

많이 묻어나는 역시 히스패닉 계통이었다.

주방장, 페드로는 미남이었고 송정자는 은연중에 그와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한익준은

오래 동안 좁은 가게에서 과로를 하여서 그런지, 나이 탓인지 당뇨가 시작되었고 부부간의

성기능이 급속도로 떨어져서 거의 임포 상태가 되고 있었다. 송정자가 주방에서 새로 고용한

주방장 페드로와 공공연히 애무를 하고 키스를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아들 하나, 딸 하나인

자식들은 한국식 부모의 시각으로 보면 말썽도 많이 부렸으나 보스턴 쪽의 괜찮은 대학으로

들어가더니 방학이 되어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송정자는 원래 외대와 이웃한, 당시만 해도 거친 매너로 유명한 어떤 대학의 체육과 학생으로

그 대학 응원단의 일원이었다. 이른바 치어 리더였던 것이다. 대학가 찻집에서 그가 친구들에게

곧 실현될 미국행을 자랑하고 있을 때에 치어 리더들이 우연히 가까운 데 에 자리해 있었고 그게

인연인지 필연인지 하여간 그날 삼겹살집으로 두 팀이 자리를 옮기며 송정자의 육탄 공격이

있었다.

미국 사회에 관한 거라면 레윈스키와 클린튼의 지퍼 게이트 사건 말고는 그동안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살아온 부부였다. 그저 흑인들의 난동이나 히스패닉들의 시위가 장사에

미치는 영향이나 걱정하고, 비즈니스에 매달려 잘 돌보지 못하는 자식들의 청소년 생활이

그들의 노심초사일 뿐이었다. 부부관계도 표면상으로는 원만하였다. 돈을 벌어 저축하여

가게도 늘리고, 보다 나은 동네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욕망이 다른 모든 욕구, 특별히 부부간의

잠자리 욕구까지도 억제케 하는 생활 덕택인지 아무튼 부부 싸움 같은 것도 오래 동안 없었다.

한익준의 외가 사람들도 다 그렇게들 살고 있어서 그 영향이 컸고 또한 손주들을 키워주는

할머니의 존재도 이런 가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 이 할머니는

세상을 떴다. 클린턴 대통령 때부터는 돈 버는 재미가 솔솔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아이들의 학교

생활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상태가 되었지만 어쨌든 미국 생활은 객지에서의 외로움과

고달픔이 서리서리 끼어있는 나날이었다. 다만 그동안 고국에서 들려온 최루탄 연막에 가득한

데모 소식과 신군부의 비민주적인 행태, 그리고 이어서 들어선 민간 정부의 미덥지 못한 대북

정책과 격렬한 야당의 시도 때도 없는 비판, 매스컴을 통하여서 끊임없이 조성되어 흘러나오는

미국 조야의 동맹국 한국에 대한 안보 우려와 불안감 등은 그들 부부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간주곡이랄까, 때로 럴러비, 그러니까 자장가 같기도 하였다.

특별히 IMF 사태 때에는 다니는 교회에서 일으킨 "고국 돕기 헌금" 대열에서 그들도 자신들의

능력에 조금 과분할 정도의 돈을 기부하였다. 고국에 있는 어떤 특정 인물이라기보다 고국

전체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은근히 경쟁하던 그들이었지만 고국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IMF 당시에는 이미 국적도 바뀐 그들이 애국심 발휘의

차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교의 대상, 적수가 퇴장한 경기장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그런

심사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물론 본능적인 애국심도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헌금 대열에

서 있던 그날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중에서 그들은 이제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집을 사서

옮기기로 작정을 하였다. 아이들이 중등학교 졸업을 바라보는 마당에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좋은 학교, 좋은 동창 관계를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각성과 함께 자신들의 삶도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발생한 흑인 동급생과 딸의 섹스 사건도 동네를 옮기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여보, 나라가 망하게 생겼네요. 우리도 지금 비즈니스가 좋을 때에 집도 좀 큰 걸로 사고

사람답게 삽시다."

그녀는 딸의 탈선은 언급하지 않고 떠나 온 나라를 예로 들었다.

"그래, 내가 허리띠를 너무 졸라매고 살았나---?"

"아이구, 말하면 뭣해요. 허리띠만 조른 게 아니라 당신 지퍼도 너무 잠그고 살아왔어요,

호호호."

사실 송정자는 그 부분도 맨 날 불만이었다. 남편이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잠자리를

줄이고 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남편에 대해서 파악하는 수준은 그

정도일 따름이었다.

"이 나라는 대통령도 풀어재끼는 지퍼를 당신은 왜 맨 날 닫고 지내요?"

말이 나온 김에 그녀는 다그쳤다.

"늦게까지 가게 문 열었다 들어와서 또 새벽 식사 손님 받으려고 일찍 나가다보니 체력을 아껴야

하잖아, 이 사람아. 지퍼 내리는 건 돈 좀 벌고 한가해지면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거야."

"아이구 맙소사. 대학 다닐 때는 청량리, 이문동의 열혈남아라던 사람이 미국 와서는 그 기개가

다 죽으셨구려. 세월이 사람 기다려 줍니까---."

"걱정 마시게. 돈만 많이 벌면 값 비싼 역발산기개세주를 마시던가 하다못해 비아그라를

먹고라도 당신 호강은 시켜줄께."

"하이고, 이 양반이 뭘 모르시는구려. 이제 나이 들면 백약이 무효랍디다. 비아그라니 시알리스니

하는 것도 체력의 기본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약인가 봐요."

"이 사람이 그리 보지 않았는데 매우 음하네. 하하하."

그가 그녀의 잔소리를 잠재우려고 크게 웃었다.

"아이구, 웃음으로 떼우려고 말아요. 이래 뵈도 내가 젊을 때에는 치어리더 몸 짱 아니었수?!

몸매 보고 넋 빠진 청년들 수두룩했다오. 내가 오늘 참고 참다가하는 소리요. 사람이나 국가나

능력이 있을 때에 자신을 찾아먹어야지 세월 지나고 저렇게 고국처럼 망가지고 나면 소용

없어요."

"나라가 왜 망해. 조금 사정이 좋지 않게 된 것이지. 누가 알아. 이것도 미국의 음모인지---."

