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장편연재) 노년학 대회(5)

원평재 2018. 6. 4. 22:13













4. 전설과 고딕 로만스 풍으로(1)

 

문학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내 대뇌 속에서 화석처럼 고착된 형상이 실제 현실에서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런 인간적 궁금증과 호기심이야 누구나 다 똑같지, 하필 세포 생물학의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뭐 특별히 다른 게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변한 모양을 보인다고 해서 내 기대가 너무 순진했다는 자책도 말이 되지 않으리.

사실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으면서 내 지나온 이야기나 듣고 하소연을 유발시키고 또 그들의

이야기에 나 또한 눈물까지 흘리는 시나리오는 soap opera랄까, 일일 연속극 같은 비현실적

욕망일 뿐, 이기적 DNA가 꾸민 일종의 음모에 다름 아니리라.

사람은, 아니 모든 유기체 나아가서 무기물질 까지도 자체의 내부적 기호를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군집을 이루어도 그런 경향성은 다르지 않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늘의 뜻일 게다. "나르는 새를 보아라" 그렇게 경전의 말씀은 비유를 하지만 비유가 아니라

그건 바로 하늘의 뜻 그 자체일 것이다.

 

내가 이번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슬픈 이야기 때문에 3D 사진 기술만 강조된 이야기를 펼치고

발표한 셈이 되었지만 사실 "DNA-->RNA-->단백질" 이렇게 연결되는 유전자 생물학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결국 만고불변의 법칙이 아니라 확률과 조합으로 귀착되지 않던가.

Gene이 아무리 방아쇠를 당기고 단백질에 깊은 신호를 보내어도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카오스의 법칙이거나 수많은 경우의 수가 만드는 조합, 그리고 그 확률.

내가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며 제일 못 배워 한탄한 게 통계학과 논리학이었을 것이다.

내 통탄의 반대급부일까,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은 수학에 빼어났지. 세계 청소년 수학 경시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게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서였던 가. 학부에서 수학과를 마치더니 원래

계획이라면 의과대학원으로 갈 트랙을 확 꺾어서 인도계 남편과 파푸아 뉴기니 옆 이리안자야로

선교사가 되어 떠난 데에는 나와 조나단의 관계에 대한 착시, 그보다 병든 아버지를 내

팽개쳤다는 오해가 몇 십 퍼센트나 작용했을까?

아니 그보다도 더한 오해는 나와 조나단의 밀착으로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확신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물론 말 수가 적은 아이가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나

이리안자이로 떠나간 행동이 그 반증 같기만 하다. 지금 그 아이 쉐럴이 가까이에서 나의 통계학

자문 역할이 되었더라면 나는 노벨상에 몇 발자국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르지. 유전자 학문 뿐

아니라 메디컬 리서치 전반이 수학자들에게 의존을 하게 되다니, 이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여간 연구가 진행될수록 이렇게 유전자의 전달에 변이의 축선이 되는 확률의 불가측성,

온갖 조합으로 연구자를 낭패시키는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잠시 며칠간의 휴전 기간을 확보하여

낭만적 고향, 조금도 변하지 않은 고향을 그려 보고자 함은 설혹 그 꿈이 허상으로 끝나더라도

평생 한 번 쯤은 그런 어리석음을 부려보아서 후회될 일은 아닐 것이다. 변화와 변형을 타락

이라고 하지도 말자. 어떤 세상에라도 서로 봐주기 하는 "이너 서클"이 있지 않겠는가,

권력 이너서클 말고 서로 모든 걸 발가벗고 그게 힘들다면, 가면 파티라도 열면서 서로 알고도

모른 체 하고 용서하는 서클이 있다면 축복받은 인생이 아닐까.

