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이의 날 (소설집)

(단편소설) 대둔산 목가

원평재 2018. 1. 11. 20:08









대둔산 목가

                                                           

                                                               

최근 대둔산에 다녀왔다. 오래 전에 생물학을 전공하여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는

내가 전국의 산야를 누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대둔산과의 인연은

조금 남달랐다. 생물학의 분야도 요즈음은 아주 세분화 되어서 동물학, 식물학, 미생물학,

분자 생물학 등의 분류는 기본에 속하고 생화학, 생명 공학, 생물 공학, 생물 전자 공학

등의 복합 컨버전스로 확장된 분야를 꼽자면 한이 없으나 내가 평생을 바친 분야는 식물학

중에서도 식물 생태학, 더욱 분야를 좁히면 군락(群落)에 관한 연구 분야이다.

이 학문 분야가 인류에 공헌하는 역할도 별로이고 개인적 밥벌이도 시원치 않으리라 지레

짐작이 혹시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본다면 모르는 말씀이다. 산업화와 함께 환경 영향

평가의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이 분야도 개발이 따르는 지역의 환경평가에서는 약방의

감초격이 되었다.

대둔산 이야기의 시작이 좀 수다스럽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미스 박, 그러니까

지금은 중년이 되었을 박 양을 안 것은 대둔산의 "케이블 카"가 환경을 파괴한다는 민원이

제기된 80년대 초의 일이었다. 당시 대학의 강사 노릇을 하며 지도교수의 소위 "가방모찌"

역할을 하던 내게 지도교수께서는 이 민원 문제를 수탁 연구 테마로 수주를 하였으니,

"자네가 모든 책임을 지고 현지답사와 결론까지 유도해 내라"는 과제를 위임 한 적이

있었다.

수탁된 그 "환경 영향 평가"는 케이블카가 환경에 별로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종결 되었는데, 이게 업자의 로비나 지역 발전을 염두에 둔 지방

관청의 압력이 아니냐는 지방 신문의 가십 기사도 있었으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고,

오히려 케이블카가 없으면 환경은 더욱 심하게 파괴되리라는 내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여간 나는 당시 가난한 시간 강사였고 갓 결혼한 아내는 배가 만삭이었다. 총각 같은

생활을 몇 달째 하던 나는 이 수탁 과제를 추진하면서 대둔산 아래의 어떤 밥집에서 보름간

밥을 붙여먹고 기거를 하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그 민박집 비슷한 식당 옥호가 "박씨 네"

였다.

알고 보니 젊은 주인 남자의 본관이 "** "씨여서 그런 이름을 밥집의 간판으로 내단 모양

이었고, 부억 일과 잔심부름을 맡은 젊은 처녀가 하나 있었는데 그녀도 관향이 같은 박씨

였다. 주인 남자의 부인은 물론 당연히 성씨가 달랐으나 지금 기억은 없다.

긴 사연을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하여간 나는 그 박씨 처녀와 서너 번 잠을 잤다.

하찮은 유혹도 없었고 삼류 소설의 반항 같은 잡스런 과정은 더더욱 없었다. 맑은 공기와

청정한 분위기가 두 남녀를 그렇게 묶어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소녀같이 젊은 여자가 그런 방면에 벌써 소질이 많아---."

잠자리 기술이 그 나이에 예사롭지 않아서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정황이었지만 아마도 나는

참았을 것이다.

 

사랑---,

애달픈 사랑---,

그런 감상을 거짓으로라도 덧붙이지 않고 어떻게 이 풍진 세상에 옛 여인의 이야기를 드리

밀 수 있겠느냐고 근심하는 분이 있을지라도, 글쎄 세월과 기억이 바래서 그런지 당시에는

그런 느낌 보다 그냥 서로 안지 않고는 못 배길 정황뿐이었던 것 같다. 그게 인문학이 아닌

생물학 전공의 내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프로젝트가 끝나자 나는 지도교수의 연구소가 찍힌 명함 한 장을 그녀에게 주고 왔다.