"아이 참, 난 교회에 나오는 그 무슨 유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르겠고 이제 저금통장도 그만

여미고 풀어재껴서 집도 늘려가고 당신 지퍼도 좀 자주 풀어보시오. 이참에 나 원래 좀 야한

여자라는 거 잊지 마세요."

"이 사람이 오늘 영 망가지네. 한국의 IMF가 미국 교포의 가정을 이렇게도 망가뜨리나. 재수

없게시리---. 나라가 도대체 해준 게 뭐야."

나라를 떠난 건 그들이었건만 만만한 게 홍어 뭐라고 지퍼 자주 열지 않아서 일어난 부부 싸움의

결말에도 IMF 사태로 결딴이 난 조국은 크게 기여를 하여서 그가 소리를 지르며 떠나온 나라

욕을 하자 차안의 논쟁은 일단 끝이 났다. 하지만 결국 그도 집을 늘리자는 아내의 방침에는

순순히 따랐다. 다만 지퍼를 자주 열라는 아내의 성화에는 지폐를 더 모아야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고집을 끌고나갔다. 아무래도 그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돈이 아까워 병원

출입도 하지 않고 건강 보험에도 들지 않은 억척스런 남정네는 그때 이미 당뇨에 협심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여보!"

갑자기 송정자가 비행기 옆 좌석의 한익준을 흔들어 깨웠다. 한 시간 반 이상을 JFK 공항에서

연발한 브라질 여객기 "(TAM)을 타고 부부가 예닐곱 시간을 날아갔을까---. 한익준이 조금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송정자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이요? 비행기가 추락이라도 하나?"

한익준이 신경질적으로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헤밍웨이 단편을 심심하면 읽으라고 해서 아까부터 읽다보니 여기 '프랜시스 맥커머의

짧고 행복했던 생애'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네요."

"아니 그런 이야기하려고 자는 사람을 깨웠어?"

", 읽다보니 기분이 나빠요."

"뭐 찔리는 게 있나보네?"

"당신이 이 단편을 일부러 읽으라고 넣어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요. 내가 여기 나오는 여자

같다는 말이잖아요?"

'프랜시스 매커머의 짧고 행복했던 생애'라는 조금 긴 단편의 이야기에는 구태여 말하자면

송정자 같은 여주인공이 등장하였다. 이 작품에 나오는 중년남자 맥커머와 그의 부인 마가렛은

결혼 한지 11년째이다. 젊어서의 맥커머는 힘차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몸이 나면서 매사에 우유부단해지고 게으르고 용기를 잃게 되었다.

한편 아름다운 부인 마가렛도 한때는 최상의 광고 모델 제안까지 들어오는 처지였으나,이제는

세월과 더불어 초로에 접어들고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남편의

무기력함을 혐오하는 입장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런 모든 생활의 앙금을 씻어내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일은 처음부터 잘 풀리지 않아서 첫 번째인

사자 사냥에서 맥커머는 오금이 저려 안전장치도 풀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는가 하면 토끼처럼

도망을 쳤고 정작 사자를 잡은 사람은 사파리 안내인인 윌슨이었다.

윌슨과 현지 흑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처지이기에 이 사실을 비밀로 하여 가십 꺼리를 만들지

않고 맥커머에게 그날 사냥의 공을 돌리지만 그들의 시선은 따가웠으며 특히 마가렛은 남편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이다. 그날 밤 마가렛은 공공연히 윌슨의 텐트로 찾아가서 정사를 나누며

남편의 힐난도 무시한다.

다음날 맥커머는 차츰 사냥의 감각과 용기를 되찾아가면서 숫양을 단 한방으로 보기 좋게

맞춘다. 안내인 윌슨은 이제 물소 사냥을 하도록 사파리 계획을 짠다. 눈치 빠른 그는 마가렛이

무서운 여자라고 첫눈에 판단한다. 한편 물소 사냥을 시작하던 날, 맥커머는 과거의 용기와

패기를 거의 모두 회복하게 되었고 이에 걸맞게 조준과 사격도 예전처럼 아주 정확하게 회복

되었다. 이러한 모습에 윌슨도 전문가적인 직업의식을 발휘하여 열심히 돕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맥커머의 주도로 우선 급속히 달려드는 물소 한 마리를 쏘아 쓰러뜨린다.

이어서 다른 두 마리도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쏘아 잡고 맥커머는 마지막

숨통을 끊는 사격도 동요 없이 해낸다.

이 위험한 사냥의 과정에서 마가렛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잔뜩 겁을 먹는다. 이때 보조원이 와서

첫 번째 물소가 총을 맞은 채로 숲으로 들어갔음을 알린다. 사실 이런 상태에 빠진 물소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그러나 맥커머는 위험한 사냥감이 생겨서 오히려 유쾌하다는 반응이다.

이러한 용기 있는 모습에 윌슨도 깊은 호감을 느낀다. 마침내 다친 물소를 발견하고 최후의

근접사격을 할 때 맥커머의 아내 마가렛은 뒤에서 남편의 두개골을 쏘아버린다. 용기를 되찾은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일까, 윌슨이 무조건 좋아서일까, 아무튼 남편 위에

군림했던 마가렛으로서는 다시 자기를 지배하려는 남편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맥커머의 입장에서 보면 용기를 되찾은 사파리 여행으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했다고

보아서 진정 짧지만 행복했던 생애를 회복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다의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잠시 눈을 부치고 있는 남편을 이렇게 흔들어 깨우는걸 보면 당신이 작품 속의 마가렛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구만."

한익준이 혀를 찼다.

"아니, 내용이 이렇게 전개되는데 어떻게 참고만 있겠어요. 너무 잔인해요. 그리고 이제 한두

시간 있으면 착륙시간이고 내리기 전에 간식이 또 나온다니까 이제 잠에서 깨는 게 좋겠어요."

"아이구,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군---."

두 사람은 또 티격태격했으나 송정자는 싸움이든 뭐든 두 사람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일

만이라도 다행이다 싶었다. 비행기는 마침내 남미에서도 첫 기착지인 '사웅파울로'에 도착하였다.