세상 쪽으로는 그들/그녀들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저 욕망의 리비도, 그것을 내 쪽으로는 감추지

않고 보여주는 친구라면 다시 헤어진 후에라도 영원히 그리워할 대상이 되리라. 나 자신은 다

털어놓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내게 가감 없이 투영된 그들의 모습이라면 내 마음도

세탁이 되는 저 카타르시스의 과정을 공짜로 얻는 게 아니겠는가. 결과를 먼저 발설해 보자면,

내 여자 친구 세 사람을 만난 기록은 참으로 기이한 고딕 로만스 같은 세계였다.

한사람은 미확인된 실종사건으로 범죄자 심리 속에 자신을 속박하며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들을 간신히 지탱하는가 하면 또 하나는 평범을 가장하여 가면무도회를 날마다 개최하는

사람, 또 하나는 우울증의 심연 속에서 섹스에 탐닉하는 님포마니아의 비밀 계좌를 꼭꼭

여미다가 내게만 슬쩍 보이고 다시 말문을 닫은 그런 기록,

 

그런 기록의 첫 장을 열어본다.

후배 여의사와는 출국 때까지 다시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다. 하루는 심포지엄 발표로 바빴고

다음날은 대담 준비와 녹화로 온종일이 다 날아갔으며 심포지엄 끝 날은 낮 12시에 포스팅

자료가 철거되는 것을 구경하듯 바라보면서 후원사에서 베푸는 서울 관광과 회사 방문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날 저녁에는 워커힐에서 만찬이 있었는데 후배를 포함 많은 한국인 의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추가 참가비 70불이 아까워서는 아니었을 터이고 현업과 가정을 꾸리는 후배가 그렇게

한가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전화로만 연락을 하고 정을 나누었다. 참가자들이 워커힐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며 만찬장을 떠날 때에는 수퍼문에 달무리가 져있었다. 달무리라니, 예보대로

며칠 내에는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후배 여의사는 집에서 내 대담 프로를 재미와 함께 깊은

감동으로 잘 보았다고 전화를 주었다. 나는 미리 녹화 씨디를 받은 바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반

이상의 참석자들이 이미 떠나서 자리가 듬성듬성 비었으나 존경하는 선배, 다음 4년을 이끌고

C 회장님의 페어웰 연설을 경청하느라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여럿이 이런저런 공적

사항으로 공로패를 받는 순서에서는 나도 전날 방영된 좌담프로그램 덕택으로 무대에 설 차례가

왔다. C 선배와의 대면과 석별도 그렇게 공식석상에서 나누고야말았다.

 

대회가 끝나고는 사흘을 같은 호텔에 할인 가격으로 더 있도록 미리 주선을 해 두었다. 사흘을 더

묵은 후 오전에 도심 공항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국적기를 타러 인천공항으로 나갈 때 까지가 내

개인에게 주어진 사적인 시공이었다. 삼차원 아니 사차원의 자유차원이었다. 현재 진행형은

물론이려니와 어쩌면 고향의 능금나무 과원으로까지 거꾸로 굴러갈 수도 있을 아,

Free Dimension, 자유차원!

호텔의 비즈니스 룸에서 인터넷을 통하여 연구소로 요약 보고서를 일단 정리하여 보내고 깜박

졸고 있는데 스마트 폰이 울렸다. 프론트에서 승용차 기사가 나를 찾고 있었다. 쿠페 스타일의

페라리가 서있었고 잘 생긴 청년이 나를 금방 알아보았다. 인사를 꾸벅하고 문을 열어서 내가

편히 앉도록 세심함을 보이느라고 그가 대시보드 아래쪽의 콘솔에 내 숄더백을 받아서

넣어주려던 동작과 내가 앉으려는 동작의 불일치가 묘하게 일치 되면서 우리는 서로 스킨십이

되었다. 청년이 왼쪽 눈을 찡긋하며 사과하였다.

"죄송해요. 아주 잘 모시라고 해서."

하지만 별로 죄송한 표정이나 말솜씨는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만 있었더라면 나는 

 스킨십이 된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운전석으로 금방 가서 앉고 스크린 터치로 시동을 걸자

쭉 올린 날개쭉지 차 문이 사분의 일 각도로 내려오면서 금계 포란 형으로 두 사람을 감쌌다.