몇 달이 지나서 박 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 신촌의 "모래 내" 어디 술집에 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땐 그런 여자들, 밥 먹고 살기 위하여 올라온

시골 여자들이 모래 내, 연신내, 신촌 로타리, 청계천, 북창동, 광교에, , 그리고 차츰

강남의 제일 생명 네거리와 강남 구청 쪽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대둔산 밥집 보다 여기가 나은가?"

나 같은 가방 모찌들을 몰고 가서 맥주 몇 병 시켜 놓고 내가 호기롭게 물었다. 양심의

가책도 없었고 여자도 뭘 따지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시대의 잣대로 지난 시대를

"도덕 불감증의 시대"였다라고 무조건 매도하지는 말자. 지금은 강남역 네거리에서 자의로

배꼽을 내놓고 다니는 여염집 처녀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땐 손님의 팁을 받은 죄로 배꼽을

내 보여 주고도 시골 처녀들은 서럽게 울었고, 가난한 학삐리들과 가방모찌들은 그 옆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논하고 유신과 군사독재를 저주하였다.

"여기가 나으리라고 온 건 아니죠. 쫓겨났어요."

"?"

"박씨 아저씨와 잠을 자다가 부인에게 들켜서---."

"동성동본끼리?"

"박씨 아저씨가 저를 무척 사랑했거든요---."

"상피 붙었네."

", 다들 그러면서 손가락질을 했어요."

"아저씨가 순진한 친척 아가씨를 속였군."

"아뇨, 틀렸어요. 진정 사랑했어요. 선생님하고는 달라요."

유행가 가사 같은 사랑 이야기가 나왔으나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박 양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너무나 반듯하였다.

맞다.

내가 이 반듯한 얼굴 때문에 가슴 뭉클하여 그녀를 안았지. 대둔산 산자락 아래 억새풀과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곳에서 대둔산 정기를 타고난 그녀를 안았지.

 

미스 박은 모래내 사천교의 허름한 술집을 졸업하고 신촌 로타리 쪽으로 스카웃되어 신촌

바닥에서는 한참 잘나가는 아가씨가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심심할 때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면 차는 마셨어도 더 이상 그녀를 안지 않았다.

새로운 군부 독재가 시작되면서 공직 기강의 확립 차원인지 공포 정치의 또 다른 형태였는지

도덕성이 강조 되었고 어쨌든 사람들은 이런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

하였다. 아니, 이러한 시대정신에 덧붙여서 "선생님과는 달라요"라는 말이 내 폐부를 찔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스 박은 이런 세태의 불경기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한해가 더 지난 후에 다시

나타났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만삭이었다.

"설마?"

내가 물었다.

 

"맞아요. 박 사장님의 아이에요."

"맙소사."

"놀라셨죠. 박 사장님은 이혼했어요. 뭔가 다르죠?"

"자랑하러 오셨나, 미스 박. 그러나 하여간 배웠다는 우리가 부끄럽네. 자네가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우린 정식결혼은 못한대요. 그게 좀 억울해요."

"왜 왔소?"

"답답할 때면 선생님 뵙고 자랑하고 싶었어요. 내기에 이긴 기분도 좀 내고 싶었고요---."

"자네가 이겼네. 우리가 내기한건 아니지만---. 내가 손들었어."

그녀는 대둔산 구름다리 위에서 기념품 가게를 한다고 했다.

"꼭 한번 오세요. 금방 찾아요."

"그러리다. 그런데 박사장은?"

"예전 밥집에서 식당을 크게 열었어요."

 

그게 거의 한 세대가 흘러갔다. 나는 지방 대학을 거쳐 서울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동이

심했다. 대둔산은 내 연구의 변경을 번번이 넘어서서 인연이 없었다. 이번에도 연구와

관련이 있어서 찾은 것이 아니라 고등학교 동기들과의 순전한 단풍놀이 관광 여행이었다.

내 친구 하나가 어느새 케이블 카 관련 회사와 사돈이 된 덕택이었다.