남미 여행은 일단 여행사와 연계를 시켜놓아서 중간 기착지에 도달할 때마다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게 되어 있었다. 만약 가이드가 필요 없으면 하루 전에 전화나 이메일로 취소를 하면 안내인

없이 두 사람만의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비행기 예약은 미국에서 미리 다 되어있어서 시간을

바꾸지 않는 한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사웅파울로에는 젊은 청년이 가이드로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시간은 바로 아침 해가

뜨는 순간이었다. 더운 남국의 열기가 침체된 한익준의 기분을 고조시켜 주었다. 스페인어와

이 곳 공용어인 포르투갈 어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오랜만에 라틴 문화의 바다에 풍덩 빠진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한 역사적 유적이 부족한 이 상업 도시는 남미의 관문이자 한국

교민들이 집거하는 곳으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몇 군데 시내 구경을 하고 그들은 코리아

타운을 기대에 차서 찾아보았다. 하지만 한인 거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초라하고 규모가 작았다.

한익준은 자신도 자칫했으면 이 동네로 올 뻔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오한이 났다.

"브라질 교민들이 고생을 많이 하는군요. 동네에 활력이 없어요. 동포끼리 불쌍하게 보이네요."

별로 불쌍하다는 표정도 없이 주절주절 송정자가 말했다.

"너무 동정하지는 마세요. 이곳이 이렇게 보여도 알부자들이 많답니다. 미국처럼 한인들이 떼를

지어 살지 않고 또 넉넉한 표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불쌍한 사람들은 별로 없답니다.

또 장사의 대상이 브라질 사람이어서 한글 간판 크게 내걸지 않고 사는 편이구요. 가끔 한국에서

도망 온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 있지요. 여기는 한국과 비자 면제 관계라서 오갈 데

없이 나쁜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흘러들어온답니다."

가이드가 좀 기분 나쁜 얼굴로 변명인지 설명을 했다.

"여보시오, 가이드 선생! 이 아주머니 말씀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이 사람은 항상 목에 힘이

들어가는 맛에 사니까. , 목에 힘준다는 내 말 이해하실라나---?"

한익준이 아내의 목에 올라온 힘을 좀 꺾으며 참견하였다.

"사장님도 미국 국적이시라면서 한국말 잘 하시네요. 저도 요즈음 고국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서울식 말솜씨 빠삭 합니다요---, 하하하."

가이드의 표정이 순식간에 많이 펴졌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온다구요? 그 먼데에서---."

송정자는 남편의 어깃장 놓는 말은 상대도 않고 얼른 관심이 고국의 관광객 사정으로 옮아갔다.

"그럼요. 21일 일정의 패키지 투어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겁이 날 정도라니까요. 이러다가 고국이

IMF 맞는 거나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고국이 끝까지 잘 나가줘야지 지구 끝에 와있는 우리도

살기가 편한데---."

그건 맞는 말이오. 서로가 다 잘되어야지---. 그건 그런데 한국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온다면서

우리 두 사람만 상대하니까 좀 손해 아닌가요?"

걱정 놓으십시오. 여기 가이드 연합에서 돌아가면서 순번제로 하니까 어차피 제 차례이고

괜찮습니다. 또 지금 한국이 다시 조금 불황인가 합니다. 땅값 보상인가 하는 걸 받은 사람들이나

들어오지 요즈음 관광객들이 많이 줄었어요. 사실은 중국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들어옵니다.

우리보다 열배는 더 들어 올걸요---."

이윽고 저녁 시간이 돌아와서 두 사람은 호텔로 향했다.

"상파울로에 보실 것도 변변치 않지만 미국 여행사에서 보낸 팩스를 보니까 내일 새벽에

떠나시는 일정이더라구요. 너무 바쁜 걸음 아니신가요? 아니면 전에 여기 왔다가셨거나---."

"아니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막 돌아다니는 관광은 못하겠고 재미도 없어서 이과수폭포나

가보고 곧장 아마존에 들어가서 며칠 쉬다가 뉴욕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뉴욕이 춥잖아요. 뉴욕

추위에 골병이 들어서 아마존에서 좀 원기를 차려서 가려구요."

", 참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 한인들도 관광 개념을 좀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증명사진만

찍으러 다니지 말고 휴양을 하셔야지요."

가이드가 반색을 하였다.

"아이구, 나는 반대라요. 우리가 무슨 관광을 많이 다녔다고---. 나이아가라하고 그랜드 캐년

한번 다녀온 것뿐이라구요. 요세미테도 옐로우스톤도 못 가봤는데 휴양이 무슨 휴양입니까.

유명한 곳으로 막 돌아다니며 사진 좀 팍팍 찍어 가서 자랑도 해야 하는데 비싼 돈 들여 남미까지

 와서 너무 억울해요, 억울해!"

"이 보시게, 요즈음 관광 사진 누가 봐주기나 하던가. 우리도 남들이 관광 갔다 온 이야기 꺼내면

질려버리잖아---."

"그럼 다음에는 교회에서 하는 중동의 성지순례에는 꼭 따라가요. 갔다 온 사람들이 성지 이야기

하니 교인들이 그건 외면하지 못합디다. 호호호."

"걱정 마시게. 우리도 리오데 자네이루에 가서 저 거대한 예수님 상도 보고 코파카바나 해변도

눈요기는 할테니까---."

가이드는 하루 일당을 받아서 갔고 두 사람은 호텔 인근에서 현지 식으로 저녁을 하였다. 브라질

산의 테이블 와인도 송정자가 시켜서 한잔씩 하였다. 와인 한잔에 그녀의 눈이 정감을 품으며

풀리더니 고즈넉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일 새벽 비행기로 리우데자네이루로 가서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님 상을 보고 무슨 슈가르프

산이라던가 빵 모양의 산에도 올라가보고 그럴 일정이 잡혀있으니 오늘 나를 피곤 하게할 생각은

말게."

한익준이 그녀의 풀어진 눈꺼풀에 질겁을 하며 자리까지 띄우는 시늉을 하였다.

"잠자리가 바뀌면 그것도 바뀐다는 침대 선전 CF도 있습디다. 도대체 여행은 왜 오자고

했어요?"

"일단은 뉴욕의 추위를 피하려는 목적이었어. 추위에 더 시달리면 내가 죽을 것 같았지. 이제

와서 이야기이지만 얼마 전 우리 교회 장로이신 심장병 전문의, 정 박사 클리닉에 다른 일로

들렀다가 심장 체크를 하였더니 우선 부정맥이 심하다는 거야."