이어서 안전벨트가 스르르 내려오는 사이에 기분 좋은 느낌의 탄력과 더불어 엔진 소리가 들렸다.

"슈겅, 슈겅"

은박 포일을 부채처럼 부쳐대면 이런 소리가 날까, 쿠페는 냅다 달렸다. 내가 좌석을 조금

당기려고 다시 대시보드의 스크린을 찾는데 오른쪽으로 California라는 흘림체 글자가 화들짝

눈에 들어왔다.

페라리 캘리포니아구나!

글자로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년이 아까 차의 앞쪽 그릴을 지나가는데 보니 청바지가

엉덩이를 바싹 들어 올려주고 "돌체&가바나"란 영문 글자가 바싹 긴장 상태로 붙어 있었다.

"아이구, 페라리 캘리포니아! 난 거기 바로 그 동네에 살아도 못 타본 거네."

이건 물론 청바지의 청년에게 한 말은 아니고 명품으로 몸을 감싼 옛 친구 김민지를 만난 다음의

토로였다. 그녀는 우선 입상로랑의 베이지 색갈 핸드백에서 살바토레 페라가모 지갑을 꺼내더니

청년에게 저녁 값을 우아하게 쥐어주었다.

옷은 또 어디 명품일까, 찬찬히 봐야겠네. 신발은 프라다였다.

내가 그녀의 명품 리스트를 다 알아챈 건 순전히 내 눈썰미, 기억력 DNA 덕분이다. 세포

생물학의 권위자가 거저된 건 아니었다. 물론 전자 현미경을 셋업하고 촬영하는 기술력이 저

품목들을 걸치도록 보장해 주는 건 전혀 아니다. 연구원이란 항상 빠듯하다.

레미제라블?

천만에!

내게는 명품 같은 건 하나도 없으되 있어도 무용지물일 따름이다. 민지는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방학 중 내려왔을 때 보아도 작은 키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 들어간 이후에도 키가 더 큰 것

같았고 노년을 내다보며 조금씩 줄어드는 지금도 그녀의 키는 위축을 거부하는 몸짓 같았다.

내 눈썰미의 판단이었다.

"너 키가 점점 더 크는구나."

이 말도 그녀를 처음 만나며 터뜨린 감탄문 몇 개 속에 들어갔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렇게 30

만에 친구를 얼싸 안으며 엉뚱한 소리만 내질렀다. 그녀는 원래 이목구비가 수려했는데 그 얼굴

모양도 전혀 바뀌지 않았고 주름살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터뜨린 감탄문은 또 있었다.

"어머나, 부군도 계셨네요!"

그 부군 같지 않게 생긴 사내는 와인 바의 안쪽 청록색 은은한 어둠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우리가 입구 밝은 쪽에 서서 난리를 치다가 안으로 안내를 받으며 들어가자 엉거주춤 서있는

모양새였다.

"내 동기 동창, 저 유명한 노벨 의학상 차기 예정자, 강덕희 박사! 여기 어둠속 사나이는 내

보이 프렌드~. 유택수 회장. 돈은 많은지 몰라도 이건 빈 분이야."

그녀가 머리통을 가리켰다. 내가 오기 전에 한잔씩 미리 걸치긴 하였겠다.

"우리가 고향이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다녀가신 곳이지요. 이번에는 세계적 석학을

지척 간에 뫼시다니 큰 영광입니다.“

나는 "아니 뭘요"하지 않고 자세를 꼿꼿이 세우기 시작하였다. 어둠 속에서 이런 사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너무 체신 머리 없이 호들갑을 떨었는가 싶었다.

"여왕님 행차만 강조하실 게 아니라 이육사 시인이 태어나신 곳이고 시인 김종길 교수님의

향리이기도 하시고."