인산인해 속에서도 우리는 미리 예매된 표로 케이블카를 쉽게 탈 수 있었다. 그리고

구름다리, 다시 높은 사다리 타고 오르기.

그런데 그 어느 곳에도 기념품 가게 같은 곳은 없었다. 아마도 설악산이 그러했듯이 일대

주변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건 잘한 일이었다. 함께 간 친구들은 정상 직전에서 헐덕이며

간이식당같이 생긴 허름한 포장마차로부터 동동주를 시켜서 마시고 있었다. 낮술이 부담

되어 나는 부르는 동기들을 뒤로 하고 조금 위의 정상 쪽으로 재빨리 발걸음을 돌렸다.

정상, 거기에는 마치 미스 박이 있는듯하였다. 허리 춤 아래로는 검은 돌로 치마를 입힌 듯,

허리 위로는 반짝이는 금속 탑신으로 육화된 미스 박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예전의 남정네인

나를 맞이하는 듯하였다. 기하학적으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그 탑신의 이름은 조금 실망

스럽게도 "개척탑"이었다. 공연히 그 "개척 탑신"을 한바퀴 쓸어안고 돌다가 나는 이내 다시

내려왔다.

 

머리가 허연 가게 주인에게서 동기들은 동동주를 자꾸만 더 주문하여 아직도 마시지 않은

동기들의 음주 측정까지 해대며 권주를 하였고 나는 또 재빨리 몸을 피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코스는 케이블카가 아니고 도보 스케줄을 짜놓았다. 가파른 돌팍 계곡을 내려

오는데 산등성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아름답고 작은 집이 보였다.

돈이나 권세 많은 자의 별장인가?

그러기에는 불편함과 고생이 많겠네---. 하긴 요즈음은 산림관리와 산불 예방 초소도 별장

처럼 멋을 부려놓았지.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가파르고 힘이 들어서 함께 간 부인들의 원성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들 평소의 게으름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을 냈다. 우리가 늦은 점심 자리를 잡은 곳은

"이가 네"였다.

 

아차, 박씨 네는---.

정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붐비는 이가()의 집을 들어서면서야 나는 미스 박에 대한

상념과 영상의 고리를 다시 이을 수 있었다. 단체에 묻힌 관광이란 게 그랬다.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 중년의 여인에게 우리 일행 중의 하나가 익살스레 소리쳤다.

"여보, 여기에 주인 몰래 묵 좀 더 갖다 주시오."

"제가 주인인데요---?"

"그럼 종업원 몰래 갔다주시오!"

와아, 웃음이 이는 뒷꼬리에 내가 주인 여자의 치마 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미안하지만 여기 박씨 네라는 식당은 없나요?"

"네에? 그걸 왜 묻죠? 불이 나서 그만두고 다 저 산위로 올라갔어요."

"불이?"

", 오래 전에 정신 나간 본부인이 질렀는지---, 아이구, 나도 잘 몰라요."

주인 여자가 바쁜 중에 자리를 뜰 궁리를 하였다.

"조금만 더 말해 주시오."

"산 위에서 두 여자가 함께 사는데 하나는 정신이 좀 그렇고 또 하나는 몸이 안 좋다고

하던가---. 영감이 막걸리랑 구멍가게를 해서 그럭저럭 살아가나 봅디다."

주인 여자는 음식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고 주방으로 뛰었다.

단풍이 불붙듯 하는 숲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서 나와 미스 박이 몸을 섞었던 대둔산

아래 자락은 이제 아스팔트길이 깔렸고 그 좌우로는 수많은 승용차들이 개구리 주차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가야 할 대형 버스는 그 아래 주차장에서 짧은 가을날 오후에 대비하여

이미 엔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작가소개

서초문인협회 회장펜클럽 국제교류 위원장, 한국소설가협회 윤리위원, 한국 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문협 회원, 학술원 우수 도서상, 헤밍웨이 문학상, 문학마을 문학상, 계간문예 소설문학상 등 수상

소설집 3, 시집 2권(공저), 평론집 1, 번역서 학술서 다수, 건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