"부정맥이 뭔데요?"

"주로 심근경색에서 오는 건데---, 아니 설명해봐야 잘 모를 것이고 하여간 심장마비로 급사할

수도 있다는 증세라네. 추위가 금물이고---. 겨울에 노인들 부고장이 많이 날아오잖아. 그리고

요즈음 내 마음이 정말 편치 않아. 왜 그런지는 당신이 더 잘 알텐데---. 페드로 이야기를 내가

입에 담아야겠어? 하여간 그래서 이래저래 일단 뉴욕을 좀 떠나보자, 그런 생각이었으니까 내

몸과 마음이 정상을 찾을 때까지 다른 수작은 말게. 나를 시도 때도 없이 흥분시켰다가는 당신

과부되는 거야."

"내가 당신 같은 목석을 언제 흥분시켰다는 거예요?"

"착각이나 오해는 말게. 나를 남자로 흥분시켰다는 게 아니라 페드로 같은 젊은 아이를 내 앞에서

껴안고 돈 행동 말이야. 내가 당신에게 잘 해주지 못하는 건 미안해. 또 당신의 그런 행동이 단지

나를 성적으로 충동질 시키려는 가벼운 제스추어 인줄도 알고 있어. 하지만 눈으로 그런 걸

보면서 나는 쓰러질 번했어."

한익준은 자신의 몸이 적지 않게 고장이 났고 마음도 황폐해진 이야기를 이제야 겨우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부부 사이에 벌써 나누었어야했을 이야기들을 그동안 나누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대체로 그의 성격 탓이었겠지만 일상의 과로가 그런 대화를 나눌 시간적, 심적 여유를 빼앗아 간

탓도 컸다. 그리고 한익준의 입장에서 보면 침묵이야말로 송정자의 다변과 지나친 욕구를 누르는

손쉬운 대처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다변에 맞서서 그도 처음에는 말로써 그녀를 제압해

보려했으나 결국 손을 들고, 가장 소극적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묵언의 정책을 채택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런 방식이 사태를 해결하기는커녕 바루기 힘든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런 걸

체계적으로 인식하기에는 이국에서의 생활이 너무나 각박하여서 서로 경황과 요령들이 없었다

 송정자는 무언가 남편의 말에 대꾸를 하려다가 페드로 이야기에 찔끔했고 또 생각 보다는

여행지가 늘어나 있어서 입을 다물고 트윈 베드의 한쪽을 차지하여 몸을 눕히고 말았다.

이튿날의 리우데 자네이로나 그 다음날의 이과수폭포 일정도 두 사람은 그럭저럭 잘 소화를

하였다. 특히 이과수폭포에서는 장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원한 관계는 한갓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경지도 맛보았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덕분인지 하필이면 송정자가 전화로 맨해튼의

페드로를 불렀다. 아마도 남편과의 해빙 무드를 이 감격의 순간에 완전하게 완성하여 기정사실로

굳히기 위한 작전인듯 하였다. 말하자면 페드로를 불러 남편이 듣는 데에서 무슨 단호한 말을

하려는 수준 낮은 꾀가 그녀에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다운 발상법이자 아주 모자라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악마의 속삭임이 그 순간, 속이 얕고 귀가 넓은 그녀에게 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쪽 시간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하오의 짧은 한가로움이 일상으로 넘실대는

그런 때였다.

일은 당연하게 또 묘하게 꼬이며 돌아갔다. 맨해튼의 델리 가게에 있는 페드로에게 전화를

갑자기 거는 그녀의 태도에 우선 한익준의 기분이 몹씨 상했다. 그런데 페드로의 휴대폰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당사자가 아니라 새로 들여놓은 히스패닉 처녀였다. 로밍 한 전화의 발신자

번호가 복잡하여서 그랬는지 무심결에 그랬는지 하여간 페드로의 전화를 도리아라는 그녀가

받았다.

"네가 왜 이 전화를 받어?"

대충 그런 뜻을 송정자가 스페인어로 소리쳤다. 상대방이 우물쭈물 하는듯했다.

"페드로 바꿔!"

그녀가 또 소리를 질렀다. 한참 부시럭거리는 품새가 지나고 페드로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히스테리컬 하게 악다구니를 썼고 한익준은 폭포를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나갔다.

해빙은커녕 그의 가슴에 빙산이 들어와 박히는 듯 하였다. 마침 그 전날과 이날은 가이드를

부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차라리 가이드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다.

"여보, 미안해요."

어느새 송정자가 어깨 뒤로 다가와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미안하니 뭐니 하는 그런 소리 자체가 기분 나빠. 내 귀에 대고 말하지 말고 떨어져서 말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취소하고 바로 아마존 밀림으로나 가자."

한익준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이쪽 여행사의 에이전트를 부르며 말했다.

"아이, 거기 아르헨티나에 들렀다가 가요. 내 진심을 몰라주고---. 당신한테 잘 하려고

그랬는데."

송정자가 칭얼대었으나 이미 한익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머리속에 입력되었던

이과수폭포의 장관은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그들은 호텔로 돌아와서 짐을 쌌다. 다음날 새벽

마나우스 행 비행기 표는 어렵지 않게 연결이 되었다. 바로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국제공항이 있는 도시였다.

"난 아마존 안 들어가요. 바로 뉴욕으로 갈래요."

"그렇게 하지 뭐. 비행기 표 바꿔줄까?"

송정자가 앙탈을 부렸으나 결국은 동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나우스는 자정에 도착되었다.

나이가 든 한국인 가이드가 그 오밤중에 공항에 나와 있었다.

"뉴욕에서 오셨지요?"

흰 수염을 휘날리며 그가 물었다.

"아니요. 이과수에서 왔는데요---."

송정자가 물색없이 대답하였다.

"하하하, 그럼 이과수폭포에서 사신다는 말씀인가요?"

"아뇨. 거기 구경하고 왔다는 말이예요."

", 잘난 자식을 두셔서 서울에서 아들 만나러 뉴욕에 왔다가 며느리한테 여행비 받고 이리로

유배 오신 분들 아니세요? 하하하."

가이드가 보통이 아니었다.

", 영감님. 무슨 말씀이신지 알만한데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미국 시민권자들입니다.

내 돈으로 여행 왔어요. 아직 아들 덕 볼 나이도 아니고---."