문학소녀의 근본은 저 명품 속에서도 모두 지워지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우리의 해후는 이루어졌다.

 

"네 친정이 원래 잘 지내셨지만 그 보다는 분명 네 힘으로 성공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대략 그런 식이었는데 틀림이 없을 것이었다. 내 직관에.

"성공이란 표현은 덕희 너에게 해당되는 말이고 난 좀 돈은 벌었달까~. 다 허무한 일이지."

그녀가 허무란 말을 하는데 그 서슬인지 목에 매단 다이아몬드가 은은하게 우선 서너 가지

빛갈을 선사하며 존재를 과시하였다. 저건 가짜가 아닌 진짜일 것이고 텐 캐럿 정도? 아니

홀수로 나인 보다는 일레븐을 택했을 것이다. 민지라면 그 정도 돈과 안목은 있을 거야.

손에는 아무 반지도 끼지 않았다. 아마도 사파이어를 끼고 싶었겠지만 이곳 분위기가 청록이니

빛을 발하기에는 힘들었을 테고 루비는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럼 꼭 여기라야 되나? 다른 장소를 물색하지. 순간 내 생각을 꿰뚫은 듯 그녀가 카운터 쪽을

불렀다.

"심 회장~! 우리 그거 시킨 것 좀 갖다 줘요. 그리고 와인은 뭘로 할까?"

그녀가 나에게 와인 리스트의 초이스를 맡기며 몇 마디를 붙였다.

"저 심 회장이 유명한 그 탤런트의 언니이고 또 동생도 있어. 세 자매가 운영하는 곳이지."

아하, 사파이어를 포기하고도 이곳 청록 분위기를 택한 이유가 있었네.

"나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산이면 다 좋아. 특히 피노 느와르면 더 좋겠고."

"그건 부르고뉴 지방산이 오리지널 아닙니까?"

유 회장이 알은체를 하였다.

", 그렇지만 거기서 유래하여 미국의 오리건과 캘리포니아 산도 대단해 졌지요. 유럽 보다

이쪽이 항상 일조량이 좋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있어서 무슨 해를 특별히 따지지 않아도 좋구요.

값도 부담이 적지요, 호호호. 꼭 프랑스산으로 고르라면 같은 맥락에서 브루고뉴 산 샤도네이도

좋구요."

", 꼭 그거라야 되니? 난 그게 좀 달고 과일향도 느껴지고 색조도 좀 히덕시그리 하더만."

민지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히덕시그리"란 표현은 내게 대한 다정함, 동향의식의 발현이리라.

하여간 와인의 특징 설명으로라면 맞는 표현이었지만 혹시 예전처럼 뭘 좀 안다는 엘리트 의식의

발로는 아니겠지?

유 회장은 재까닥 그녀의 말에 복종하였다. 납작 엎드린다는 표현이 예전에 있었는데 바로 그런

자세였다.

"하하하, 우린, 아니 나는 뭐가 뭔지 모르니까 그저 비싼 걸로 시키면 틀림이 없다니까요.

심 회장, 우리 그거 달지 않은 걸로 우선 한 병 따고."

양고기가 갖은 양념으로 나왔고 마침 일본에서 와규가 들어왔다고 권해서 또 그걸로 스테이크를

시켜서 푸짐한 안주를 즐겼다. 술은 막 딴 코르크 마개 뒤를 따라 모연이 거만하게 피어오르고 술

향이 묵직한 것으로 봐서 보르도 산 까베네이 쇼비뇽이 푸르스름한 어둠 속을 침노함에 틀림

없었다. 모연 속에 조나단 모습이 잠시 스쳤다. 그와 나는 와인 취향만은 달랐다.

술이 조금 오르자 유 회장은 자꾸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명사들과 찍은 사진이 수도 없이

많다고 자랑까지 곁들였다. 내가 모델을 허락하는 대신에 절대적 발언권을 요구하고 모두 찬성

하였다. 심 회장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즉석 사진과 디지털 사진을 찍었다. 승용차 기사로 쓰는

그 청년이 들어와서 "누님"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심씨 성을 가진 유명한 탤런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전화 독촉까지 했는데도. 아쉽지는 않았다.

