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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문학 기조문,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기행수필문학’

원평재 2022. 1. 12. 22:36

이후문학 기조문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기행수필문학’

김 유 조

신유목민 시대(new nomad epoch)라는 말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말은 원래 4차 산업의 혁신적 발전에 따른 정보 통신의 확장 공간에서 인류사를 해석하는 데에 주로 쓰이고 있지만, 유목에서 농경생활을 거쳐 오늘날 다시 ‘여행’이라고 하는 보편적 이동을 누리는 현대인의 생태를 지칭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거의 반세기 전 저명한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한이 "미래의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이동하면서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라고 예언한 말에는 다소 과격함이 들어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와 유사한 생활 패턴을 영위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신유목민이라는 말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자크 아탈리가 명명한 것으로 그의 작업은 주로 인간의 역사에서 메가트랜드를 발견해내고 이를 이용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미래 문명의 경향을 특징짓기 위하여 '신 유목민'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가 언급한 신유목민은 그러니까 디지털을 바탕으로 한 정보 통신 혁명의 시대에서 붙박이 시대를 탈피한 현대인들의 문화현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예리한 미래예측의 키워드이었다.

전제가 조금 길어진 이유는 이러한 인류사의 문화 트렌드 속에서 문학, 특히 ‘기행 수필문학’의 현주소는 어떠하며 또 그 존재 양식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아가야할 것인가를 짚어보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디지털 노마드 시대’의 지배적 문화행태는 많은 것을 버리고 휴대하지 않는 것이기에 문학도 사이버문학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며 이는 우선 역사. 사회. 인류의 중대 문제 등 거대담론을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경쾌한 주제를 짤막하게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사이버문학은 가장 사적(私的)인 문학을 탐색하게 된다. 사적 문학의 존재양식은 휴대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여 영상을 곧장 담아내어 거기에 자신의 감상이나 주장을 달아내는 새로운 사적 수필문학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진행형으로 찍혀 나오는 파노라마 같은 영상들은 대체로 기행문학적 특성을 띄지 않을 수 없는 개연성을 갖고 있다 하겠다.

이런 변화는 바로 문학에서 장르의 해체를 가속화시켜 ‘모든 문학의 수필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소설의 상당부분이 사소설이고, 시는 장르의 특성상 이미 사적인 감성 표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굳이 말한다면 소설과 시의 수필화란 경향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격변하는 문화, 문학 환경 속에서 수필문학의 전통적 고유성을 지켜나가고 있는 수필문학도로서는 일면 희망적 미래상과 아울러 또 다른 혼돈상을 함께 겪지 않을 수 없는 생태계가 눈앞에 전개된 셈이다.

따지고 보면 디지털 유형의 수필세계가 우리에게 아주 낯선 세계인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 전통가옥의 필수품이었던 팔 폭 혹은 열 폭짜리 병풍들은 거기 배경이 되는 풍경과 아울러 풍류의 시가가 함께하여 우리에게는 그 형식이 문화 매체로서 이미 익숙하지 않았던가. ‘풍경이 있는 기행수필 형식’이 디지털 시대의 독창물은 아니라는 반론이기도하다.

조선시대 개화기에는 서양의 여행자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수많은 풍물을 찍어서 짧고 혹은 긴 기행문을 본국의 정기간행물에 싣고 있었는데 그 기록들이 최근 우리에게 다수 선을 보이면서 이 또한 풍경이 있는 기행수필의 맥을 우리에게 친근하게 전수해 주고 있다.

여기서 여행문학의 근세사를 잠시 돌이켜보면 여행문학 혹은 기행수필은 유럽 식민주의 팽창시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한 장르라고 볼 수가 있다. 즉 여행문학은 유럽인이 타자인 비유럽인을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우월적 위상을 정립했던 제국주의 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여행문학에 스며있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다.

시대가 바뀌어 21세기의 문학을 논하는 오늘날은 여행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요청되고 있다. 기존의 여행문학이 자아/타자, 지배/피지배, 서구/비서구의 (탈)식민주의 담론의 틀 안에서 비판되었다면, 요즈음 등장하는 여행문학의 경향은 잡종적 정체성, 노마드, 디아스포라, 통문화, 세계시민주의 등의 키워드를 통섭하고 있다.