한익준이 나섰다.

"아니 여보, 이 분이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송정자가 그때 까지도 말귀를 못알아 듣고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요즈음 서울에서 미국에 잘난 자식 보러왔다가 남미로 유배받고 와서 한 참 쉬시다가 가시는

분들 참 많으십니다. 효도관광이라면서요, 하하하."

나이 든 가이드가 그녀에게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우린 아니예요. 미국 사람이예요, 미국 사람! 아메리칸 시티즌~."

송정자가 그제서야 기겁을 하고 미국 시민을 강조하며 설명하였다. 그녀의 진면목이 들어나는

부분이었다. 가이드가 몰고 온 밴을 타고 그들은 마나우스 최고의 호텔로 달려갔다. 20층에

자리잡은 객실은 럭셔리한 가구와 삼성 전자에서 나온 TV가 두 사람의 감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으나 한익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 여보! 밤중인데도 저기 아마존 강 좀 보세요, 바다 같아요."

아내가 호들갑을 떨며 더블베드로 들어가도 남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TV만 이리저리 돌려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내일 아침, 아니 벌써 오늘이 되었네. 그 영감이 일찍 온다고 했지. 그러니 일찍 자."

"그러는 당신은 뭘 해요?"

"날씨도 보고 지리도 익혀두어야지."

"그렇게 조사하고 준비하려면 가이드 영감은 왜 붙이고 왜 일찍 오라고 하였어요?"

"당신 행동이 어처구니 없어서 사람을 불렀어. 다른 사람이라도 없으면 내 행동 나도 몰라.

하여간 그러니까 어서 자고 일찍 일어나라구."

짜증과 원한 같은 심정이 가득하여 아내를 빨리 자라고 채근하였지만 그도 할 수없이 자리에

들었다. 아내가 부시럭대며 그에게 접근하였으나 그는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는 시늉을

해 보았다. 하지만 비행기에서의 낮잠과 커피로, 아니 이과수 폭포에서의 아내의 도저히 이해

못할 행동으로 말미암은 증오와 혐오감 때문에 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부 모두가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바다 같은 아마존 강 너머로 태양이 뜨고 이른 아침이 찾아

오자 두 사람은 서둘러 로비로 내려갔다. 가이드 영감은 벌써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두 사람을

안내하여 호텔 부페 식당으로 함께 들어갔다. 바로 옆으로 아마존 강이 정말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있는 전망 좋은 식당이었다.

"우선 저 강을 건너서 아마존의 내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이드 영감이 강을 가리키며 설명하였다. 그들을 태우고 갈 작은 승용차는 브라질 아가씨가

운전대를 잡고 호텔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현지 관광 회사의 직원 겸 운전기사라고 했다.

"한국에 가보는 게 꿈입니다."

한국말이 아주 유창하였다. 물을 들였는지 아주 노랑머리의 글래머같은 아가씨는 까만 눈동자에

정말 꿈을 가득 담고서 그들을 환영하였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꿈만 가득한듯한 눈동자의

그녀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을 한익준은 하였다. 새로 지은 최고의 호텔 주변에는 일류 주택들과

아파트가 서 있었지만 배를 타러가는 선창가까지의 길가에는 가난이 주렁주렁 달린 집들이

엉거주춤 서 있는 꼴이었다.

"애들 할머니 살아계셔서 함께 오셨으면 또 보릿고개 시절 이야기 한참하시겠네---."

송정자가 남편을 보고 말했으나 그는 굳은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보릿고개를 아시는 세대이지요?"

안내 영감님이 갑자기 신명이 나서 자신의 예전 경험과 이곳에 와서 제2의 인생을 원없이 산다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알고 보니 두 분은 참 행복하시군요. 도대체 아마존에 오신 한국 분들치고 여기에 하루를 묵는

경우가 드물어요. 증명사진 찍다시피 아마존 밀림이나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박고는 그냥

달아나다시피 하거든요. 그런데 삼박사일을 묵으며 낚시까지 하실 일정이라니 대단하십니다."

", 그럼요. 우린 아이들 돈 받고 유배 받아온 부모가 아니라니까요."

송정자가 다시 자신들의 신분을 목에 힘을 주어 상기시켰다.

", 그럼요. 아메리칸 시티즌---, 하하하."

가이드가 호방하게 웃었다.

매연이 심한 페리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멈칫거리다가 마침내 마지막 손님인양

그들 네 사람과 빨간 승용차를 삼키더니 느릿느릿 떠났다.

"페리에 똥차들이 많지요?"

가이드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마나우스와 아마존 주에 대하여 설명을 했으나 한익준의

귀에는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마침내 밀림 속의 호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텔에서 나온 쪽배를 타고 그 곳으로

들어가는데 비가 많이 오면 호텔 현관까지 가고 요즘처럼 비가 덜한 때에는 한참 아래쪽에 배가

닿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많이 걸어 올라가야 한답니다."

가이드는 신이 나서 설명을 했고 송정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한익준은 뼛속

까지 들어찬 냉기를 더운 날씨가 녹여내는 것만도 다행인 듯싶었다. 사실 그는 어제 아내의

전화로 일어난 충격으로 밤잠을 설친데다가 이곳으로 오는 무리한 여정 때문에 심한 부정맥

현상을 느끼며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호텔로부터 쪽배를 저어서 나온 사람은 젊은 브라질

청년이었다. 미남에 딱 바라진 어깨를 하였으나 상냥한 미소를 입에 달고 순한 눈빛으로 선한

용모를 소유한 젊은이였다.

"헬로우, 웰컴 투 아우어 방갈로우 호텔, 미스터 앤드 미세스 한! 마이 네임 이즈 올란도."

그가 아주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두 사람을 환영하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따라온 가이드에게도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가이드는 올란도 청년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이 녀석과 또 나중에 인디오 마을에 갔을 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팁을 따로 먼저 주시지 말고

제 말에 따라서 여기 돈, 레알로 주십시오."

"달러를 그냥 쓰려고 레알로 바꾸지 않았는데요?"

"제가 조금 바꿔 드리지요. 하여간 저와는 달러로 계산하고 얘들하고는 레알로 하세요."