"작은 차는 갖다 두고 큰 차 갖고 왔습니다."

청년이 높은 음으로 보고를 하였다.

"이번에 벤츠 S를 뽑았답니다. 참 잘하셨어요."

유 회장이 옆에서 아첨하듯 거들었다.

"과시하려면 아까부터 람보르기니를 빌려서 보내지 그랬니?"

내가 민지를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농담을 하였다. 소녀시절에 맺은 우정이었다.

"저 청년을 몽땅 빌렸는데 수중에 페라리 캘리포니아 밖에 없다고 하더라. 호호호."

그녀가 할리우드 식 농담으로 받아내었다. 아직도 머리가 좋았다.

"민지야, 너 오늘 나하고 만나자마자 너무 작위적, 아니 위악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무슨 곡절이

있니? 우리가 뭐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거나 만난 것도 아니고. 또 그런 걸

따질 나이도 지났는데 좀 심하구나, -".

"아니 작위적이라는 건 좀 어폐가 있다만 일단은 미안하구나. 그렇게 보여서. 사실은 내 실제의

모습이고 또 내일 닥터 나, 그래 희은이 만나면 다 이야기를 들을 테니까 싶어서 미리

고백하는 셈이야. 희은이도 오늘 함께 만나자고 했는데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내일 따로

만나겠다니 그 애 속을 어떻게 알아. 분명 나하고 같이 만나기가 싫었을 거야."

"그래, 뭐 그건 좋아. 그대로 넘어가자. 그런데 오랜 옛날 고리짝 이야기이지만 너 내가 미국가기

직전에 결혼 청첩장을 보냈었지? 내가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축의금은 보냈을 거야.

그때 결혼한 부군과는 헤어졌니?"

", 사별---, 아니 이혼을 했어. 이혼이 더 정확해."

"언제?"

"한 십년 전이야."

"지금 기억이 나네. 학교 다니면서 열애를 한다고. 집안에서는 물론 반대가 심하다는 소문이

고향에까지 자자했어."

", 저기 저 양반 집안사람이고 그 동네, 그러니까 안동 풍산이지 뭐, 거기 고시에 합격한 예비

검사님이 있었는데 결혼하라고 집안에서는 난리였지, 나는 그때 안암골 호랑이하고 열애

중이었다네."

"호랑이한테 홀딱 빠졌었구나. 너 같은 고집쟁이, 잘난 체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가, 호호호.

뭐하는 분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엔지니어 계통이었어. 다리를 놓는 꿈을 가진 이상한 사나이였지. 내가 왜 그런

사람하고 연애를 했는지, 그걸 지금도 모르겠어. 호랑이가 아니고 고양이 밖에 안 되는 사람

이었는데. 다만 나한테 참 잘해주었어. 노예, 그래 종이었다고나 할까. 그게 내 오만한 정신에 딱

 맞았나봐. 의대 공부가 치열했잖아, 특히 그때가. 그리고 자살한 학생들도 해마다 두어 명 각

의대마다 나오고 했잖아. 그때 그 사람이 매일 밤이면 찾아와서 나를 북돋우고 발을 씻겨서

마사지까지 해주고. 그러니 내가 홀딱 몸을 맡겼나 봐. 우리 집이 그때 강남이었는데 내가 학교

근처 연건동에 방을 얻어놓고 따로 있었거든. 사실 내가 말만 거칠고 고집만 센 게 아니라 나도

몰랐는데 심신이 모두 거칠고 강렬한가봐. 그건 저기 저 양반도 잘 알지."

동의를 요청받은 사나이가 경청을 하다말고 벌떡 일어나서 민지에게 가더니 어깨 쪽으로 마사지

같은걸 해주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