기행수필의 경우에도 이런 정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민 관광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할 정도로 신유목민의 족적은 분주하고 다양하다. 수필문학의 미래에 대한 긍정과 디지털 현실에 따른 당혹의 이중적 토양에서 기행수필은 그 영역을 어떻게 지키고 또 혁신할 것인가. 그 당위성과 당면 과제를 살피는 것이 오늘의 지속적 주제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행 잡지의 주간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도 이러한 현실 파악의 문제는 참으로 절실하다. 이제, 아니 벌써부터 잡지는 읽는 대상이 아니라 보는 대상이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일부 홈 매거진과 여행 문화 잡지가 특히 그러한 트렌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기행수필 주제에서의 큰 변화의 물결과 함께 형식에서의 일대 혁신을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시대이다. 영상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 시대에는 ‘디카(디지털 카메라)’라는 마법의 작은 상자가 세상의 다변하는 정경은 물론 아예 우리의 사유 자체를 채취하고 기록해내는 세상이 되었다. 이 신기원의 시대에 우리의 기행수필문학은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할 것인가.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득 ‘디카시’라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떠올리게 된다. 디카시 분야는 이미 정통 문예잡지에서도 광범위하게 다루고 많은 시인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디카시 특집은 물론 전문잡지까지도 나오고 있다. 특기할 바로는 디카시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생하여 국제적으로도 ‘dicapoem’ ‘迪卡诗’ 등으로 명칭부터 공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디카시의 장점은 순간적인 느낌의 포착이다. 어떤 장면에 대한 서정을 시로 나타 낼 때 감정의 흐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용이 된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기에 오래 유효하고 적절하여 도입이 필수적이다. 더욱이 영상 이미지에 함몰된 미래 세대에게 어필하는 시세계의 향방을 잡기위해서도 디카시의 시도는 필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디카시의 장점과 환경을 수필에 접목시켜보자는 시도는 어떠한가. 물론 이전부터 한 두 장의 사진에 산문을 서술하는 고식적 방식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런 형식을 이른바 ‘디카 수필’이라고 하기는 섣부르다. 여러 장의 사진을 배열하고 그 이미지를 앞세워서 생각의 단락을 이어가는 것이어야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학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이 한 단락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디카 수필도 그런 원칙을 접목하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수필문학이 생성되고 성숙될 수 있지 않겠는가. 더하여 디카의 파노라마적인 특성이 전제되기에 디카수필은 기행수필과 가장 잘 어울리는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디카수필이라는 장르를 정식으로 구현하여 발표된 지면은 일직이 계간 『문학의 봄』(2008년 가을호)에서 본다. 이후 이러한 패턴은 현재 여러 문예지에서 실험정신 가득한 수필가들이 꾸준히 발표의 장을 늘리고 있다. 참고로 필자가 편집을 맡고 있는 계간 『여행문화』에서도 이런 기행 수필 형식은 그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정목일은 ‘디카수필은 즉시성, 현장성, 기록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쓰기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 풍경은 오래 동안 가슴에 담아 우려내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순간의 진실과 감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고 굴절되기 때문에 즉시성과 현장성을 부각시키는 디카 수필에서 순수성을 여과 없이 살릴 수 있다. 수필 장르에 속하는 일기문, 기행문, 감상문의 경우는 즉시성과 현장성을 살리는 게 효과적이기에 디카수필의 활용도가 많으리라고 본다.’라고 했다.

디카수필은 특히 기행수필에서 앞으로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고 또한 시도 되어야 할 주제가 아닌가싶다는 그의 견해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시대는 이미지가 풍부하게 곁들이지 않는 기행 수필은 그 만큼 가독성이 낮다.

일찍이 서구에서도 pictorial essay, photographic essay, 혹은 줄여서 포토 에세이라고 하는 수필 분야가 존재하지 않았던 바는 아니다. 사실 근본적으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류문화 형태의 기록상 최초의 본보기들, 예컨대 1만 8천 년 전의 알타미라 동굴이나 그 후대의 라스코 동굴화,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도 모두 서사를 이미지로 재현해내려고 한 인류의 염원이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회화와 영상 기술의 발전이 서사 기록문학과의 접목은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예술과 기행문학수필의 접목에 따르는 문학적 에스프리는 어떻게 기존의 기행수필문학과 변별성을 갖게 될 것인가,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지금까지도 기행수필에는 사진이나 회화, 펜화 등이 곁들여지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적어도 ‘디카 기행수필’이라고 한다면 한두 장의 사진과 서술문이 병행하는 전통적인 방법과는 변별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기행사진들을 보면 대체로 미리 정해진 포토 포인트에서 같은 화각으로 찍어내다시피 한 키치 사진들이 태반이었다고 할 것이다. 여행은 나만의 것이었는데 사진은 판박이 대량생산인 경우가 많았더라는 말은 흔히 듣는 자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디카수필이라고 하면 이런 키치 사진으로부터 전복적인 시각을 구축해야만 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삶을 기만하는 대중문화를 경계했다. ‘세계의 획일화와 사유의 동일화에 저항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다ㆍ 예술가들은 다른 삶을 산다ㆍ 사회의 룰보다는 자신만의 진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디카기행수필’, ‘풍경이 있는 기행수필가’라면 지금까지의 수많은 키치의 산더미와는 달리 진정한 자신만의 앵글을 갖고 현상과 자연을 재해석하여 기록하고 그 영상에 관한 서술문을 구사하여야할 것이다.

우리가 ‘풍경이 있는 기행수필’을 지향한 일차적인 동인은 4차 산업사회가 가져온 새로운 미디어의 환경 때문에 촉발되었다고 할 수는 있다. 이른바 하이퍼텍스트 문학 환경, 새로운 기술과 환경과의 문학 접목에서 유발되었다는 일차적상황이지만 이제는 그 속에서 획일화의 타파와 키치로부터의 탈피를 구현하는 당위성을 추구하자는 이야기이다.

프란스키는 『같은 곳에서 다른 사진』에서 ‘인간은 저마다 고유시간에 둘러싸여, 다른 누구와도 이 고유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순간에 같은 방향으로 동일한 속도로 똑같이 무거운 질량 곁을 운동하며 지나가는 것하고만 인간은 동시성을 갖는다’라고 하며, ‘결국 인간은 자신의 시간적 모나드(단자)인 노마드(유목인)이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진정한 이 시대의 풍경이 있는 기행수필가라면 가슴에 새겨볼 경구가 아닌가 한다.

(전 건국대 부총장, 현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세계한인작가연대 공동대표, 여행문화 주간)