가이드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안내를 하는 셈이었지만 그가 금전적으로 너무 각박하게 일을 처리

하는 바람에 한익준과 특히 송정자는 답답하고 때로 괴로움이 컸다. 그러나 후한 팁을 주거나

달러로 계산하는 방식은 다음번에 오는 한인관광객들의 비용 지출과 편의를 생각해서 삼가해

달라는 그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쪽배를 저어서 온 청년은 알고보니 두

관광객을 모실 책임이 있는 "담당"이었다.

점심이 끝난 다음에는 인디오 마을을 다녀오는 스케줄이 있었다. 그들은 일단 꽤 먼 거리를

올란도의 쪽배를 타고 가서 다시 긴 밀림 속을 걸어서 나아갔다. 한익준은 기분도 그렇고 힘도

딸려서 맨 뒤로 혼자 쳐졌다. 업친데덥친 격인지 공연히 무릎 관절까지 아파서 그는 절름발이

같은 신세가 되었다.

반면에 송정자는 올란도와 맨 앞에 서서 무언가 신나게 떠들고 웃으며 빨리 걸어갔다. 청년의

유창한 영어가 밀림 사이로 울려 퍼지며 맨 뒤로도 들려왔다. 가이드 영감은 엉거주춤 그

중간에서 앞뒤를 재며 걸어갔다. 밀림 속을 한 참 걸어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고목이 나오고

기골이 장대하고 험악한 얼굴에 검정과 빨강으로 이리저리 색칠을 한 인디오가 무어라고

올란도에게 인사 겸 요청 하는 시늉을 지었다. 올란도가 그 시늉에 무어라 답을 하니까 인디오가

씩 웃으며 사슴 뿔 같은 걸로 밀림 속에다 길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보낸 후, 거대한 몽둥이를

어디에서인가 찾아 들고는 그 곳에 있는 역시 거대한 고목을 두어번 쾅쾅쳤다. 이윽고 인디오는

씨익 웃으며 한익준에게 몽둥이를 건네주고 나무를 쳐보라는 시늉을 보냈다.

"저 친구는 동네 입구를 지키는 인디오 전사입니다. 시키는대로 하세요."

가이드가 설명하였다.

한익준이 내키지 않은 자세로 몽둥이를 들어보니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 돌 몽둥이처럼 무거웠다.

그걸로 나무를 치니 나무는 꿈쩍도 않고 치는 사람의 몸만 사시나무 떨 듯 흔들렸는데, 그래도

얼마간은 나무에서 무슨 소리가 울리며 어떤 전달음이 생기는듯 하였다. 어쨌거나 그 울림과

함께 한익준의 심장에 심한 동계가 오고 부정맥이 마구 출렁이며 가슴에서 울렁거리는 줄은

당사자 밖에 몰랐다. 그는 어지럼증과 가슴의 압박감으로 토하거나 쓸어질 것 같았으나 내색

않고 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올란도가 몽둥이를 받아들고 나무를 내리쳤다. 소리가 훨씬 크게 울려퍼지고

고목이 흔들리는 듯하였다. 두 사람의 차이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는데 송정자의 소리가

가장 높고 크게 울려퍼졌다. 한참을 웃더니 그녀도 내려놓은 몽둥이를 들려고 낑낑대었는데 얼른

올란도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서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장대한

모양의 그 인디오 전사가 무슨 주술을 읊으며 올란도와 송정자 두 남녀를 함께 세우더니 칡넝쿨

같은 것으로 몸을 얽어매었다.

"저게 뭐요?"

한익준이 마구 울렁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하하하, 이 밀림 법칙으로는 한 쌍의 부부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의식같지만 다 장난이지요."

그러나 두 남녀는 장난이기에는 도가 지나치게 서로 껴안고 볼을 부비며 이마를 맞대는 시늉도

하였다. 이제 그들이 다시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서 당도한 인디오 마을은 방문객들을 맞을

준비를 미리 다 해놓고 있었다. 먼저 원숭이 해골이 주렁주렁 벽에 걸린 약방겸 진료소에서 어떤

여자 샤먼, 그러니까 여자 무당이 무언가 더러운 것을 닦아내는 의식을 치루었다.

"영감님, 여기가 무슨 약방 같은 곳이라구요? 지금 제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고 내리누르는듯한데,

약이 없을까요?"

한익준이 정말 심장에 압박이 오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골치가 아파서 헐떡거리며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아이구, 여기에서 뭘 먹었다 큰일 나게요. 호텔에 가서 심장 약 상비약을 드릴게요. 조금만 참아

보세요."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렸다. 그들은 곧 동네 한복판에 있는 짚으로 이은 공회당 같은

데로 들어갔다. 인디오 어린 처녀들이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전통 옷을 입고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춤을 추었다. 북과 징같은 것을 치는 사람은 어른들이었다. 그 옆에서 아까 그

무당이 긴 담뱃대로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다.

"헤밍웨이 단편에 나오는 인디언 캠프라는 게 생각나네. 거기에도 저렇게 담배 피우는 의식이

나오지---."

한익준이 누구라 대상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이구, 헤밍웨이와 인디언 캠프를 아시는군요. 저도 예전에 책께나 읽었지요."

가이드 영감이 반색을 하며 한익준의 혼잣말을 받았다.

", 영감님도 대단하시군요. 사실 아까 아마존을 건널 때에는 헤밍웨이의 강을 건너 숲으로---

라는 장편도 생각이 났지요. 그건 결국 실패작으로 끝난 인기 없는 작품이었지만요---.

거기에 나오는 나이든 2차 대전의 지휘관은 추억의 유럽 전선을 종전 후에 다시 찾아가는데,

결국 심장 발작으로 젊은 여인의 품속에서 쓰러지고 말지요."

한익준이 숨을 헐떡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느 대목에서 한 옥타브만 높여도 당장 그의

심장이 멎을 듯싶은 상태였다.

"저는 그것까지는 못 읽어보았지만 하여간 헤밍웨이는 좋아해요."

헤밍웨이에 대한 가이드의 지식이 한계에 도달하는구나 싶었지만 한익준은 그 정도의 화답에도

위안이 컸다.

"오늘 일정은 여기에서 빨리 끝내야겠네요."

가이드가 그의 헐떡이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인디오 무당에게 가이드는 레알 화 지폐로 몇푼을

집어주고는 정산은 돌아가서 하자고 했다. 한익준이 몇 달러를 더 주려고 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제지하였는데 송정자가 슬그머니 올란도에게 달러를 집어주는 것은 어쩔수 없는지

모른 체 했다. 모두 네 사람이 마을에서 나오자 아까 안내하였던 인디오 전사가 몽둥이와 고목

나무가 있는 데에 까지 배웅을 나왔다.

한익준이 숨을 헐떡이며 맨 끝으로 따라온 것은 물론이었다. 돌아온 방갈로우 호텔에서 한익준은

가이드가 건네준 심장 약을 조금 먹었다. 가이드를 하는 영감도 심장이 약하고 혈압이 높았지만

적절하게 매일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건강을 잘 지탱해 나가고 있다고 하면서 한익준을 다소

꾸짖는 듯한 투로 말을 하였다.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나이가 차서 메디케이드 혜택을 받는데

무슨 의료 보험이고 건강관리냐고 평소 돈만 생각해 온 한익준에게 정말 후회가 이과수 폭포수

처럼 밀려왔다. 어쨌든 약의 효험이 탁월해서인지 기분 때문인지 그는 평소와 달리 불면증에

시달리지도 않고 잠이 일찍 편안하게 찾아왔다. 에어컨과 천정의 실링팬이 돌아가는 소리도

수면 방해는커녕 자장가처럼 들려서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열대조들의 지저귐을 듣고서야 잠이 깨었다. 이날은 아마존 강의 본류를

일단 돌아본 다음에 지류로 들어가서 몇 군데를 살피다가 물고기가 많이 잡힐듯한 곳에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아마존은 거대한 물줄기가 세 군데로부터 들어와서 다양하고도 경이적인 특징과 색갈을 본류에

이입시켜 그 위에 배를 띄운 사람의 시야에서는 매 순간이 흐르는 바다처럼 보였으나 이 모든

장관을 한익준이 잘 감상할 처지는 아니었다. 특히 이날은 아침 일찍부터 부정맥이 유난히도

요란하게 그의 가슴을 시도 때도 없이 울렁거리게 하여서 그는 모터 보트 위에 반쯤 누운

상태로 주로 하늘만 쳐다보며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마존 뱃놀이에 유감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거대한 아마존을 대략 거시적으로 탐방한 연후에 점심은 수상 식당에서 간단히 때우고

물고기를 낚아 올릴 차례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올란도의 자신만만한 제안으로 두어군데 낚시

포인트를 잡았으나 물고기들은 현지의 베테란에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쇠고기를

큼직큼직하게 매단 낚시대를 우롱할 뿐이었다.

"할 수 없다. 똥 먹은 고기라도 잡으러가자."

가이드가 외치자 올란도가 모터보트에 엔진을 다시 걸어서 좁은 수로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아갔다. 아무래도 ""이라는 발음을 얼른 알아채고 그는 다음 단계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올란드의 감각이 그 정도로 날카로웠다. 이윽고 그들은 인디오의 허름한 수상 가옥 옆에다가

배를 대었다. 늙은 노파와 조금 젊은 통통한 여인네, 그리고 조무래기 아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집안의 남정네는 시장에 생활필수품을 사러 쪽배를 저어나갔다고 했는데 그들이

오고 나서 이내 들어왔으나 이 무단 칩입자들을 오히려 반기는 게면쩍은 웃음을 띄울

따름이었다. 아무튼 아무런 양해도 필요 없이 그들은 갖고간 큼지막한 쇠고기 미끼들을 끼어서

낚시를 드리웠다.

"잡았다!"

제일 먼져 소리를 지른 것은 송정자였다. 과연 손박닥 두개를 합친 듯한 크기에 아가미 근처가

붉은 흉측한 물고기를 그녀는 낚싯대에 매달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삐라냐! 테이크 케어!"

올란도가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삐라냐를 잡으면 섯불리 손을 대지 말고

올란도나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낚시 바늘에서 물고기의 아가미를 빼라는 당부를 두사람은

미리 받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배의 바닥에서 삐라냐가 펄쩍펄쩍 튀어 오르더라도 극히

조심하라는 경고도 받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살쩜을 뜯긴다는 것이었다.

"역시 송 여사가 최고네. 내 가이드 생활에 이렇게 큰 삐라냐는 처음이네요."

가이드가 솔직하게 놀라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월척은 물론이고 대어 상 깜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이드도 삐라냐 몇 마리는 이내 건져 올렸다. 한익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건져 올리지 못하였다. 아니 물고기는커녕 수상 가옥이 물살에 기우뚱 거릴 때마다

구역질이 자꾸 속에서 올라왔다.

"나도 한 마리는 건져 올려야겠지---."

인디고 블루 색갈의 헐렁한 트렁크 팬츠를 입은 그가 혼자 중얼거리며 아내가 있는 쪽으로 긴

낚싯대를 들고 뒤뚱거리며 발을 옮겼다.

", 마이 갓!"

그런 소리가 동시에 여러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수상가옥의 옆에 달린 베란다 역할의 나무

둥치 위를 이리저리 딛으며 뒤뚱거려 나아가자 나무가 빙글 돌았고 그는 순식간에 강 물

속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으아악!"

그는 형형색색으로 뒤엉킨 아마존 강물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고 물을 먹어서 지르는 비명

이상의 절규를 지상의 관람자들에게 순식간에 내보냈다. 용맹함 같아서는 올란도가 얼른 뛰어

들어갔을 테지만, 문제는 역시 식육어 삐라냐였다. 수상 가옥 옆에 매달아놓은, 갖고 온

모터보트로 달려간 그가 엔진을 걸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익준에게로 달려간 시간은

빨라야 5분이었다. 그 사이에 한익준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명은 다 질러댔다. 올란도가

그를 수상 가옥으로 다시 끄집어 올려놓았을 때에는 인디고 블루 색갈의 헐렁한 트렁크 팬츠

사이로 진홍빛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삐라냐들이 페니스를 물어뜯었어요!"

올란도가 소리쳤다.

"아이구 맙소사, 여보 정신 차리세요! 죽지 말어요!"

송정자가 그의 가슴을 쾅쾅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여자 좀 말려! 그만 쳐! 내가 이 여자 때문에 죽겠네. 안 그래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한익준이 소리를 질렀다.

"이 양반이 엄살이구나. 소리 지르는 것으로 봐서는 죽지는 않겠네."

송정자가 문득 희망이 살아난 듯이 몸을 일으키고는 그를 빤히 보았다.

"엄살이라니! 내 물건이 다 뜯겨서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도 엄살이야? 내가 이 여자 때문에

명대로 못 살겠다. 아이구 이 여자 좀 말려!"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농담을 끼워넣고자 하였으나 정작 아픈 곳은 페니스 쪽의 피가

흐르는 곳이 아니라 심장 쪽이어서 그의 가슴은 집채만큼 무거운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여간 피가 나오는 부분은 지혈을 하고 테라마이신 연고를 바릅시다. 그 곳에는 부인이

직접 발라야지 도리가 없소이다. 전에 한번은 삐라냐들이 물건을 다 뜯어먹은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그보다는 양호하네요. "

가이드는 갖고 온 구급약 상자를 열며 송정자에게 말을 이어갔다.

"송 여사! 잘 바르고 압박 붕대로 지혈을 잘 하세요. 안 그러면 살아도 못살아요."

"영감님, 이 판에 농담이 나오세요?"

송정자가 발끈했다.

"아니, 이 바닥에서는 자주 나오는 말이랍니다. 여기에서 삐라냐가 뜯어먹어 봐요, 살아도

못살지!"

"이 능구렁이 영감님 때문에 내가 못살아!"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하게 하시오. 나는 아직 멀쩡합니다. 여자들이 아직은 나하고

살만하지요. 그리고 이 양반, 한 사장님도 지금 보니 많이 찢겨나갔지만 쓸 만합니다. 사실

꿀벌들에게 봉침 맞으면 약효가 있듯이 전립선 비대증 같은 증상이 있는 분은 이곳에서

삐라냐에게 뜯기고 나면 효과가 있다네요. 어서 돌아가서 안정을 취하도록 합시다. 이 양반이

심장이 약해요. 그게 겁나지 않아요?"

"몰라요, 나는 이미 살아도 못살고 있어요!"

사고라고 한다면 큰 사고가 났으나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사고가 나지는 않았지만,

문명의 오지인 아마존 강상에서는 재난이 또 어떻게 추가로 들이닥칠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한익준은 보트 바닥에 누워서 오다가 호텔 아래 선창에서부터는 임시로

마련한 들것에 실려서 올라왔다. 아마존 강과 밀림으로 어둠이 곧장 찾아왔다.

한익준은 가이드가 주는 심장 약을 먹고 저녁으로는 과일을 조금 맛본 후, 이내 자리에 누웠는데

거의 탈진 상태였다. 삐라냐들이 갉아먹은 페니스 주변은 화농의 위험이 있어서 일단 항생제를

계속 바르고 있었으나 내일 날이 밝으면 즉시 마나우스로 후송할 준비와 연락을 취해놓고

있었다. 지혈이 되어 더 이상 출혈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약속대로 야간 악어 잡이를 나가야지요?"

위급한 상황이 다소 해결되고 저녁 식사가 끝나자 송정자가 잊었던 사실을 상기하듯 돌연 요청을

하였다. 과연 송정자였다. 이 난리 통에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녀는 악어 잡이 스케줄을 지키라고

계속 성화였다.

"나는 술이 취해서 못나가겠고 한 사장님은 인사불성에다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으니 올란도 하고 두 분이서 나가세요."

저녁을 먹으며 이곳에서 담근 과일주를 몇 잔 마신 가이드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자기

방으로 슬금슬금 가버렸다.

"좋아요, 올란도! 우리끼리 악어 잡이 나가요!"

송정자가 차라리 잘되었다는 식으로 올란도를 졸랐다.

"사실은 지금이 사순절에 고난주인데요---. 세뇨라도 세뇨르 한을 돌보며 조용히 피정을

하시지요---."

올란도가 송정자를 달랬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아마존을 다시 올 처지도 아니고 또

이 밤을 그냥 보내봐야 남편의 상처나 병환에 차도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

위급한 병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올란도가 울 듯 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따라 나갔고

이윽고 모터보트에 엔진 거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수로를 따라서 모터보트 소리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인디오 여인 하나가 한익준이 정신없이 누워있는 방으로 찾아왔다.

"세뇨르 한---."

"누구요?"

잠시나마 선잠을 잔 끝이라 그런가 한익준의 의식이 조금 돌아오고 몸도 아까보다는 좀 나아졌다.

"올란도 아내인데요---."

"? 부부 사이요?"

", 우리의 꿈은 돈을 벌어서 리오나 미국으로 가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영어도 잘하고 손님들에게도 무척 친절하구만---."

"이해해 주세요."

그녀가 침대에 슬그머니 앉는데 짧은 치마 속으로 속옷이 보이지 않았다.

"부인, 이곳에서 그냥 사는 게 좋을 듯 싶소. 그냥 살아요. 미국 올 생각은 더더욱 말고---."

"우리는 파라과이에서 국경을 넘어온 신분이라서 이곳에서도 곧 떠나야 하거든요. 사실 그래서

스페인어를 여기 포르투갈어 보다 더 잘하지요. 하여간 우리가 여기를 떠나도록 도와주세요."

"무슨 말인가?"

"돈이 문제지요. 세뇨라께서는 지금 우리 남편과 신나고도 위험한 악어 잡이를 나갔어요. 그리고

나는 여기 이렇게 있어요. 마음대로---."

"일이 참 잘못 되었네. 저기 내 주머니에는 쓰다 남은 여행비용이 좀 있어요. 많지는 않고---.

나는 현찰 많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미국 사람이라니까. 어쨌든 그걸 나는 여기를 떠날 때 인디오

마을에 다 주고 갈 생각이오. 가이드에게는 의논해봐야 헛수고 같아서 아까 올란도에게 그

이야기를 좀 물어봤더니 무언가 착각을 한 모양이네. 처음 올란도의 선한 눈빛과 염원을 보고

듣는 순간에는 돈을 나누어서 다소간 보태어 줄 생각도 했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생각이 영 달라졌네---."

그가 몸에 힘은 다 빠졌어도 어떤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 순간에 갑자기 인디오 여인은

풍만한 젖가슴으로 그의 코와 입을 내리누르기 시작하였다. 숨이 막혀오는 가운데 그의 심장은

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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